<연합인터뷰> 파독광부 출신 권이종 교수 /이주노동자인권보장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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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미친꽃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61.♡.20.30) 댓글댓글 조회8,040회 작성일2004-06-18 12:17본문
<연합인터뷰> 파독광부 출신 권이종 교수
"광부들을 푸대접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서울=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 "독일 광산에서 일할 때부터 언젠가는 광산 근무의 실상과 유학생활에 대한 책을 써야겠다고 마음을 굳혀 시간 날 때마다 메모를해왔습니다. 마침 방송사에서 관련 프로그램을 제작한다고 해 출간을 결정했습니다"젊은 날 한때를 독일 광산의 막장에서 보냈던 권이종(64.한국청소년개발원장)한국교원대 교수가 자신의 독일 시절을 회고하고 한국 광산촌의 현실을 안타까워 하는 「교수가 된 광부」(이채)를 펴내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냈다.
이번 출간은 MBC가 11-13일 스페셜 3부작 '독일로 간 광부.간호사들'편을 방송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이뤄져 더욱 눈길을 모은다. MBC는 이 특집을 '독일 40년,청춘을 묻고' '꿈을 찾아서' '돌아갈 수 없는 고향'으로 구성해 차례로 내보낸다.
이 책은 교수직 정년퇴임과 청소년개발원장 임기만료를 앞두고 펴낸다는 점에서회고록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1960년대 한국 광부들이 독일로 떠나게 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고 이후 한국정부의 정책변화상도 탄광 분야를 중심으로 더듬고 있어 전체적으로 개인사의 범위를 뛰어넘는다.
전북 장수에서 태어난 권 교수는 초등학교만 졸업한 채 고학으로 중.고교를 간신히 다녔다. 군복무를 마친 그가 지독한 가난을 뒤로 하고 이역만리 '기회의 땅'으로 떠난 것은 1964년. 그해는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하고 독일 대통령도 한국을 찾는 등 양국 사이에 경제협력이 강화되던 때였다.
"메르크슈타인 광산의 지하 수천 미터를 오르내리며 3년 동안 일했습니다. 새벽4시에 일어나 막장 인생의 삽질을 시작할 때마다 심한 공포와 불안에 시달려야 했어요. 끼니는 빵과 과일 몇 개로 때우기 일쑤였구요. 독일로 간 한국인 광부가 모두 8천명에 가깝고, 이중 27명이 이런저런 사고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내게도 사고가 있었지만 머리에서 발끝까지 멀쩡한 것은 기적적인 일이지요"권 교수는 파독광부 중 보기 드물게 성공한 편에 속한다. 자신을 친자식처럼 아껴준 독일인 양어머니의 강권으로 귀국 대신 체류를 택한 그는 십수 년의 고생 끝에아헨교원대학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1980년대 초에 19년간의 독일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 청소년교육에 투신했다.
교육 일선에서 반평생을 보내온 그이지만 3년간의 광부생활은 무거운 마음의 부채로 남아 있다. 지금까지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걸으며 행복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그는 대체로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 '광부 동료'들에게 한없이 미안하다. 여기서 말하는 광부는 파독 광부는 물론 국내 광부들도 포함한다.
특히 '독일을 배우자'며 독일행을 부추기던 정부가 당시에 했던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현실은 권 교수를 두고두고 안타깝게 했다. 그가 광부로 가던 해에 독일을방문한 박 대통령이 광산촌을 찾아 "독일에서 열심히 일하고 한국에 돌아오면 잘 살수 있게 도와주겠다"는 내용의 연설을 했으나 4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이 약속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파독) 광부들에게 정부가 해준 건 아무 것도 없어요. 국내 광부들도 마찬가지예요. 수천 명의 광부들은 대부분 광산촌을 떠났고, 이후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광부들의 과거 삶을 인정하지 않는 거지요. 그들이 얼마나 열심히 경제부흥을 일궈냈고, 산업전사로서 훌륭하게 일해왔는가를 인정하기는커녕 푸대접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국내) 광부들도 꿈과 미래가 없이떠날 준비만 하고 있다고 합니다. 국민소득 90달러가 안 되었던 1960년대 초와 1만1천달러가 넘는 현재의 광산촌 생활상은 크게 바뀌지 않았어요"그러면서 권 교수는 독일의 경우를 들려준다. 한 탄광촌의 쓰레기 동산은 인공실내 스키장으로 탈바꿈해 연간 50만명의 이용객을 끌어들이는가 하면 150년 전의모든 탄광 기계시설은 그대로 보존돼 박물관이 돼 있다는 것. 지하로 내려가는 시설공간 안에서는 현대식 음식점이 성업중이고, 석탄의 갱차와 막장시설 등은 어린이들의 놀이기구와 놀이터로 활용되고 있다.
독일의 광산촌 주변에 보존된 광산시설은 무려 6천800여개. 연간 수천만명이 관광지로 변모한 폐광촌을 다녀가고 갱도, 승강기, 건물은 유엔이 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당당하게 서 있다. 그런가 하면 광부 출신들은 합창단을 조직해 석탄더미에 무대를 차려놓고 '광부의 노래'를 힘차게 들려준다. 폐광으로 인해 생겨난 실직자를위해서는 재교육 프로그램 등으로 새 일자리를 적극 주선해주기도 한다. 이는 카지노 하나 달랑 지어놓고 나몰라라 하는 우리의 경우와는 크게 대비되는 것.
"초현대적 프로젝트로 재개발된 독일의 광산촌들은 20-30년 전 독일 부흥의 기관차 역할을 했던 광부들이 자녀, 이웃과 함께 진정한 삶을 향유할 수 있는 터전이되었습니다. 지역문화, 휴식공간, 놀이공간으로 복합된 지역사회에서 여생을 보내는모습이 너무 부럽습니다"권 교수는 자신이 독일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살았던 과거를 상기시키며 국내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인식과 처우도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광산 일을 시작하고 공부를 마치고 귀국할 때까지 독일인들은 모든 면에서 그를 인격적으로 대해줬으며 임금착취, 인격모독, 인종차별 등의 불합리한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다는 것.
따라서 '때리지 마세요' '월급 주세요' '우리는 노예가 아닙니다'라는 국내 외국인 노동자들의 절규가 더이상 나오지 않게 그들에게 차별없는 근로조건과 인권을보장해줘야 한다고 그는 힘주어 말했다.
ido@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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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부들을 푸대접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서울=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 "독일 광산에서 일할 때부터 언젠가는 광산 근무의 실상과 유학생활에 대한 책을 써야겠다고 마음을 굳혀 시간 날 때마다 메모를해왔습니다. 마침 방송사에서 관련 프로그램을 제작한다고 해 출간을 결정했습니다"젊은 날 한때를 독일 광산의 막장에서 보냈던 권이종(64.한국청소년개발원장)한국교원대 교수가 자신의 독일 시절을 회고하고 한국 광산촌의 현실을 안타까워 하는 「교수가 된 광부」(이채)를 펴내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냈다.
이번 출간은 MBC가 11-13일 스페셜 3부작 '독일로 간 광부.간호사들'편을 방송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이뤄져 더욱 눈길을 모은다. MBC는 이 특집을 '독일 40년,청춘을 묻고' '꿈을 찾아서' '돌아갈 수 없는 고향'으로 구성해 차례로 내보낸다.
이 책은 교수직 정년퇴임과 청소년개발원장 임기만료를 앞두고 펴낸다는 점에서회고록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1960년대 한국 광부들이 독일로 떠나게 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고 이후 한국정부의 정책변화상도 탄광 분야를 중심으로 더듬고 있어 전체적으로 개인사의 범위를 뛰어넘는다.
전북 장수에서 태어난 권 교수는 초등학교만 졸업한 채 고학으로 중.고교를 간신히 다녔다. 군복무를 마친 그가 지독한 가난을 뒤로 하고 이역만리 '기회의 땅'으로 떠난 것은 1964년. 그해는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하고 독일 대통령도 한국을 찾는 등 양국 사이에 경제협력이 강화되던 때였다.
"메르크슈타인 광산의 지하 수천 미터를 오르내리며 3년 동안 일했습니다. 새벽4시에 일어나 막장 인생의 삽질을 시작할 때마다 심한 공포와 불안에 시달려야 했어요. 끼니는 빵과 과일 몇 개로 때우기 일쑤였구요. 독일로 간 한국인 광부가 모두 8천명에 가깝고, 이중 27명이 이런저런 사고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내게도 사고가 있었지만 머리에서 발끝까지 멀쩡한 것은 기적적인 일이지요"권 교수는 파독광부 중 보기 드물게 성공한 편에 속한다. 자신을 친자식처럼 아껴준 독일인 양어머니의 강권으로 귀국 대신 체류를 택한 그는 십수 년의 고생 끝에아헨교원대학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1980년대 초에 19년간의 독일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 청소년교육에 투신했다.
교육 일선에서 반평생을 보내온 그이지만 3년간의 광부생활은 무거운 마음의 부채로 남아 있다. 지금까지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걸으며 행복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그는 대체로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 '광부 동료'들에게 한없이 미안하다. 여기서 말하는 광부는 파독 광부는 물론 국내 광부들도 포함한다.
특히 '독일을 배우자'며 독일행을 부추기던 정부가 당시에 했던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현실은 권 교수를 두고두고 안타깝게 했다. 그가 광부로 가던 해에 독일을방문한 박 대통령이 광산촌을 찾아 "독일에서 열심히 일하고 한국에 돌아오면 잘 살수 있게 도와주겠다"는 내용의 연설을 했으나 4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이 약속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파독) 광부들에게 정부가 해준 건 아무 것도 없어요. 국내 광부들도 마찬가지예요. 수천 명의 광부들은 대부분 광산촌을 떠났고, 이후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광부들의 과거 삶을 인정하지 않는 거지요. 그들이 얼마나 열심히 경제부흥을 일궈냈고, 산업전사로서 훌륭하게 일해왔는가를 인정하기는커녕 푸대접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국내) 광부들도 꿈과 미래가 없이떠날 준비만 하고 있다고 합니다. 국민소득 90달러가 안 되었던 1960년대 초와 1만1천달러가 넘는 현재의 광산촌 생활상은 크게 바뀌지 않았어요"그러면서 권 교수는 독일의 경우를 들려준다. 한 탄광촌의 쓰레기 동산은 인공실내 스키장으로 탈바꿈해 연간 50만명의 이용객을 끌어들이는가 하면 150년 전의모든 탄광 기계시설은 그대로 보존돼 박물관이 돼 있다는 것. 지하로 내려가는 시설공간 안에서는 현대식 음식점이 성업중이고, 석탄의 갱차와 막장시설 등은 어린이들의 놀이기구와 놀이터로 활용되고 있다.
독일의 광산촌 주변에 보존된 광산시설은 무려 6천800여개. 연간 수천만명이 관광지로 변모한 폐광촌을 다녀가고 갱도, 승강기, 건물은 유엔이 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당당하게 서 있다. 그런가 하면 광부 출신들은 합창단을 조직해 석탄더미에 무대를 차려놓고 '광부의 노래'를 힘차게 들려준다. 폐광으로 인해 생겨난 실직자를위해서는 재교육 프로그램 등으로 새 일자리를 적극 주선해주기도 한다. 이는 카지노 하나 달랑 지어놓고 나몰라라 하는 우리의 경우와는 크게 대비되는 것.
"초현대적 프로젝트로 재개발된 독일의 광산촌들은 20-30년 전 독일 부흥의 기관차 역할을 했던 광부들이 자녀, 이웃과 함께 진정한 삶을 향유할 수 있는 터전이되었습니다. 지역문화, 휴식공간, 놀이공간으로 복합된 지역사회에서 여생을 보내는모습이 너무 부럽습니다"권 교수는 자신이 독일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살았던 과거를 상기시키며 국내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인식과 처우도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광산 일을 시작하고 공부를 마치고 귀국할 때까지 독일인들은 모든 면에서 그를 인격적으로 대해줬으며 임금착취, 인격모독, 인종차별 등의 불합리한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다는 것.
따라서 '때리지 마세요' '월급 주세요' '우리는 노예가 아닙니다'라는 국내 외국인 노동자들의 절규가 더이상 나오지 않게 그들에게 차별없는 근로조건과 인권을보장해줘야 한다고 그는 힘주어 말했다.
id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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