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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이주노동자합법화를위한모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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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이주노동자합법화를위한모임</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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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이주여성 인터뷰 제안서+구술자료활용동의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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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div>한글과 PDF 파일로 올립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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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ory>커뮤니티</category>
<category>구술 프로젝트</category>
<pubDate>Sat, 12 Oct 2019 23:09:38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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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사진신부'에 대하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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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div><a href="https://stopcrackdown.net/bbs/view_image.php?bo_table=&amp;fn=3552647012_6j1thL9Q_849aff32adac03ed329a0957c9787a918f833865.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https://stopcrackdown.net/data/file/interview/3552647012_6j1thL9Q_849aff32adac03ed329a0957c9787a918f833865.jpg" alt=""  width="2339" height="1654" ></a><p><a href="https://stopcrackdown.net/bbs/view_image.php?bo_table=&amp;fn=3552647012_ejKn2sFR_a7f7817157c192f804f2ceb1d198b818685e49a1.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https://stopcrackdown.net/data/file/interview/3552647012_ejKn2sFR_a7f7817157c192f804f2ceb1d198b818685e49a1.jpg" alt=""  width="2339" height="1654" ></a><p><br /><br />
<div class="headword_title">
<p class="cite"><a href="https://terms.naver.com/list.nhn?categoryId=42951&amp;so=st4.asc" rel="nofollow">하와이 한인 이민 1세</a></p>
<h2 class="headword">사진신부(<span>Picture-Bride</span>)라는 제도</h2>
<p class="desc"> </p>
<p class="word"> </p>
</div>
<div class="size_ct_v2">
<p class="txt">1903년과 1905년 사이에 여성은 성인 이민자들 10명 중에 1명꼴이었다. 그들은 모두 남편과 같이 왔다. 결과적으로 독신남자들이 결혼할 수 있는 독신처녀들이 없었다. 이는 지금까지 언급된 내용의 대부분이 남성 중심의 이야기였다는 뜻이 된다. 1910년에서 1924년 사이에 사진신부들이 대거 입국했는데 대략적인 숫자는 600명에서 1,000명에 달한다. 이는 곧 하와이의 한인 남녀 성비율을 어느 정도 평준화하기 위함이었다.<br /><br />이 사진신부 현상의 원천은 1908년 일본과 미국 사이에 체결된 신사협정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협정은 일본인들에 대한 비자 발급을 금지했으나 가족의 입국은 허용했다. 일본인 사진신부들이 호놀룰루에 도착하기 시작했을 때 한인들도 분명히 이 같은 제도를 사용하는 것이 가능했다. 사진신부나 사진결혼이라는 것은 신랑신부가 중매쟁이를 통하여 사진을 교환하는 것을 말한다. 만약에 신랑신부가 합의하고 신부에게 여비를 지불하면 신부는 하와이로 와서 사진에서만 본 그 얼굴의 주인과 이민국 건물에서 결혼하는 것이었다. 물론 하와이에 있는 한인 남자들이 고국으로 돌아가 신부를 맞아올 수도 있었고, 실제로 몇몇 사람들은 그렇게 하기도 했으나 돈이 많이 들고 시간도 많이 들었다. 사진신부 제도가 훨씬 더 편리한 대안이었다. 조선이나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 중매결혼을 했으므로 이 사진신부 제도는 단지 장거리를 두고 하는 전통결혼식이라고 할 수 있다.<br /><br />정확히 이 제도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누가 첫 사진신부였는가가 분명하지 않은 것은 여러 가지 설(<span class="u_word_dic">說</span>)이 있기 때문이다. 어느 설에 의하면 감리교의 민찬호 목사가 1909년 처음으로 사진신부를 소개했다는 것이다. 다른 설에 따르면 하와이에 온 첫 사진신부는 조선의 북쪽 도시 의주에 있는 백예수라는 여자가 중매를 해서 왔다는 것이다. 이 설에 따르면 백예수가 사라 최(<span>Sara</span> <span>Choi</span>)라는 여자를 38세의 가구공인 이내수에게 보냈다는 것이다. 최는 1910년 11월 28일 도착하여 4일 후에 민찬호 목사 주례로 결혼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사진신부 역시 조선의 의주에서 백예수가 보낸 여자였는데 나이는 23세이며 이름은 명선으로, 그녀는 13세 때 이미 9세의 남자와 결혼을 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녀는 백예수의 친척인 39세 목사인 백만국과 혼약을 맺고 1910년 12월 24일 몽골리아 호를 타고 하와이에 도착했다. 또 다른 설에 따르면 첫 사진신부는 서울과 중부지방에서 왔는데 차공삼이라는 사람이 보냈다는 것이다. 차는 1904년 하와이에 왔으나 5년 후에 조선으로 되돌아간 사람이라고 했다. 차공삼은 하와이에 있는 박례순에게 신부들의 사진을 보냈고 박례순은 신랑감들의 사진을 차공삼에게 보냈다고 했다.<br /><br />이들 사진신부 제도의 원천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부분의 사진신부들이 조선의 남쪽에 있는 제일 큰 항구도시이며 두 번째로 큰 도시인 부산이나 대구, 마산에서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남부 도시에서 온 첫 사진신부들은 하와이에 있는 노동자들의 고국 친척들이 보냈다. 왜 대부분의 사진신부들이 경상도에서 왔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1910년 이후에 일본의 식민지배가 그들의 땅을 탈취했을 때 경상도 사람들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것과 관련이 있을 듯하다. 그리고 당시의 조선은 산업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땅을 잃은 사람들은 나라를 떠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따라서 많은 한인 남성 실업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적인 붐을 타고 노동자가 필요했던 일본으로 갔고, 반대로 여자들은 하와이로 가는 기회를 포착했던 것이다.<br /><br />이 사진신부 제도로부터 네 그룹이 이득을 얻게 되었는데, 첫째 그룹은 신부를 얻는 신랑들이었고, 둘째는 신랑을 얻는 여성들이었고, 셋째는 중매쟁이들이었으며, 마지막은 하와이 농장주들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진신부 제도를 한인 총각 노동자들의 무질서한 행동을 바로잡고 싶어했던 농장주들이 시작했다고 잘못 말하고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농장주들이 사진신부들을 권장함으로써 한인 남자들을 농장에 정착시키고 보다 일을 더 잘하고, 안정된 노동자들로 만들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농장에서 선교사업을 권장한 것 외에 농장주들이 공식적으로 사진신부 제도를 권장한 증거는 없다. 아마 그들은 가정을 가진 남자들이 더 훌륭한 일꾼들이 될 것이기 때문에 사진신부들을 환영하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농장주들이 사진신부들 때문에 한인 남자들이 농장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정반대로 사진신부의 도착이 오히려 한인들의 빠른 도시 이동을 가속화시켰기 때문이다.<br /><br />우리가 알기로는 농장주들은 사진신부 제도를 공식적으로 채택하지 않았다. 한때 그들이 이 제도를 채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거절했기 때문이다. 하와이 농장주 조합 이사들의 기록을 살펴보면 그러한 기회가 1912년 초에 있었다. 예를 들어, "스미스 씨가 말하기를, 지방변호사인 라이트 푸트(<span>Light</span> <span>Foot</span>)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만약에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주 조합이 한인 직업소개소 직원인 <span>C.</span> <span>H.</span> 양이라는 사람에게 500달러를 융자해주면 양은 이 돈을 가지고 조선으로 가서 이곳에 있는 상당수의 미혼 남자들을 위하여 신붓감을 데리고 올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데리고 오는 한인 신부 1인당 5달러씩 500달러 융자에서 삭감해주기를 원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농장주들은 그렇게 하기를 거절했다. "스미스 씨가 말하기를, 양씨에 관하여 수소문을 해보니 그는 그런 일을 맡길 만한 사람이 되지 못하여 그 일이 바람직하더라도 대출을 승인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농장주 조합 이사들은 그러한 목적으로 한인 여성들을 데려오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양씨에게 융자를 해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여기고 라이트 푸트 씨에게도 그렇게 전하라고 말했다"고 한다.<br /><br />물론 하와이의 한인 남자들에게 이러한 사진신부 제도는 그들이 일본의 지배와 국내의 혼란으로 가까운 장래에 고국으로 귀국할 수 없는 이상, 하와이에서의 단란한 가정생활에 대한 희망을 제공했다. 그리고 1905년 한인 이민이 끝난 지 5년 만에 시작된 이 사진신부 제도는 한인의 장래가 이제 조선이 아닌 하와이에 있으며, 일시 체류자에서 정착민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결론은 1910년 조선의 독립이 종지부를 찍고 같은 해에 사진신부 제도가 시작되었는데, 이때 조선으로 돌아가는 한인들이 극소수였다는 사실에서 뒷받침되고 있다.<br /><br />사진신부들의 특징이나 동기는 하와이에 있는 그들의 신랑 후보들과 별다름이 없었다. 많은 한인 남자들처럼 한인 여성들도 가난을 피하여 하와이에 있다는 부에 매력을 느끼고 왔다. 그리고 그들 중의 많은 여성들이 기독교와의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리고 남녀 모두 대단히 젊었다. 그들 대부분은 17세에서 24세 정도였으나 간혹 15세도 있었고, 40세도 있었다.<br /><br />그러나 한편 이 남녀들은 몇 가지 점에서 달랐다. 중요한 특징 하나는 남자들은 대부분 도시 출신들이었고 한반도의 여러 곳에서 왔으나, 여자들은 대부분 농촌 출신으로 경상도에서 왔다는 것이었다. 또한 몇몇 예외는 있으나 사진신부들은 대부분 무학(<span class="u_word_dic">無</span><span class="u_word_dic">學</span>)에 속했다. 여자는 정규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유교적 전통에 따른 것이었다. 한 자료에 따르면 어떤 신부는 초등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하여 자신의 이름도 쓰지 못했고,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어도 그 과정을 마치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또한 그들 중 5퍼센트만이 고등학교를 다녔다. 49명의 사진신부들을 조사한 결과 이러한 사실이 판명되었다. 14명은 전혀 교육을 받지 못했고, 22명은 1~3년, 8명은 4~6년, 4명은 7~9년, 오직 1명만이 10~12년의 교육을 받았다. 어떤 경우에는 하와이로 오느라고 교육이 중단되기도 했다. 한편,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소위 '해방된' 여성이었으므로 선생이나 간호원, 혹은 교회에서 일했다.<br /><br />농촌을 떠나는 사진신부들의 모습은 이렇게 묘사되었다. 한 사람이 말하기를, "영옥이의 가족은 항상 어려웠다. 아버지의 비단장사가 실패하자 가족은 다른 수입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가족은 외할머니 집 뒤뜰의 오두막에서 살아야만 했다. 때로는 그녀의 어머니가 삯바느질을 해주고 곡식이나 채소를 얻어왔다. 그런 일조차 없을 때는 굶어야 했다." 또 한 여성은 이렇게 기억했다. "나는 1904년에 태어났다. 우리 형제는 3남 4녀였으며 부모님은 대단히 가난했고, 우리집은 모두 100가구도 되지 않는 조그만 시골에 있었다."<br /><br />먼저 하와이로 간 신랑들처럼 대부분의 사진신부들은 하와이에 가면 펼쳐질 그 풍요로움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왕왕 이러한 기대는 헛된 꿈이기 일쑤였다. "나는 외삼촌에게 하와이에서 아주 잘 살고 있다고 말을 들었기 때문에 하와이로 왔다. 그때 듣기에는 정말 하와이는 꿈나라 같기만 했다. 나는 조선에서 하와이가 천국이라고 들었다. 나는 사람들로부터 옷이 나무에 걸려 있고, 그것은 누구나 가져갈 수 있으며, 그곳에는 온갖 과일과 음식이 풍부하다고 했다. 그들은 돈은 살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저금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단지 하와이 섬의 풍요로움과 번영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들었다."<br /><br />약 10여 년 전에 그들의 신랑들을 유인했던 소개꾼들처럼 중매쟁이들이 이러한 비현실적인 풍요로움을 과장했던 것이다. 한 중매쟁이는 미래의 사진신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함안사범학교의 구선생을 알 것이다. 그의 여동생이 얼마 전에 하와이로 가서 한 조선 남자와 결혼했다. 최근에 그 가족은 돈과 아주 비싼 옷들을 받고 있다. 내가 너희들이라면 하와이에 꼭 가겠다. 그곳에 가면 끼니나 땔감 걱정 할 필요가 없다. 만약에 너희들이 그곳에 있는 조선 남자들과 결혼하게 되면 너희 가족에게 큰 행운을 가져다줄 것이다." 또 다른 사진신부는 중매쟁이가 열을 올려가며 한 말을 기억했다. "이 중매쟁이는 날더러 하와이에 가면 돈이 나무 위에 주렁주렁 열려 있다고 말했다. 내 눈은 꿈꾸듯 했고 그가 하와이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부자라고 해서 나는 그를 믿었다." 어느 사진신부도 이렇게 말했다. "그 중매쟁이가 나에게 하와이에는 음식이 너무 많아서 절대로 배고프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하와이 농장에 가보니 음식이 풍부한 적이 없었다."<br /><br />물론 사진신부들이 하와이로 대거 입국한 동기는 경제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몇몇 사진신부들에게는 기독교와의 인연이 이유가 되기도 했다. 한 사진신부는 "선교사 몇 사람을 만난 이후에 신비의 나라 아메리카로 가는 것이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아메리카라는 말만 듣기만 해도 흥분되었다. 나는 단순히 아메리카라는 이 생각만으로 압도되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교육받은 여성들에게 사진신부는 혼자서 해외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나는 친구들과 중매쟁이를 만났다. 그 당시는 혼자 미국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진신부가 되는 것이었다."<br /><br />다른 여성들은 일본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서 하와이로 갔다. 한 사람은 이렇게 기억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말도 못하고 걸어다니지도 못했다. 일본인들 아래서는 자유가 없었다. 말도 자유롭게 할 수가 없었다. 참으로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러나 하와이는 자유로운 세상이고 모든 사람들이 잘 살고 있었다. 하와이에는 자유가 있기 때문에 말하고 싶으면 말하고 일하고 싶으면 일할 수 있다." 또 한 사진신부는 손자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나는 일본인들을 원치 않았다. 그들은 조선을 집어 삼켰고 모든 놋그릇을 징발하여 조선 사람들은 모두 나무 그릇과 나무 젓가락만 사용했다. 조선 사람들은 돈도 벌 수가 없었다." 또 어느 한인 2세는 이렇게 기억했다. "나의 어머니는 서울에서 정치활동을 했다고 감옥살이를 할 뻔했다. 그녀는 그때 겨우 18세였다."<br /><br />또 교육을 받았거나 깨인 여성들은 자신들의 높아진 기대로 그녀들 앞에 놓여진 전통적인 인습을 벗어나 새로운 지평을 찾고자 했다. "나는 마산에서 간호사로 일했다. 나는 18세였다. 나는 외국어에 소질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어느 일본병원에서 일했는데 일본말을 쉽게 습득했다. 휴일이면 자주 영화관에 갔다. 자연스럽게 나는 미국 영화 속에 그려진 화려한 문명을 동경하게 되었다." 교회 야학에서 4년간 공부하고 일본식 사범학교에서 2년간이나 공부한 어느 신여성은 "집 맞은편 언덕에 사는 시골뜨기와 결혼하고 싶지 않았고, 지금까지 보아온 여성들과 같은 길을 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나는 시골뜨기의 부인보다는 더 나은 운명을 타고났다고 생각했다"고 했다.<br /><br />또한 부유한 집안 출신의 여성들은 고등교육의 기회를 얻기 위해서 하와이로 오게 되었다. 이 길이 아니면 당시 교육의 기회가 별로 없었던 것이다. "내가 하와이에 간다면 대학을 다닐 수가 있는가?"라고 어느 18세 사진신부 후보는 중매쟁이에게 물어보았다. 어느 여성은 "해외유학과 여행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17세로 세 아이 중 막내였다. 나는 집을 떠나 일본에 가기로 결정했는데 계집애들이 기숙사에서 감히 속삭이며 말로만 할 수 있는 '저 너머 세계'를 스스로 체험하기 위해서였다. 1917년 나는 가족과 고향을 영원히 떠났다. 일본에서 미국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진신부가 되는 것이라고 들었다. 나는 진정코 단지 남의 이름을 빌려서 미국으로 입국하여 그 후에는 공부를 하고자 했다"고 말했다.<br /><br />어느 여성들은 유교적 인습에 찌든 사회에서 여성들이 받는 억압에서 탈출하기를 원했다. 남녀를 엄격히 구분하고 중매결혼을 시켰으며 첩 제도가 성행했고 아내에 대한 구타, 시어머니의 지배 등등의 유교적 폐습이 아직도 건재했다. 한 여성을 이렇게 기억했다. "당시 소녀들은 집을 떠나서 10리도 나갈 수가 없었다. 단지 주일학교를 빼놓고는 아무 데도 갈 수가 없었다. 너무나 이상하게도 소녀들은 결혼하기 전에는 전혀 집을 떠날 수가 없었다. 집에서 외출도 하지 못하고, 일하고, 바느질이나 하고, 또 일만 해야 했다. 당시에는 소녀들이 외국에 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중매 결혼을 한 어느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보다 젊은 남자에게 시집 보내졌다. 우리는 가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남편은 첩을 얻었고, 매일밤 술만 마셨다. 그래서 나는 도망치기로 결정했다." 시부모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사진신부들을 유인하기에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 어느 중매쟁이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이 이곳에서 결혼하게 되면 죽을 때까지 남편과 시부모의 종이 된다. 그렇지만 하와이에 간다면 아무도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br /><br />그들이 사진신부가 되려는 이유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장애물이 없지는 않았다. 제일 큰 장애물은 부모님의 허락을 받는 것이었는데 특히 아버지의 허락을 받는 것이 문제였다. 아버지는 가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딸이 누구에게 시집 보내는가를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들이 10대였을 때는 부모님의 권위가 절대적이었다. 한 소녀는 출국 서류를 만들기 위해서 아버지의 도장을 훔쳐야만 했다. 한 15세 소녀는 이 사실을 부모님에게 알렸을 때 그들이 얼마나 노발대발했는가를 이야기했다. 또 한 소녀는 부산에서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른 다섯 소녀들과 함께 항구에 나왔다. 사진신부가 되려고 했던 세 젊은 여성들은 중매쟁이에게 이런 사실을 부모님들과 상의하지 않아서 겁이 난다고 말했다. 또 한 여성은 이렇게 기억했다. "나는 하와이로 떠나기 2주 전 부모님에게 이 말씀을 드렸다. 아버지는 극도로 화를 냈고 어머니는 몹시 슬퍼했다. 아버지는 큰 소리로 어머니와 싸우셨고 어머니만 나무랐다. 나는 부모님이 너무나 무서웠다. 나는 혼자서 울고 또 울었다. 내가 떠나던 날 어머니만 기차 정거장으로 나오셨다. 나는 부모님들을 생각하면 너무나 슬펐다. 아버님은 아직도 성이 가시지 않았다."<br /><br />사진신부 후보들은 아버지를 특히 무서워했지만 어머니들도 그들이 하와이로 가는 것을 반대했다. 어느 사진신부는 어머니에게 하와이에 가서 한인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말했을 때 어머니가 왈칵 눈물을 쏟은 것을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열여섯밖에 안 된 계집애가 이게 무슨 농담이냐? 네가 미국이 얼마나 멀기나 한지 알기나 아니?"라고 물었다. 또 한 사람은 이렇게 기억했다. "1915년 나는 하와이로 가기로 결정하고 어머니에게 사진신부가 되어도 좋으냐고 물어보았다. 어머니는 내가 돌았다고 생각하고 그 일을 포기하도록 설득하셨다. 그러나 어머니는 나를 설득하는 데 실패하셨다." 또 한 사람은 반신반의하는 그녀의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해야만 했다. "엄마, 내가 만약 이곳 함안에서 결혼한다면 돈 있는 사람이나 명성있는 사람과 결혼할 기회가 있습니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교육도 못 받은 형편에, 나는 시집을 가면 엄마와 똑같이 어려운 전철을 밟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나의 결혼을 좀 긍정적으로 봐주십시오."<br /><br />사진신부들이 또 직면해야 했던 장애물은 유교적 전통이었다. 유교사회에서 장손들은 부모를 모시고, 부모들이 돌아가신 후에는 제사를 지내야 했다. 그런 도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불효를 의미했다. 그럼에도 많은 사진신부들은 기독교도들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풍습은 마음을 크게 누르지는 않았다. 한 나이 많은 할머니는 다음과 같이 사진신부들을 이렇게 훈계했다. "나는 얼굴도 잘생긴 너희들이 왜 하와이로 가려는지 이해를 못하겠다. 너희들은 사진신부들에 대한 별별 이야기를 다 들어보지 못했느냐? 너희 동네에서 훌륭한 배필을 왜 만날 수가 없단 말이냐? 아직도 마음을 바꾸는 것은 늦지 않다. 너희들이 죽을 때까지 부모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죄라는 것을 기억해라. 네 부모들이 사랑하는 너희들을 그렇게 오래 보지 못하면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진신부가 될 소녀들은 이런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br /><br />이 사진신부 제도에 대한 좋지 않은 평판은 가문의 명예가 걸린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조선에서 발간되었던 한 일본어 지방 신문은 그 지방의 한 여성이 사진신부가 된다는 것을 '이영옥이 하와이로 돈에 팔려가다'라는 머릿기사로 보도했다. 이 결과로 한 여성은 비밀리에 수속을 해야만 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내가 하와이에 간다는 것을 몰랐다. 만약 그들이 알게 된다면 너무나 놀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모와 나만 알았다. 내 이모는 부산에 살고 있었다. 나는 이모 집으로 갔다. 내 사촌이 결혼을 하게 되어 이모집에 가서 옷을 만들어야 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갔다. 그러고는 비밀리에 여권 수속을 했다. 모든 것을 비밀로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당시에 여자가 혼자 하와이로 가는 것은 팔려간다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사진신부는 다음과 같은 어려움을 견디어내야만 했다. "이 소식을 터뜨리자 온 집안이 눈물 바다가 되었다. 나는 가족들에게 창녀로 팔려가 가문을 더럽힌다고 지탄받았다. 평생동안 가문은 아무도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것이라고 울며 말했다. 나는 이러한 반응을 예상했었고 이러한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어 도로가 황금으로 포장된 나라에 가서 내가 선택한 남편의 보호 속에서 살 그날을 기다렸다. 이러한 꿈만이 수개월 동안 매일 계속되었던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견디어낼 수 있게 했다."<br /><br />이러한 사진신부 제도는 당시 조선에서 중매쟁이로 알려져 있던 사람의 역할에 크게 달려 있었다. 어떤 중매쟁이들은 적극적으로 사진신부들을 찾아다녔고, 또 어떤 중매쟁이들은 사진신부들이 그에게 오기를 기다렸다. 조선의 중매쟁이들은 남자도 있었고 여자도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옷을 잘 입었다. 어떤 사람들은 하와이에 간 한인들의 친척이기도 했고, 어떤 중매쟁이들은 하와이에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이기도 했다. 또 어떤 이들은 아무런 연관이 없는 사람들이기도 했다.<br /><br />때로는 젊은 여성들 스스로 중매쟁이를 찾아 나서기도 했다. "전주에 하와이에서 귀국한 사람이 있었다. 우리 몇몇 친구들은 그를 방문하기로 결심했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 젊은 여성들이 하와이나 심지어 미국 본토에도 갈 수 있는 길을 알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김 목사 집에서 그를 만났다. 우리는 그를 감히 쳐다볼 수도 없었다. 우리의 눈은 단지 그의 옆모습만 바라보고 멋진 양복만 볼 수 있었을 뿐이다. 그는 여송연을 피우고 있었고 우리들을 열심히 관찰했다. 그의 눈이 나의 눈과 부딪혔을 때 나는 마치 그가 내 옷을 벗기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말하자면 그러한 시선이었다. 나는 얼굴이 빨개지고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아메리카로 가는 신비로운 길에 대해서 더욱 알고 싶어졌다. 그리하여 나는 마지못해 질문을 했다. 그는 몇 분간 조용히 앉아 있더니 아주 부드럽고 계산된 태도로 말했다. '너, 정말 이쁘구나<span>.'</span> 그는 몇 초 있다가 다시 말했다. '너는 사진신부가 될 수 있어<span>.'</span> 이는 아주 이상한 말이었다. 사진신부가 도대체 뭐란 말인가?"<br /><br />다른 때에는 중매쟁이들이 젊은 여성들을 찾아 나섰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1916년 옷을 아주 잘 차려입은 중매쟁이가 진주 근처 마을을 돌아다니며 젊은 여성들을 몰래 주시하고 다녔다고 한다. 다음과 같은 대화가 진행되었다.</p>
<div class="na_block_quote">
<p>중매쟁이 : 넌 몇 살이고 이름은 뭐니?<br />소녀 : 나는 이영옥이고 나이는 열다섯 살입니다.<br />중매쟁이 : 영옥아, 너 미국 갈 생각있니?<br />소녀 : 진주 할머니십니까?<br />중매쟁이 : 그래, 그렇단다.<br />소녀 : 할머니, 내가 열다섯 살인데도 시집갈 수 있습니까?<br />중매쟁이 : 왜 안 돼? 네가 열다섯 살이라지만 적어도 열여덟 살쯤 보인다. 그리고 너는 예뻐서 너를 데려가는 남자는 행운아일 거야.</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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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txt">이 중매쟁이는 이미 그 동네의 몇몇 처녀들을 하와이로 중매 결혼시켰기 때문에 잘 알려져 있었다. 그녀는 영옥이에게 많은 처녀들이 하와이에 가서 조선 남자들과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고 말했다.<br /><br />이따금 중매쟁이들은 부모의 영향력이 절대적임을 감안하여 가족을 먼저 방문하고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하와이에 가면 많은 돈을 모을 수 있다는 상투적인 방법을 썼다. 한 중매쟁이는 1912년 대구에 있는 어느 이씨 집에 가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 딸들이 하와이에 가서 한인 총각들과 결혼한다면 돈을 모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생긴다." 그는 그 총각들이 얼마나 부유하고 좋은 위치에서 잘 살고 있는지 그럴듯하게 말했다.<br /><br />이러한 중매에서 가장 큰 비중은 물론 사진 교환이었다. 중매쟁이들은 일본 사진사를 데려와 예쁜 한복을 입은 쳐녀들의 사진을 찍게 했다. 사진을 찍은 후 때로는 그 사진의 약점을 고치게 했다. 중매쟁이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 사진 뒤에 이름과 나이를 적어서 하와이에 있는 중개인에게 보내겠다." 이럴 경우 젊은 처녀들은 중매쟁이에게 사진 촬영한 것을 비밀로 해달라고 호소했다. 그 처녀들은 만약에 결혼이 성사되지 않았을 때 체면을 잃지 않기를 바랐으며, 만약 일이 잘못 되어도 같은 동네의 총각이라도 결혼할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한 남자에게 버림받은 처녀와 결혼하지 않으려는 것은 누구든 당연한 심사가 아니겠는가?<br /><br />신랑의 사진에 관해서 말한다면 속임수가 대부분이었다. 첫째, 남자들은 여자보다 나이가 두 배는 많았다. 둘째, 농장의 노동이 힘들어서 그 남자들은 더욱 늙어 보였다. 셋째, 흰 얼굴이 귀족적이라고 생각하는 처녀들에게 아열대의 태양 아래 장시간 일하면서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은 매력적일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들 중 돈이 많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분명히 그들의 가난은 젊은 처녀들을 끌기는 어려웠다.<br /><br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남자들은 자기들의 결점을 숨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예를 들어 그들은 부(<span class="u_word_dic">富</span>)티를 내기 위하여 양복을 빌려 입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고용주나 지배인의 집 앞에서 그 집이 자기 것인 양 사진을 찍기도 했다. 때로는 남의 자동차 앞에서 자기 것인 양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밖의 사람들은 전문직의 인상을 주기 위하여 까만 얼굴에 하얀 분을 바르기도 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사진사에게 부탁하여 사진을 손질하여 자기가 더욱 젊거나 덜 까맣게 보이도록 했다. 몇몇 사람들은 그냥 오래 전에 찍은 사진을 보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당시 우리들은 조선에서 신부를 데리고 온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는 상당히 흥분했다. 우리는 돈을 더 많이 저축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는 수개월, 혹은 수년이 걸린다는 말을 듣고, 우리는 당장 신청서를 내기로 했다. 제일 먼저 우리는 일요일에 교회에 갈 때 입는 양복을 꺼내 입고 사진관으로 갔다. 내가 사진을 중매인에게 내밀었을 때 손이 떨렸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나 떨려서 이 모든 일이 장난처럼 느껴지는지 웃기만 했다"라고 말했다. 또 한 사람은 딸에게, 사진신부였던 그녀의 어머니가 자신에게 속임수를 썼다고 말했다. "나의 아버지는 열두 살쯤에 조선에서 와서 마우이 섬에서 할아버지와 삼촌과 함께 살았다. 사진신부를 소개하는 일은 목사가 했다. 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신부들 사진은 10장이나 있었다고 했다. 아버지가 사진을 선택하고 신부가 부두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열네 살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고 하셨다. 아버지의 설명에 의하면 사진신부인 어머니가 사진을 보냈을 때 사진 뒤에 열여섯 살이라고 썼다는 것이다. 그녀가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돈이 없어서 그녀를 조선으로 되돌려 보낼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우이 섬에서 재봉틀 한 대를 가지고 단칸방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고 한다."<br /><br />그럼에도 조선에 있던 여성들은 장래 남편이 될 사람들의 속임수가 있다고 의심했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의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숙모님은 16세에 사진신부로 하와이에 왔는데, 그녀의 신랑감은 나중에 알고 보니 놀랍게도 72세였다는 것이다. 신부 가족들은 거리상의 문제, 기타 불분명한 이유 때문에 장래 남편의 신상에 대해 조사를 하지 못했다. 어느 여성은 사진에 신랑감이 앉아 있어서 반신불구가 아닌가 몹시 걱정하기도 했다."<br /><br />이론적으로 보자면 양쪽 다 사진을 검토할 수 있었기 때문에 모두 선택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먼저 선택한 사람이 유리했다. 선택을 당한 사람은 수락하거나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때로는 남자들이 먼저 선택을 했다. 한 중매쟁이는 조선에서 사진신부들에게 그가 하와이에서 돌아올 때는 사진도 가져오고 돈도 가져오겠다고 했다. 2개월 후 그녀는 사진을 세 장 가져와서 사진 뒤에 신랑감들이 적은 대로 사진을 여성들에게 나눠주었다. 19세의 순희는 37세 총각과 맺어졌고, 21세 수비는 38세 총각과, 그리고 15세 영옥은 세 사람 중에 가장 나이 많은 남자와 맺어졌다. 그 사진 뒤에는 "내 이름은 정봉운이고, 나이는 42세입니다. 나는 이영옥을 원합니다"라고 쓰여 있었다.<br /><br />당연히 영옥은 신랑감의 나이에 깜짝 놀랐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진주 할머니! 어떻게 내 상대가 42세나 되는 남자입니까? 제가 셋 중에서 나이가 제일 어리다는 것을 몰랐습니까? 아마 하와이에 있는 중개인이 내 사진을 잘못 본 모양이지요.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그 할머니는 이렇게 답했다. "호놀룰루에 있는 중개인에 의하면 정씨가 세 남자 중에서 최고라고 한다. 중개인은 정씨가 최고의 신붓감을 맞을 만하다고 생각한 거지. 그래서 그가 정씨에게 첫 선택권을 주었고, 세 신부 가운데서 너를 택했다는 거야. 정씨는 사람도 좋을 뿐만 아니라, 돈도 꽤나 모았다고 한다. 그는 충청도 양반이다. 그러니 그이 나이에 대해서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말아라." 그리하여 영옥은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씨는 미국에 살고 있었고 돈도 많았으므로 다른 조건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두 신부들도 신랑감의 나이가 너무 많다고 불평했다. 이에 대해 중매쟁이는 이렇게 답했다. "신랑감들의 나이가 좀 많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이 많은 남자들이 신부들에게 더 잘 대한다는 것도 알아야 돼"라고 말했다.<br /><br />어떤 경우에는 여자들이 먼저 선택하기도 했다. 한 예를 들면, 한 남자 중매쟁이가 여러 장의 사진을 가져와서 여자들에게 선택하라고 했다. 사진은 3인치×2.5인치 규격으로 남자들의 얼굴과 어깨만 겨우 보여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사진 뒤에는 그 남자의 이름과 주소가 적혀 있었다. 한 여성은 이렇게 기억했다. "우리가 불평을 하기 시작하면 그 중매쟁이는 주머니에서 계속 사진을 꺼내었는데, 그 사진은 아주 젊은 사람부터 늙은 사람까지, 미남자에서 추남자까지, 날씬한 사람에서 뚱뚱한 사람까지 여러 남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들 중에서 결혼하고 싶은 사람을 선택하면 내가 네 사진을 그에게 갖다주겠다. 그리고 서로가 결혼에 합의하고 신랑될 사람이 결혼 준비금과 교통비를 제공하면, 네가 그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서 미국으로 갈 수 있도록 주선하겠다<span>.'</span> 자신이 선택하는 것보다 선택당한다는 것은 남자든 여자든 별로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어느 사람이 이렇게 물었다. "만약에 내 신붓감이 못나고 뚱뚱하다 해도 내가 어떻게 그녀를 조선으로 되돌려보낼 수 있겠습니까?" 그 중매쟁이는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우리가 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당신들이 뚱뚱한 여자들은 안 된다고 말한 적도 없고 우리도 그런 것은 몰랐지 않는가"하고 질책했다.<br /><br />양쪽 당사자들이 결혼에 합의했을 경우에는 호적등본을 교환하고, 신랑감은 결혼준비금을 내놓아야 했다. 이 경비는 신부의 여비 약 70달러, 중매쟁이 소개비 약 30달러, 그리고 사진값 약 20달러를 포함해 최소한 100달러 이상이 들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실제 경비는 300~400달러에 달했다고 하는데, 당시 이 돈은 상당히 큰 돈이었다. 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 당시 도시에서 사업을 할 때 자본이 필요하면 그렇게 했듯이, 신랑감들은 계를 들어야 했다.<br /><br />그렇게 큰 돈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중매쟁이들이 사기성이 있어, 있지도 않은 비용을 부과하여 바가지를 씌웠기 때문이다. 둘째, 신붓감들이 마음이 변하여 하와이에 오지 않을까 두려워서 신랑감들은 신붓감들에게 자신이 돈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을 수 없었다. 한 가지 예로 정씨 성을 가진 한 남자가 있었는데, 그는 약 850달러를 그의 신붓감에게 보내야만 했다. 물론 때로는 여자들이 신랑감들로부터 돈을 받고도 출국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일들이 생기자, 수치스런 일이라고 생각한 관리들은 신부들이 결혼 약속을 지켜서 떠날 때까지 하와이에서 받은 돈을 맡겨놓도록 했다. 셋째, 남자들은 더 예쁜 여자와 맺게 해달라고, 또는 그들이 첫 선택권을 차지할 수 있도록 중매쟁이들에게 뇌물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것은 일종의 보험금으로 돈이 더 많이 들면 들수록 더 예쁘고, 더 젊은 신붓감을 얻을 수 있었다는 말이 된다.<br /><br />이 시점에서 신부의 이름이 남편의 호적에 올라가게 되고, 신부는 일본여권을 신청하게 된다. 여권을 받은 후에는 일본이나 서울에 있는 미국 영사관에 미국 비자를 신청했다.<br /><br />이제 사진신부에게 남은 것은 여행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한 사진신부의 회고를 통해 그 과정을 재구성해보자. 그녀는 먼저 서울에 가서 비자를 얻고 미국 영사관에 가서 신체검사를 받았다. 그리고는 집에 돌아와서는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출발하는 날 그녀는 마산까지 마차를 타고 가서 그 곳에서 배를 타고 부산까지 갔다. 부산에서 그녀는 다시 배를 타고 요코하마까지 갔으며, 그곳에서 사진신부를 위해 운영하는 여관에 투숙했다. 요코하마에서 다시 한 번 신체검사를 받아야 했는데, 그곳에서는 기생충 검사와 눈병인 트라코마(<span>trachoma</span>) 검사를 했다. 그녀는 기생충 검사에 걸렸으나 다른 사진신부의 대변과 바꾸어서 무사히 떠날 수가 있었다. 9일간의 항해 후에 그녀는 호놀룰루의 이민 검역소에 도착했으며 거기에서 대표적인 일본 음식인 밥과 일본 된장국과 단무지와 생선을 먹었다. 이 검역소에서 또 한 번의 신체검사와 함께 영어를 읽고 쓰는 시험을 받았다.<br /><br />이제 바야흐로 사진신부들이 사진 한 장과 이름만 가지고 신랑들을 만날 시간이 되었다. 하와이에서 새로운 생활이 시작될 것이었기에, 그들은 적응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br /><br />여기에서 부두에서의 한 장면을 소개한다. "이제 신랑들이 들어왔고, 이민국 직원이 이렇게 물었다. '정봉운 씨, 이 여성이 당신이 결혼하려고 초청한 사람입니까<span>?'</span> '예' 그리고 직원이 잇달아 물었다. '이영옥 씨, 이 사람이 당신이 사진에서 본 사람이며, 이 남자와 결혼하려고 왔습니까<span>?'</span> '예, 제가 정봉운 씨와 결혼하려고 여기에 왔습니다<span>.'</span> 이 시점에서 많은 여자들은 자신들이 속았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진신부들은 하와이에 와서 젊고 씩씩하고 돈도 많은 신랑감들을 만나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러한 꿈들은 이민검역소에서 깨어지고 말았다. 그곳에서 그녀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남자들은 거의 예외없이 가난하고, 늙고, 구부정하고, 주름이 많고, 아주 새까만 사람들이었다."<br /><br />사진신부들의 말을 빌리면 그녀들이 배신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3세의 수연은 씩씩하고 건장한 남편을 만날 것이라고 기대를 했다. 그러나 그녀는 작고, 피부가 까맣고, 보잘것없는 남자를 만났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실망했다"고 그녀는 말했다. 또 한 사람은 너무나 놀라고 실망스러웠던 당시의 일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남편은 25세 때의 아주 잘 생긴 사진을 보냈는데 실제로 그가 부두에 나타났을 때는 너무나 늙어 보였다. 그는 45세였는데, 나보다 무려 25세나 더 많았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너무나 실망하여 다시는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또 한 여성은 이렇게 기억했다. "내가 약혼자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나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의 머리는 백발이었고, 그의 그런 모습을 사진에서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그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늙었다." 한 여성은 그녀의 남편이 조선으로 250달러를 보내주었는데, 그는 농장에서 일하고 있었고 13세나 나이가 많았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빼빼 말랐고 까무잡잡했다. 나는 그가 싫었다. 그는 사진과는 전혀 달랐다. 그렇다고 나는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어떤 처녀들은 부두에 있는 선상에서 신랑감들을 바라보았는데, 너무나 충격을 받아 배에서 내리기를 거절했다. 그들은 선원들에게 조선으로 다시 데려가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선원들은 그들에게 돌아갈 여비가 없는 것을 알고 강제로 하선시켜서 이민국으로 보내었는데 어떤 처녀들은 '엄마, 엄마, 집으로 보내줘. 집으로 갈 거야, 집으로 갈 거야'하면서 울부짖었다.<br /><br />대부분의 부부들은 이민국 건물에서 즉석 결혼식을 올렸으나 일부 사람들은 신부가 도착한 며칠 후에야 결혼식을 올렸다. 몇 가지 상황을 종합해보면, 일의 순서는 다음과 같았다. 신랑은 오아후에 도착해 이민국에 가서 그의 신부가 될 처녀를 찾아서 만나게 된다. 그들이 이민국 건물을 나올 때 신부는 신랑의 몇 발짝 뒤에 떨어져서 신랑이 빌린 차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들은 이민국에서 1마일도 떨어지지 않은 한인 여관으로 갔다. 여관에 가서는 첫날밤을 위하여 특별히 조용한 방에 투숙했다. 여관에 투숙한 후에 그들은 김치, 된장국, 상추쌈에 식사를 하고 시내로 나가 쇼핑을 했다. 그 여관에서 이틀 밤을 지낸 후에, 신랑은 신부에게 꽃다발을 선물했고, 호놀룰루에 있는 한인 감리교회에서 신부는 치마저고리를 입고 신랑은 그녀에게 약 7달러가 되는 결혼반지를 선물함으로써 결혼식을 올렸다. 그날 밤에는 한인 식당에서 피로연을 열었다. 그리고 그들은 오아후 섬에서 열흘 동안 신혼여행을 즐긴 뒤, 배를 타고 바깥 섬으로 갔다. 도착한 날 밤 그들은 농장에 있는 감리교회로 가서 한인 동포들을 만났다.<br /><br />그러나 때로는 일들이 그리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할 때도 있었다. 대부분의 처녀들은 호놀룰루의 한인 여관에 도착했을 때 충격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여관 주인은 이곳에서 흔히 일어났던 골치 아픈 일들을 목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예를 들어서 사진신부들은 여관에 들어온 직후부터 밤낮으로 계속 울기만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눈물을 흘리고 난 후에도 어떤 처녀들은 며칠이 가도록 말이 없었다. 그들은 단지 밥을 먹기 위해서 식사시간에만 나왔다. 남자들은 처녀들에게 조선으로 강제 송환할 것이라고 위협해서 그들과 결혼하는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여관주인은 이렇게 기억했다. "대체로 절망에 빠진 신부들은 남자들이 접근하면 기를 쓰고 저항했다. 남자들이 화가 나서 그들을 때리면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때로는 그들의 싸움이 도를 넘쳐 너무 난폭해진다고 생각이 들 때에는 우리가 방으로 들어가 말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여자 여관주인들은 사진신부들과 공감했는데, "남편감들이 너무 늙고 촌뜨기들이었다. 30~40대의 노총각들은 태양에 얼굴이 까맣게 그을렀고, 주름이 지고 힘든 노동에 허리가 구부정했다. 농장의 생활이 그들을 더 늙게 보이게 했다"고 기억했다. 한 예비 신부는 자신이 여관에서 경험한 것을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밥도 먹지 않고, 8일 동안 울기만 했다. 아무것도 먹지 않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잠들었을 때에는 몰래 나와서 죽지 않기 위하여 물을 마셔야만 했다. 나는 내 사촌이 중매를 했는데, 그를 죽이고만 싶었다."<br /><br />그들이 적응해야 했던 여러 가지 중에 첫 번째는, 대단히 실망스러웠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남자들과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조선으로 돌아갈 돈도 없었지만 귀국한다는 것은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었다. 한 여성은 이렇게 기억했다. "나는 조선에서 결혼하려고 이제 막 도착했는데,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또 한 여성은 이렇게 기억했다. "나는 '내가 만약에 결혼을 하지 않으면 이민국이 나를 공짜로 조선으로 돌려보내겠지'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또 '내가 여기에 온 이상, 결혼하고 여기에서 사는 것이 낫겠지'라고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조선을 떠나기가 그렇게도 어려웠는데, 어떻게 그냥 돌아갈 수가 있단 말인가. 내가 돌아가게 된다면 우리 부모님들이 수치스러워 할 텐데 말이다." 또 한 여성은 48세 신랑이 불쌍해서 결혼하기로 결심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런 중년 남자를 실망시킬 만큼 심장이 강하지 못했다." 물론 남자들도 신부들의 실망을 모르지는 않았다. 한 남자는 자신의 신부 후보의 반응이 냉담하자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이 나와 진정으로 결혼하고 싶소, 아니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소?"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당신이 원한다면 결혼하겠습니다." 그러자 그는 "나는 당신과 결혼하고 싶소." 이렇게 해서 그들이 결혼하게 된 것이지, 결코 서로가 좋아해서 결혼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실상 극소수의 사진신부만이 사진신랑과 결혼하기를 거절했다. 이 여성들은 한인 교회의 자선단체에서 돌봐주었다.<br /><br />둘째, 새로 도착한 신부들은 새로운 생활 조건과 경제 사정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특히 남편들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할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다. 그들은 중매쟁이들과 미래의 남편들이 하와이에 가면 편한 생활을 할 것이라고 한 말만 믿고 왔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그들은 도착 직후에야 깨달았다. 예를 들어 한 사진신부는 남편 후보를 만났을 때 그는 수년 전에 조선에서 입고 온 양복과 구두를 신고 있었다고 했다. 또 다른 신부는 "남편의 손바닥은 돌처럼 단단해서 선비나 관료의 부드러운 손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또 한 신부는 "남편이 농장에서 일하고 월급도 얼마 되지 않는 가난뱅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하와이에서 대학을 다니겠다는 꿈을 포기했다"고 말했다.<br /><br />신부들이 적응하는 데 어려움은 숙소에도 있었다. 어느 신부는 "요리용 난로는 깡통 위에 구멍을 뚫어서 만든 것이었고 집도 널빤지로 지은 것이었고, 밤에 전등을 켜놓으면 사생활도 없었다"고 말했다. 또 한 신부는 "신혼방이 대구에 있는 하인의 방보다 못했다. 요리를 하고, 자고, 쉴 수 있는 방이라고는 하나밖에 없었다. 마루는 나무바닥이었다. 가구라고는 초라하거나 거의 없었다. 어떻게 해서 내가 이렇게 고된 생활을 하게 되었는가? 나는 많은 날들을 혼자서 울었다. 나의 생활은 부모님들이 원했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br /><br />더욱 절망적인 것은 남편들이 그들도 일하기를 원했다는 것이었다. 조선에서 잘 살았던 한 여성은 "나는 하인같이 일해야 했다"고 불평했다. "내 꼴을 좀 보세요. 남편은 수입이 많지 않아 나는 절약을 해야 합니다. 나는 홀아비들의 옷을 세탁하고 다려주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매년 또 아기가 생기지 뭡니까!" 농장에서 남편과 같이 일해야 했던 새댁들이 가장 어려웠다. 한 여성은 이렇게 한탄했다. "오, 이게 무슨 팔자람. 내가 어쩌다 이런 이상한 사탕수수밭에서 일을 하게 되다니! 나는 밤마다 울기도 많이 했지만 이제는 포기했다." 농장에서 살아야 했던 다른 한 여인은 이렇게 기억했다. "나는 매일 밤 울고 싶기만 했다." 또 한 사진신부는 "사정이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그래서 나는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남편이 우리 결혼식 때문에 한 달 월급을 써버렸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일을 하겠다고 말했을 때 남편은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이 내가 일하기를 항상 기대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사탕수수를 절단하고 물을 주고 잡초를 뽑고 하여 허리가 아팠다. 우리는 인생을 같이 즐기기보다는 일하기 위하여 태어난 것 같았다."<br /><br />이러한 실망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진신부들은 하와이에 남아서 생활에 적응했다(그럼에도 최소한 한 명의 임신부는 6개월 후에 조선으로 돌아갔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하와이에서의 어려운 생활이 창피해 고국의 가족들에게 알릴 수가 없었다. 한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절망했고 집에 편지를 쓰는 일이 소용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나는 힘든 생활에 관하여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귀국하는 것이 현실적 대안이 아니었으므로 대부분의 사진신부들은 그들의 생활과 노동 조건과 재정상태를 개선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이것은 그들 대부분이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일을 하기 위해서는 남자들이 그래야 했던 것처럼 그들도 이 농장에서 저 농장으로 이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농장에서 일했던 대부분의 부부들이 더 잘 살기 위해서는 농장을 완전히 떠나서 도시로 이사가기를 열망했다. 많은 사람들이 1920년 오아후 섬에서 일어난 파업을 중지시키기 위해서 신부들과 함께 왔으며, 파업이 끝나자 호놀룰루 근처에 눌러 앉아서 다른 직업에 종사하게 되었다.<br /><br />대부분의 부부들에게 이러한 새로운 생활과 노동조건들은 결혼생활의 남녀평등성 같은 것을 부여했다. 어떤 남자들은 다음과 같이 부인들을 이용하기도 했다. "도시에서는 실업문제가 새로이 생겼다. 그러나 나의 어머니는 성경학교에서 공부를 한 적이 있었으므로 어떤 양복점에서 일하면서 하루에 몇 달러라도 벌어들일 수가 있었다. 나의 아버지는 본래가 선비형이었기 때문에 그냥 앉아서 부양받는 것에 만족하고, 일도 없었지만 일을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보다 대표적인 사례는 다음과 같다. "한 할머니는 1914년에 하와이에 도착하여 스무 살이나 더 많은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 그리고 고생이 시작되었다. 나중에 할머니와 가족들은 호놀룰루로 이사와서 양복쟁이로 일했다. 할머니에게는 이 시절이 너무나 어려운 나날이었으며 그녀는 이때 아이 다섯을 보살펴야만 했었다. 그녀는 허리가 부러지는 노동과 모든 잡일들을 하는 것을 빨리 배웠으며 가난을 직시하게 되었다."<br /><br />물론 남편들도 생활에 적응하기는 해야 했다. 곧 신부들이 조선으로부터 도착할 것이기 때문에 많은 남자들이 농장을 떠나 도시로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신부들이 농장생활에 만족하지 못할 것을 알았고 농장일들이 자신들을 성공한 인물들로 묘사한 것과 부합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예비 신부들을 기다리면서 상당수의 남자들은 호놀룰루에서 직장을 구하여 농장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하여 사진신부들의 도착이 한인 농장의 안정에 기여하리라고 희망했던 농장주들은 실망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한인들이 농장을 떠나는 수가 줄기보다는 오히려 증가했기 때문이었다.<br /><br />도시에서 일했던 한인 남성들은 신부들이 하와이로 출발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들의 생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1912년 호놀룰루의 마노아(<span>Manoa</span>) 지역에서 정원일을 했던 한 남자는 주인집 뒤꼍 오막집에 살고 있었는데 이제 곧 부인이 올 것이기 때문에 수입이 더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정원 옆에 있는 조그마한 땅을 빌려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주인이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물었을 때 그는 "채소를 가꾸어 팔아서 수입을 좀더 늘리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주인은 이를 수락하고 땅을 빌려주었다. 그리하여 그는 한 수레 가득히 채소를 수확하게 되면 이것을 호놀룰루 시내 생선 및 채소 가게에 가져가 팔았다. 그리고 신부가 도착하기 겨우 며칠 전에야 방 하나를 구할 수 있었다. 그 방도 초라했지만 이전에 그가 살았던 방에 비하면 훨씬 나은 것이었다.<br /><br />사진신부들이 적응해야 했던 또 하나의 현실은 그들이 극도로 반일적이었던 한인 사회에서 살아가는 일이었다. 대부분의 사진신부들이 1910년 한일합방 이후에 하와이로 왔으므로 그들의 상당수는 일본어를 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일본인 상점에 가서 쇼핑을 할 때 일본어로 말하는 것이 편리하기도 했다. 그러나 반일적이었던 남편들은 그들이 일본말 하는 것을 반대했고 심지어 어느 남편은 부인에게 언제 어디에서든지 일본말을 하지 말 것을 요구했고 이를 어길 때는 조선으로 돌려보낼 것이라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br /><br />뿐만 아니라 새로 도착한 사진신부들은 그들에게 생소했던 미국의 풍습과 음식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 예로 음료수를 들 수 있는데 한 사진신부는 이렇게 기억했다. "휴식시간에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커피 및 과자나 빵을 먹었는데, 나는 쓴 커피나 과자를 먹을 수 없어서 집에서 먹던 음료수들이 생각났다." 어떤 경우에는 신랑들이 신부들에게 선생 노릇을 했는데 소위 식사예절에 관하여 한 신랑은 신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기서는 국물을 먹을 때 소리를 내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백인들의 습관은 밥 먹을 때 음식을 입에 넣고 입을 벌리지 않으며 입을 다물고 씹어야 한다." 나중에 사진신부들은 평등, 독립, 개인주의와 같은 보다 추상적인 가치관을 알게 되었고 이러한 것들은 하와이 한인 사회에 아직도 잔존했던 고국의 가치관과 상충되었다.<br /><br />사진신부들에게는 조선 여자답게, 또 조선 부인답게 행동해야만 한다는 기대가 모아졌다. 문제를 복잡하게 했던 것은 이러한 기대가 미국의 풍습이나 가치관과 모순되었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사진신부들이 아주 어린 나이에 고국을 떠났기 때문에 예절상 남편들을 만족시키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 사진신부는 남편이 걱정할 정도로 밥이나 빨래마저 할 줄 몰랐다. 다른 사진신부들도 적절한 예절을 배우기도 전에 고국을 떠나야만 했다. 한 젊은 사진신부와 그녀를 나무라는 늙은 남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당신 이름이 뭐야? 도대체 당신은 뭘 하는 여자야. 당신의 남편은 누구야? 당신은 어른에게 존댓말도 쓸 줄 모른단 말이야?"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미안합니다. 내가 어른에게 예절을 갖추어 공경하지 못하여 미안합니다. 내가 16살에 하와이로 와서 예절을 배울 기회가 없었습니다. 저의 무례함과 무식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에게 존댓말을 쓰는 법을 좀 가르쳐주십시오." 존댓말을 쓰는 것이 한인 사회에서는 문제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반대로 영어를 쓰고 보다 평등한 가치관을 추구하는 미국 사회에서는 사진신부들이 오히려 적응하기가 쉬웠다.<br /><br />실제로 사진신부들이 어린 나이에 하와이에 왔기 때문에 말을 서양식으로 하고 상하를 따지는 전통적 언어습관을 버리기가 훨씬 쉬웠다. 이동재 교수에 의하면, 하와이로 온 사진신부들은 말을 할 때 조선의 성에 <span>Mr.</span>나 <span>Ms</span>를 붙이거나 일반적으로 <span>'you'</span>라는 말을 자주 쓰고 쉽게 성보다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님'자를 붙이거나 성에 존칭 붙이는 것을 포함한 전통적인 언어사용법을 버렸다. 이러한 평등주의는 조선의 전통적 남존여비 사상과는 반대로 부부간에 언어격차를 없애버림으로써 언어적·사회적으로 평등한 관계를 만들어 갔다. 사진신부들은 하와이에 오래 머물수록 미국과 조선의 가치 충돌과 직면하게 되었지만 점차 미국 풍습을 따르게 되었다.<br /><br />대부분의 사진신부들은 그들을 원한 남자들과 결혼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결혼 생활이 일반적인 것과는 달랐다는 흔적이 발견된다. 남편의 나이가 많았던 그들 부부관계는 사랑하는 관계라기보다는 효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 사진신부는 남편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또 다른 신부는 이렇게 기억했다. "나는 남편이 46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남편이라기보다는 아버지와 같았고 그는 나를 딸처럼 대해주었다. 그러나 그의 나이가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나는 그를 믿고 의지할 수 있었다. 우리는 남편이 일했던 하와이 섬에 정착했다. 우리가 정착한 지 한 달 후 나의 삼촌이 우리가 어떻게 사는가 보려고 방문했다. 나는 삼촌에게 후회하지 않고 있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남편이 나보다 서른 살이나 많았기 때문에 나는 그를 남편이라기보다는 아버지로 생각했다. 우리 둘 사이에 사랑한다는 말을 써보거나 들어본 적도 없었다. 우리의 생활은 단조롭고 무미건조했으며 사랑하는 감정 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었다."<br /><br />최악의 경우에는 이러한 결혼들이 서로에 대한 원망으로 망쳐지기도 했다. 부인은 속았다고 생각했고 남편은 많은 돈을 들여서 하와이까지 데려왔는데 고마운 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결혼들은 시작도 좋지 못했다. 예를 들어 결혼 직후부터 이러했다. "우리는 한집에 살면서도 3개월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도시로 이사 가서 경제 사정이 좀 나아진 후에도 이런 결혼들은 흔들렸다. 한 연구자는 1930년대에 다음과 같이 밝혔다. "사진신부들의 대부분은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 못했다. 많은 사진신부들이 자신들의 분노를 짜증과 잔소리 등으로 해소했다."<br /><br />많은 가정들이 이처럼 젊은 신부들에 의해서 지배되었다. 예를 들어 한 남자는, 어머니가 1916년 17세에 마산에서 건너와 아버지와 결혼하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어머니보다 열여덟이나 많았으며, 자기의 집은 어머니가 지배했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많은 여성들이 미국의 자유와 개인의 행복에 관한 풍습을 보고 고국의 남존여비와 이혼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폐습에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는 이혼이 불행한 결혼으로부터 해방되는 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둘째, 하와이에는 아직도 많은 노총각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여성들이 한인 사회를 지배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90퍼센트)의 이혼이나, 이혼이 거의 성립할 뻔한 것도 모두 여성들이 먼저 시작했다.<br /><br />그들의 문제는 불행한 결혼에서 그치지 않았다. 대부분의 결혼 생활은 극심한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시작되었다. 불행히도 이렇게 형성된 가족들 상당수가 하와이에 온 지 10여 년 후 경제적으로 번영하기 시작했을 때, 1929년 미국의 경제 공황이 일어나 그들을 다시 경제적 도탄에 몰아넣었다. 좋지 않은 예를 들면 한 남자가 자영업을 시작하기로 결정하고 호놀룰루의 높은 지역에 아주 좋은 땅을 빌려서 카네이션을 키우기로 했다. 하와이에서는 꽃목걸이(<span>lei</span>) 수요가 있었으므로 꽃은 항상 돈이 되었다. 그러나 1920년대의 전성기는 지나가고 꽃사업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또 다른 사진신부는 1935년 조선으로 귀국하여 부모님들을 방문하고 있었는데 기관차 수선공이었던 그의 남편이 호놀룰루에서 실직하게 되었다. 그녀는 돌아와서 집 하나를 빌려서 숙소와 식료품 가게를 겸하면서 가정을 꾸려나갔다. 5개월 후 식품점이 실패하자 그녀는 라나이 섬의 파인애플 농장에 남편을 취직시켰다.<br /><br />이 새 가정들의 또 다른 문제는 남자들이 직면한 어려운 현실이었다. 그들은 늦게 결혼한 탓에 얼마 안 가서 육체적으로 아직 어린 처자식들을 부양하기 어려웠으며 남들처럼 은퇴생활을 즐기는 것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60세에 은퇴했지만 이 사람들은 그런 여유를 가질 수 없었다. 아이들이 아직 자라고 있었고 학교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늙은 아버지들을 부양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발행되는 간행물들은 사진신부들이 하와이로 떠나기 전에 이미 이러한 것을 예언하고 있었다. 약 10년 후에 발간된 다른 간행물들도 해외 동포들이 이제 머리는 희어지고 더 일할 수가 없어서 사진신부들이 바지를 입고 나가 가족을 부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쓰고 있었다.<br /><br />더 심각한 문제는 사진신부들이 이른 나이에 과부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이 많은 아이들을 낳았으므로 혼자서 대가족을 부양해야만 했다. 한 사진신부는 그녀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p>
<div class="na_block_quote">
<p>1922년 내가 하와이에 온 지 7년째 되던 해는 내 인생의 가장 큰 전환기였다. 남편은 2년간 앓다가 죽었고 다섯 아이들을 남겨놓았다. 나는 아주 슬펐고 우울했으나 울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나는 딜레마에 빠졌다. 나는 아이들과 내 자신을 부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1주일 내</p></div></div></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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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Date>Mon, 29 Jul 2019 03:29:5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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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박노자] 한국의 인종주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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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div>참여연대에서 있었던 강의 녹취 파일입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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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ory>구술 프로젝트</category>
<pubDate>Sun, 14 Jul 2019 20:31:5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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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박노자] 지구적 차원에서 극우세력은 왜 득세하는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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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div>참여연대에서 있었던 강의 녹취 파일입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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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ory>구술 프로젝트</category>
<pubDate>Sun, 14 Jul 2019 20:31:02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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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이주 구술 작업 기획서_2019년 6월 24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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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div><br />이제까지의 활동과 앞으로의 계획을 정리한 기획서입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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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Date>Sun, 23 Jun 2019 01:56:05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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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임병묵] 지방의 눈으로 본 세계화</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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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div>아직 대학생인데 신문에 칼럼도 쓰고 책도 쓰는 사람의 페이스북 글입니다.<br />이 글에 완전히 동의해서 올리는 건 아니고요.<br />이 글이 페북에서 몇 천 명이 좋아요를 누른 글이라서, <br />한번 살펴보시라고 올립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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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ory>구술 프로젝트</category>
<pubDate>Sun, 23 Jun 2019 01:08:55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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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현대 문화지리학] 중 시민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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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div>지난 시간에 시민권에 대한 논의를 했는데요.<br />짧지만 시민권 논의의 흐름을 볼 수 있는 글이어서 올립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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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ory>커뮤니티</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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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Date>Sun, 23 Jun 2019 01:07:04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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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계급 이하의 계급'으로서 한국의 이주노동자들들(케빈 그레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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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div>&lt;위기의 노동&gt;이라는 책에 실려 있는 글입니다.<br />현재 책은 절판입니다.<br />2000년대 초반까지의 이주노동자 현황을 보기에 좋은 글이예요.</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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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ory>커뮤니티</category>
<category>구술 프로젝트</category>
<pubDate>Sun, 23 Jun 2019 00:27:45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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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성.유흥산업으로 유입되는 여성이주 논문 및 발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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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div>성.유흥산업으로 유입되는 여성이주 논문 및 발제</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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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Date>Thu, 06 Jun 2019 12:53:24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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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한국의자본축적단계와 노동이동 논문 및 발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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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div>한국의자본축적단계와 노동이동 논문 및 발제</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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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ory>커뮤니티</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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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Date>Thu, 06 Jun 2019 12:52:46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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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인권구술기록활동 안내서 발제</title>
<link>https://stopcrackdown.net/interview/30</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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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div>인권구술기록활동 안내서 발제</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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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Date>Thu, 06 Jun 2019 12:51:39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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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국제결혼 관련 소논문 2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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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div>국제결혼의 전 지구적 젠더 정치학* <br />한국 남성과 베트남 여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 김현미<br /><br /><br />아시아 여성의 국제결혼에 대한 미디어 담론 : 한국 미디어의 재현방식을 통해<br />김수정(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박사과정)</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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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Date>Thu, 06 Jun 2019 11:02:39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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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발췌- 조선족 사회의 위기 담론과 여성의 이주경험 간의 성별 정치학</title>
<link>https://stopcrackdown.net/interview/28</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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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div>공동체의 유지라고 했을 때 '어떤 공동체'를 유지해야 하는지 묻지 않았다.  '누구의' 공동체인가? <br />공동체를 자본과 이주에 대항하는 추상으로써 낭만화하고 있었다. <br />즉, 공동체의 위기는 남성 주체의 위기일 뿐이다. <br /><br />조선족 여성은 이주의 주체성을 확립하고, 자신의 욕망의 주체자가 되는 방식으로 귀환.<br /><br /><hr /><br />결혼이주여성에 한 다음과 같은 기사 분석의 결과 - <br />불쌍하고 어린 부녀자로 보는 경향, <br />가족 해체시에 새롭게 강화․유지․부활되는 ‘가족’을 강조하는 경향, <br />결혼 이주여성을 타자화/유아화하는 경향, <br />고향과 원의 푸근함과 그것을 지켜주는 사람들을 강조하는 경향, <br />아무것도 하지 않는(못하는) 정부와 고군분투하는 민간단체라는 대립 구도를 강조하는 경향, <br />단일민족주의와 혈통주의를 강조하는 한국을 다문화사회로 보는 경향 - 를 통해 결혼이주여성이 미디어에 의해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br />김혜순, ｢결혼이주여성과 한국의 다문화사회 실험｣</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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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ory>커뮤니티</category>
<category>구술 프로젝트</category>
<pubDate>Thu, 06 Jun 2019 10:47:42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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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농업이주 관련 자료 발제</title>
<link>https://stopcrackdown.net/interview/27</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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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div>원본 자료들은 이미 올려두었고<br />요약 발제 자료를 올립니다.<br />
<p class="p1"><span class="s1"><strong>고통을 수확하기: 한국 농축산업 이주노동자 착취와 강제노동(</strong></span><span class="s1"><strong>국제앰네스티, 2014년 10월)<br /><br /></strong></span><span class="s1"><strong>이주노동자의 주거권 보장을 위한 심포지엄: 비닐하우스를 넘어서(</strong></span><span class="s1"><strong>국회의원회관, 2017년 12월 13일)<br /><br /></strong></span><span class="s1"><strong>이주여성 농업노동자 성폭력 실태조사 결과 보고회: </strong></span><span class="s2"><strong>“열악한 노동조건, 성폭력을 덮다!”(국회의원회관, </strong></span><span class="s1"><strong>2016년 12월 12일)</strong></span></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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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ory>커뮤니티</category>
<category>구술 프로젝트</category>
<pubDate>Sat, 25 May 2019 00:26:13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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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달래] 이주 문제에 대한 현황 파악, 맨발로 도망치다 관련 발제문입니다.</title>
<link>https://stopcrackdown.net/interview/26</link>
<guid>https://stopcrackdown.net/interview/26</guid>
<description><![CDATA[<div>출력 요청하면서 파일을 보내준 게 있어서<br />제가 대신 올립니다.</div>]]></description>
<dc:creator></dc:creator>
<category>커뮤니티</category>
<category>구술 프로젝트</category>
<pubDate>Sat, 25 May 2019 00:24:01 +0900</pubDate>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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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다문화사회에서의 도서관 서비스</title>
<link>https://stopcrackdown.net/interview/25</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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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div>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만든 책자입니다.<br />이주민을 위한 정보접근 문제를 고민하는 경우에 살펴볼 자료입니다.<br />해외 도서관의 사례들이 들어 있고<br />우리의 경우 안산이나 부산, 전남 지역의 사례들이 있습니다.</div>]]></description>
<dc:creator></dc:creator>
<category>커뮤니티</category>
<category>구술 프로젝트</category>
<pubDate>Sat, 25 May 2019 00:22:42 +0900</pubDate>
</item>
/data/file/interview/1926105049_c1d58c42_1558239589_73412.jpg<item>
<title>구술기록, ‘사회적 말 걸기’ 넘어 ‘사회적 이어말하기’로 확장돼야</title>
<link>https://stopcrackdown.net/interview/24</link>
<guid>https://stopcrackdown.net/interview/24</guid>
<description><![CDATA[<div><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tbody>
<tr>
<td>
<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tbody>
<tr>
<td>구술기록, ‘사회적 말 걸기’ 넘어 ‘사회적 이어말하기’로 확장돼야</td>
</tr>
<tr>
<td>2019 한국장애학회 춘계 학술대회 ‘우리 삶의 기록, 장애 역사를 말한다’ 열려<br />장애운동과 함께 발전한 장애기록… “기록을 통해 어떠한 기억 만들지 고민해야”</td>
</tr>
<tr>
<td height="10"> </td>
</tr>
<tr>
<td><span style="color:#afafaf;">등록일 [ 2019년05월19일 16시30분 ]</span></td>
</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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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장애운동 내에서 장애인 당사자의 구술이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또한 장애 구술 활동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논의하는 자리가 마련됐다.</p>
<p> </p>
<p>17일 이룸센터 이룸홀에서 2019 한국장애학회 춘계 학술대회 ‘우리 삶의 기록, 장애 역사를 말한다’가 열렸다. 이날 두 번째 발표에서 유해정 성공회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위원이 ‘사회적 말하기와 사회적 듣기-장애 당사자의 구술기록 경험을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장애 당사자의 구술기록의 함의와 나아갈 방향성에 대한 논의를 전개했다.</p>
<p> </p>
<p><span class="detail_convert"><img src="/data/file/interview/1926105049_c1d58c42_1558239589_73412.jpg" alt="" width="690" height="460" /><br /><span class="smfont2">17일 이룸센터 이룸홀에서 2019 한국장애학회 춘계 학술대회 ‘우리 삶의 기록, 장애 역사를 말한다’가 열렸다. 이날 두 번째 발표에서 유해정 성공회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위원이 ‘사회적 말하기와 사회적 듣기-장애 당사자의 구술기록 경험을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장애 당사자의 구술기록의 함의와 나아갈 방향성에 대한 논의를 전개했다. 사진 강혜민</span></span><br /> </p>
<p>장애 기록 비주류 영역… 최근 영상·문자·구술 등 기록 다양화 이뤄져<br /> </p>
<p>유해정 연구위원은 장애운동을 포함한 장애 당사자들의 삶에 대한 기록 자체가 매우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기록이 된다는 것, 기억을 만든다는 것은 누군가의 필요와 선택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라며 “장애 기록이 적고, 연구자와 기록하려는 사람이 적었던 것은 우리 사회에서 장애, 나아가 장애학 의제가 매우 비주류적인 위치에 놓여 있었음을 뜻한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 연구위원은 장애운동의 시작이 장애 기록에서 중요한 의미를 띤다고 짚었다.</p>
<p> </p>
<p>1990년대 후반 장애운동에 대한 기록을 시작으로 기록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는데, 그 중심엔 ‘영상’이 있었다. 유 연구위원은 “1990년대 후반 ‘에바다 민주화투쟁’이 장애운동 영상 기록의 효시”라며 이를 시작으로 장애운동에 대한 주요 기록들을 남긴 고 박종필 감독의 다큐멘터리 작업, 그 외에 장애 당사자의 자체 영상 제작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이러한 토대에는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미디어교육과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가 있었다고 말했다.</p>
<p> </p>
<p>최근 10년 동안에는 문자와 구술 기록의 발전이 두드러진다. 특히 장애 당사자의 삶과 일상에 초점을 맞춘 단행본 출간의 활성화가 가장 눈에 띈다. 발간된 단행본의 특징은 △장애 당사자의 단독저작의 경우 저자가 고학력이거나 사회적으로 일정한 성취를 이뤄낸 점 △따라서 (특히 시각장애인 저자의) 장애 극복의 관점에서 쓰인 점 △장애유형으로는 지체장애인과 시각장애인이 대다수인 점 △발달장애인을 주제로 한 단행본에서는 장애부모가 화자인 점 △장애인권 분야의 ‘구술기록집’ 등을 꼽았다.</p>
<p> </p>
<p>구술기록, ‘사실의 증언’에서 ‘서사적 말하기·듣기’로 성장</p>
<p> </p>
<p>유 연구위원은 특히 진보적 장애운동의 측면에서 구술기록집을 기획하고 시도하는 것에 주목했다. 그는 “이러한 작업은 장애 당사자의 삶과 경험, 나아가 실존적·사회적 측면을 드러냄으로써 장애인이자 한 명의 인간으로서의 삶과 사유를 사회화하고 의제화하려 한 것”이라고 정의했다.</p>
<p> </p>
<p>장애계에선 탈시설 장애인의 구술기록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때 그의 경험은 시설에서의 삶과 탈시설 이후의 삶으로 나눠진다. 대부분 시설에서의 경험은 감금과 폭행 등 반인권적인 경우가 많다. 즉, 장애인 당사자가 자기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자연스레 인권침해 현장에 대한 폭로가 되고 증언이 된다.</p>
<p> </p>
<p>유 연구위원은 “인권의 상실이나 훼손에 관해 이야기할 때 피해자를 경유하지 않고는 사건의 실체, 고통에 접근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며 “구술은 인권 침해를 당한 사람을 불러내서 ‘어떤 피해를 당했는지’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사건으로 어떻게 피해자의 존엄과 삶이 파괴됐는지, 그리고 사회가 어떤 문제를 가졌는지 성찰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그 과정에서 가장 친숙하고 접근이 용이한 발화 방법인 구술이 채택되고 있다는 것이다.</p>
<p> </p>
<p>따라서 구술기록은 인권침해 사건의 공백을 채우기 위한 증거 찾기로 활용됐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무슨 일이 발생했는가에 대한 진실성 확보도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또한 이를 통해 개인적 사건뿐 아니라 사회구조와 국가 폭력의 방기 또는 조장, 인권침해 등의 부정의를 규정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으로 구술자들이 ‘수동적인 인권 피해자’나 ‘권리회복을 위해 싸우는 전사’의 이미지로 고착되기도 한다. 유 연구위원은 “이러한 두 가지의 정형화된 이미지에서 벗어나 입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 ‘서사적 기록’이었다”고 설명했다. </p>
<p> </p>
<p>서사적 기록의 핵심은 발화자 삶의 경로를 따라가고, 피해에 대한 반응과 경험을 듣되 ‘사실’만이 아니라 현재 발화자가 느끼는 ‘해석’과 ‘재구성’에 주목한다. 이에 따라 구술자는 ‘피해자’라는 단 한 개의 정체성이 아닌 다양한 정체성을 지니는 존재로 인식될 수 있다. 또한 다양한 장애유형, 장애영역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차이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게 된 것도 중요한 성취다.</p>
<p> </p>
<p>2010년 이후 발간된 『나를 위한다고 말하지 마』(2013, 삶창), 『나, 함께 산다』(2018, 오월의봄), 『어쩌면 이상한 몸』(2018, 오월의봄) 등이 ‘서사적 기록’을 채택한 단행본이다. 『장애여성이 있다, 장애여성을 잇다』(2015, 상상행동 장애와여성 마실) 등 단행본으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높은 완성도를 갖춘 구술기록집도 이러한 기록 방식을 따르고 있다.</p>
<p> </p>
<p><span class="detail_convert"><img src="/data/file/interview/1926105049_4efe5c4e_1558239780_19211.jpg" alt="" width="690" height="345" /><br /><span class="smfont2">서사적 기록을 채택한 단행본. 왼쪽부터 『나를 위한다고 말하지 마』(2013, 삶창), 『나, 함께 산다』(2018, 오월의봄), 『어쩌면 이상한 몸』(2018, 오월의봄)</span></span><br /> </p>
<p>‘사회적 말하기’ 넘어, ‘사회적 이어 말하기’ 이끌어내야<br /> <br />유 연구위원은 지금까지 구술기록 대상이 매우 한정적이었고, 출판이라는 목표를 달성한 이후 담론 재생산에는 무관심했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구술이라는 발화 방법의 한계를 짚으며, 전문 구술기록자로서의 장애 당사자 양성이 필요하다고 밝혔다.</p>
<p> </p>
<p>현재 구술기록의 주류는 탈시설 담론이다. 따라서 40대 이상의 남성, 중증지체장애인 등 특정한 부류의 서사를 중심으로 담론이 형성돼 있다. 유 연구위원은 대체적으로 청년, 유아, 발달장애, 청각장애, 경증 장애, 여성, 성소수자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는 아직 다양하게 기록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구술 작업은 소외되고 배제된 이들의 역사를 기록함으로써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창출하고자 했던 시도였다”며 “이런 관점에서 구술을 통한 발화와 증언은 장애집단 내부의 민주주의와 권력의 수평적 분배를 재편성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p>
<p> </p>
<p>유 연구위원은 구술기록이 책으로 나온 이후 이에 대한 담론을 어떻게 이어가고, 재생산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구술기록은 구술자 개인의 참여와 역량 강화, 치유, 사회적 변화 등을 강조하고 있어 최종적으로 출판을 목표로 하는 경우가 많다. 유 연구위원은 “타자의 삶과 접점을 만들지 못하는 발화, 기록은 쉽게 타자의 문제로 전락하거나 망각되기 쉽다”며 “특히 장애인의 구술은 고착화되고 내재화된 사회적 편견에서 타자의 이야기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고 짚었다. 따라서 현재 구술기록이 ‘사회적 말하기’라는 소기의 목적 달성에 그치지 않고, 출판 후 ‘이어 말하기’를 어떻게 이끌어낼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말하기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이어 말하기를 넘어 장애 당사자 내부에서의 이어 말하기, 장애운동 진영 내부에서 소외된 목소리로의 이어 말하기“라고 정의했다.</p>
<p> </p>
<p>구술이 문자보다 상대적으로 쉬운 발화 방법이라고 해도 여전히 구술이 지니는 장벽이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유 연구위원은 “구술에서 가장 큰 자산은 언어인데, 발화자마다 각기 다른 언어 능력을 지니고 있다”며 “장애인의 경우 시설에 갇혀 획일적이고, 집단적인 경험으로 다양한 삶의 과정에서 소외되고 배제되는 경우가 많아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고 진작시키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밝혔다. 따라서 이들의 언어를 들을 수 있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지에 대한 고민도 함께 수반되어야 하며, 특히 발달장애인과 청각장애인에게는 구술이 아닌 다른 발화 방법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p>
<p> </p>
<p>나아가 장애인 구술기록에서 절대다수의 기록자가 비장애인이라는 불균형성에 대한 환기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유 연구위원은 “구술기록은 구술자와 기록자의 공동작업이자 경합의 산물”이라며 “구술자와 기록자 사이의 성별, 나이, 학력, 장애 등에 근거한 다양한 차이가 권력관계를 형성하고, 나아가 구술자를 대상화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구술기록에서도 장애 당사자의 적극적인 참여가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장애인을 대상으로 했던 미디어교육과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가 풍부하고 깊이 있는 기록의 토대가 되었던 것은 장애 당사자의 참여를 통한 역량 강화였다”며 “장애운동 진영 내부에서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전문적인 구술자와 기록 재생산을 위한 방안 모색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p>
<p> </p>
<p>유 연구위원은 “말이 갖는 존재론적, 사회적, 관계적 힘이 존재하기에 기록되지 않는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며 “따라서 장애운동 진영이 장애 당사자들의 사회적 증언을, 삶을 더욱 다양한 목소리로 울려 퍼지게 하고 기록하며 어떠한 기억을 만들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p>
<p> </p>
<p><span class="detail_convert"><img src="/data/file/interview/1926105049_93045b16_1558239815_18653.jpg" alt="" width="690" height="460" /><br /><span class="smfont2">17일 이룸센터 이룸홀에서 2019 한국장애학회 춘계 학술대회 ‘우리 삶의 기록, 장애 역사를 말한다’가 열렸다. 유해정 연구위원의 발표가 끝난 뒤 토론이 이어지고 있는 모습. 사진 허현덕</span></span></p>
</td>
</tr>
</tbody>
</table>
</td>
</tr>
</tbody>
</table>
<br /><br /><a href="http://beminor.com/detail.php?number=13431" rel="nofollow">http://beminor.com/detail.php?number=13431</a></div>]]></description>
<dc:creator></dc:creator>
<category>커뮤니티</category>
<category>구술 프로젝트</category>
<pubDate>Mon, 20 May 2019 01:53:52 +0900</pubDate>
</item>
<item>
<title>조선족 사회의 위기 담론과 여성 이주 경험 간의 성별 정치학-김은실.민가영(조선족 이주여성 심층면접_녹취록)</title>
<link>https://stopcrackdown.net/interview/23</link>
<guid>https://stopcrackdown.net/interview/23</guid>
<description><![CDATA[<div><h1>조선족 이주여성 심층면접_녹취록</h1>
<p><a href="https://bit.ly/2JtPEHZ" target="_blank" rel="nofollow noreferrer noopener">https://bit.ly/2JtPEHZ<br /><br /></a></p>
<hr />
<p>링크는 첨부된 논문의 기초가 된 녹취록입니다. 파일로 공개하지 않고 프린트만 가능하도록 해뒀네요. <br />그러나 다운을 받았습니다. ㅎㅎ</p></div>]]></description>
<dc:creator></dc:creator>
<category>커뮤니티</category>
<category>구술 프로젝트</category>
<pubDate>Sun, 19 May 2019 00:43:20 +0900</pubDate>
</item>
<item>
<title>한국에서 살아갈 자격 – 미등록 이주아동청소년에 대한 정규화 경로를 이제는 마련해야 할 때</title>
<link>https://stopcrackdown.net/interview/22</link>
<guid>https://stopcrackdown.net/interview/22</guid>
<description><![CDATA[<div><h1>한국에서 살아갈 자격 – 미등록 이주아동청소년에 대한 정규화 경로를 이제는 마련해야 할 때</h1>
<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background-color:#ffffff;float:none;"><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background-color:#ffffff;float:none;"><br /><br /></span></span>
<p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margin:0cm 0cm 10pt;padding:0px;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저는 이 땅에서 태어나서 한국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 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한국이 제 고향이란 말이에요.” 볼멘 소리의 주인공은 여느 평범한 한국 사람처럼 살면서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미등록청소년이다. 2017년 4월 13일, 당시 만 18세이던 F군은 출입국관리사무소로부터 적법한 체류자격이 없으므로 부모의 나라인 나이지리아로 돌아가라는 강제퇴거명령과 보호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F군에게 “돌아갈 곳”은 없었다. 나이지리아는 부모의 출신국일 뿐, 그에게는 언어, 문화, 역사 모든 면이 생경하고 낯선 땅이다.</p>
<p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margin:0cm 0cm 10pt;padding:0px;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F군이 9살 무렵 아버지의 체류자격이 취소되자 동반비자였던 자녀들의 체류자격도 사라졌다. 아버지는 한국을 떠났지만 F군의 어머니는 자녀들과 한국에 남았다. 그렇게 F군은 미등록(불법체류) 상태로 초등학교를 거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졸업을 했다. 법무부는 지침을 통해 재학 중인 미등록 이주아동에 대해서는 단속되더라도 졸업 시까지 강제퇴거를 유예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후이다. 졸업과 동시에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기반을 버리고 아무 연고도 없는 타국으로 떠날 수밖에 없다. 현재 우리나라는 유·소년기를 한국에서 보내온 사람에 대한 별도의 정규화 경로를 마련해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F군과 같이 국적국과 관계가 미미하고, 언어나 문화 및 사회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사람까지도 예외 없이 추방의 대상이 되어 왔다.</p>
<p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margin:0cm 0cm 10pt;padding:0px;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강제추방은 한 사람의 신체의 자유에 대한 침해를 수반할 뿐만 아니라 그 지역사회에서 거주하면서 형성해온 모든 유대관계, 사회적 관계망을 한 순간에 잃게 한다. 특히 한 국가에 오랫동안 머물던 사람에 대한 강제퇴거는 너무 가혹하여 ‘사회적 사형’이라고 불리기까지 한다. 이것이 F군과 같이 한국에서 태어나거나 유·소년기를 보내며 성장한 이들에 대한 정규화 방안을 마련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이유이다.</p>
<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background-color:#ffffff;float:none;"><br />최근</span><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 F</span><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background-color:#ffffff;float:none;">군에 대한 강제퇴거명령 취소소송에서</span><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span><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background-color:#ffffff;float:none;">청주지방법원</span><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 2018. 5. 17. </span><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background-color:#ffffff;float:none;">선고</span><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 2017</span><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background-color:#ffffff;float:none;">구합</span><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2276) </span><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background-color:#ffffff;float:none;">법원은 강제퇴거로 인해</span><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 F</span><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background-color:#ffffff;float:none;">군에게 가해지는 불이익이 외국인의 체류를 적절하게 통제</span><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조정함으로써 달성하려는 공익보다 지나치게 크고 가혹하기에 이를 취소하라고 판결하여 원고의 손을 들어주었다(자세한 판결내용 </span><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a style="color:#000000;text-decoration:underline;" href="http://www.bkl.or.kr/bbs/board.php?bo_table=B12_1&amp;wr_id=421" rel="nofollow">참조</a></span><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 </span><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background-color:#ffffff;float:none;">이러한 법원의 전향적인 판결에 대해 법무부가 항소할지 관심이 쏠렸는데 다행히도 </span><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2018</span><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background-color:#ffffff;float:none;">년</span><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 6</span><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background-color:#ffffff;float:none;">월</span><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 8</span><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background-color:#ffffff;float:none;">일 법무부의 항소 포기로</span><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 1</span><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background-color:#ffffff;float:none;">심 판결은 확정되어 많은 미등록아동</span><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span><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background-color:#ffffff;float:none;">청소년들이 희망을 얻게 되었다</span><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span>
<p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margin:0px;padding:0px;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p>
<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background-color:#ffffff;float:none;">  </span>
<p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margin:0cm 0cm 10pt;padding:0px;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이번 판결을 계기로 두 가지 사항에 대한 법무부의 향후 태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판결의 취지를 살려 한국에 미등록 상태로 장기체류한 이주아동〮청소년들에 대해 체류자격 부여에 대한 정책적 결단을 내릴 것인지 여부와 F군에게 과연 어떤 체류자격을 부여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현재 F군에 대해 법원은 강제퇴거명령을 취소하였으나 법무부는 아직 별도의 체류자격을 부여하지는 않았으므로 불법도 합법도 아닌 공백 상태에 놓여있다. 만약 F군만의 예외적인 사례로 한정한다면 아마도 국내에 임시적으로 체류할 필요성이 인정될 때 부여되는 기타(G-1)의 체류자격을 부여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F군과 유사한 상황에 있는 미등록 이주아동〮청소년들은 앞으로도 강제퇴거명령을 받게 되고, 힘겨운 소송을 통해서 다툴 방법 밖에는 없다.    </p>
<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background-color:#ffffff;float:none;">유엔아동권리위원회는 미등록 아동이 한 국가에서 태어났거나 장기간 거주한 경우 또는 부모 출신국으로 귀환하는 것이 아동 최상의 이익에 반하는 경우에는 이주아동 및 가족에게 체류자격을 부여하는 경로를 도입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span><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a style="color:#000000;text-decoration:underline;" href="http://bkl.or.kr/plugin/editor/smarteditor2/smart_editor2_inputarea.html#_ftn1" rel="nofollow"><span style="line-height:15.333332061767578px;font-family:'맑은 고딕';font-size:10pt;">[1]</span></a> </span><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background-color:#ffffff;float:none;">현재 영국</span><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 </span><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background-color:#ffffff;float:none;">독일</span><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 </span><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background-color:#ffffff;float:none;">일본 등 많은 국가들이 장기간 체류사실이 있고 교육을 통해 정착성이 인정되는 미등록 이주아동</span><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span><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background-color:#ffffff;float:none;">청소년에 대한 정규화 방안을 마련해두고 있다</span><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 </span><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background-color:#ffffff;float:none;">한국도 장기체류한 미등록 이주아동</span><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span><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background-color:#ffffff;float:none;">청소년에게 정규화 경로를 마련해야 하며</span><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 </span><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background-color:#ffffff;float:none;">잠정적인 </span><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체류 허가가 아닌 취업까지 가능한 거주(F-2) 또는 영주(F-5) 또는 이와 유사한 체류자격을 신설하여 부여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span><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background-color:#ffffff;float:none;">나아가 아동에 대한 교육권 보장은 아동권리협약에서 보장하는 당연한 권리이자 정부의 의무이므로</span><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 </span><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background-color:#ffffff;float:none;">현재 학교에 재학 중인 미등록 아동</span><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청소년</span><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background-color:#ffffff;float:none;">에 대한 강제퇴거 유예가 결코 시혜가 아니라는 인식과 더불어 새로운 정책 변화가 이뤄져야 한다</span><span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 </span>
<p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margin:0px;padding:0px;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 </p>
<p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margin:0px;padding:0px;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한국에서 살아갈 자격은 누구에게 주어지는가? 혹은 누구에게 주어져야 마땅한가? 국경간 이동이 전례 없이 증가하고 있는 오늘날, 한국에 살아갈 자격에 대하여 현실적이고 미래지향적 시각에서 법제화할 시점에 이르렀다. 사실상 한국만을 지역적〮사회적 터전으로 삼고 살아 온 사람에 대한 생존권 보장 차원에서, 그리고 정규교육과정을 통하여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충분히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끔 성장한 이주민에 대한 국가적 정책 차원에서 정규화 방안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또한 재학 중인 아동·청소년의 안정적인 교육권 보장을 위해 제도화된 체류자격을 부여해야 한다. 제3차 외국인정책 기본계획은 취약한 상황에 있는 외국인 아동에 대한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보호방안을 강구하겠다고 하였으나 아쉽게도 미등록 이주아동·청소년들에 대한 체류권 부여에 대한 정책은 전무하다. 이들에 대한 체류자격 마련을 시작으로 인권과 다양성 존중이라는 정책비전을 실현해 나가야 할 것이다.</p>
<p style="letter-spacing:normal;text-indent:0px;text-transform:none;white-space:normal;word-spacing:0px;text-decoration:none;margin:0cm 0cm 10pt;padding:0px;color:#555555;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font-size:13px;"><br />재단법인 동천 권영실 변호사</p></div>]]></description>
<dc:creator></dc:creator>
<category>커뮤니티</category>
<category>구술 프로젝트</category>
<pubDate>Fri, 10 May 2019 18:29:09 +0900</pubDate>
</item>
<item>
<title>우리는 모두 집을 떠난다 - 발췌</title>
<link>https://stopcrackdown.net/interview/21</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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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div>발췌 본입니다. <br /></div>]]></description>
<dc:creator></dc:creator>
<category>커뮤니티</category>
<category>구술 프로젝트</category>
<pubDate>Sun, 05 May 2019 08:45:18 +0900</pubDate>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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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미등록 이주아동 리포트]③‘나홀로’ 방치된 이주아동들“학교 가고 싶어요”</title>
<link>https://stopcrackdown.net/interview/20</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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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div><a h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5062235005&amp;code=940100" rel="nofollow">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5062235005&amp;code=940100<br /><br /></a>
<div class="art_subtit">
<p class="content_text"><strong>“몇 달 걸려 서류 준비했는데 딴 학교 알아보라니요”</strong><br /><strong>이주아동의 ‘교육 받을 권리’</strong></p>
</div>
<div class="art_photo photo_center ft">
<div class="art_photo_wrap"><img src="/data/file/interview/1926105049_90afa291_l_2018050701000718400056211.jpg" alt="베트남 출신 박모군(오른쪽)과 한국인 양아버지 박모씨가 베트남 현지에서 보낸 박군의 중학교 입학 관련 서류를 살펴보고 있다. 유설희 기자 sorry@kyunghyang.com" width="700" />
<p class="caption">베트남 출신 박모군(오른쪽)과 한국인 양아버지 박모씨가 베트남 현지에서 보낸 박군의 중학교 입학 관련 서류를 살펴보고 있다. 유설희 기자 sorry@kyunghyang.com</p>
</div>
</div>
<p class="content_text"><br />“몽골에서는 친구들과 고무줄놀이하는 걸 가장 좋아했어요. 그런데 여기는 같이할 친구도 없으니까….”</p>
<p class="content_text"><br />TV·컴퓨터도 없는 서울의 한 반지하 단칸방. 학교에 가야 할 시간인데도 몽골 출신 미등록 이주아동 나라(9·이하 가명)는 집에서 홀로 엄마를 기다린다. 나라를 받아주는 초등학교가 한 곳도 없기 때문이다. 식당에서 일하는 엄마는 오전 7시쯤 집을 나서 오후 7시가 넘어서야 돌아온다.</p>
<p class="content_text"><br />그동안 모델이 꿈인 나라는 혼자 여러 벌 옷을 갈아입고 거울 앞에서 ‘모델 워킹’ 연습을 한다. 나라는 요즘 초등학생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휴대전화 게임도 “만렙(게임에서 레벨 수치가 최고점에 이르렀다는 뜻)을 찍어서 재미없어졌다”고 했다. 배가 고프면 엄마가 사다놓은 라면, 빵, 과자 등으로 허기를 달랜다.</p>
<p class="content_text"><br />집 밖으로 나가 또래 아이들과 함께 뛰어놀고 싶지만 나라는 한국말을 할 줄 몰라 나갈 수도 없다. 일주일에 두어 번, 집 근처 외국인근로자센터에서 이주노동자 자녀를 위한 무료 한국어 수업을 듣는 것이 또래 아이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의 전부다.</p>
<p class="content_text"><br />대부분의 시간 홀로 집에 방치되는 나라는 극심한 불안 증세를 보인 적이 있다. 센터에서 한국어 수업이 끝난 뒤, 일이 늦게 끝난 엄마가 밤 늦은 시간까지 나라를 데리러 오지 못한 날이었다. 당시 아이를 맡았던 센터 관계자는 “ ‘집에 데려다줄까’라고 했더니 나라가 집에 혼자 있으면 무섭다고 극구 거부했다”며 “숨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울면서 10초에 한 번씩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고 말했다.</p>
<p class="content_text"><br />2만여명으로 추정되는 국내 미등록 이주아동 중 상당수가 공교육의 울타리 밖에 있다.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이 발표한 ‘서울시 중도입국 청소년 현황과 지원 방안’을 보면, 2010년 기준으로 나라처럼 중도 입국한 7~18세 아동 875명 중 초·중·고교에 다니는 비율은 5명에 1명(21.7%)꼴이었다.</p>
<p class="content_text"><br />초등학교의 경우 56.4%로 비교적 높았지만 중학교는 18.1%, 고등학교는 3.1%로 연령이 높아질수록 재학률이 낮아졌다.</p>
<p class="content_text"><br />돌봄이 필요한 미취학 이주아동조차 일부 보육기관에서 입학을 거절당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가 이주아동 부모 14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경기도 외국인아동 기본권 실태 모니터링’ 보고서에 따르면, 콩고 출신 이주민 ㄱ씨의 아이는 “어린이집에 흑인이 다닐 수 없다”는 이유로 입소를 거절당했다. ㄱ씨는 “그런 어린이집에 아이가 다녔다면 얼마나 힘들었겠나”라고 말했다. 6세 아이를 둔 중국인 이주노동자 ㄴ씨는 “어린이집에서 한국인 학부모들이 외국인 원생이 있으면 싫어한다고 거부한대서, 외국인 원생이 있는 곳을 수소문해서 들어갔다”고 말했다.</p>
<p class="content_text"><strong class="strapline"><br />결국은 체류 신분 문제 삼아<br />브로커에 번역·공증까지<br />수백만원 썼지만 학습 공백</strong></p>
<p class="content_text"><br />베트남 출신 박모군(18)의 한국인 양아버지 박모씨(49)는 아들의 중학교 입학을 위해 수백만원을 들여 브로커까지 이용해야 했다. 박군은 베트남에서 태어났지만 한국 남자와 결혼한 어머니를 따라 한국으로 입국했다. 박군이 중학교에 입학하는 과정은 험난했다. 학교에서 요구하는 초등학교 졸업·성적증명서, 중학교 재학·성적증명서 등 10여장의 서류를 준비하는 데만 몇 달이 걸렸다. 박씨는 “베트남에 있는 아들 조부모가 서류를 준비하기에는 절차가 복잡해 베트남 현지에 있는 브로커를 통해 준비했다”면서 “서류를 한국에서 번역하고 공증을 받는 데 드는 비용까지 합하면 300만원이 넘게 들었다”고 말했다.</p>
<p class="content_text"><br />교육부 관계자는 “학교마다 요구하는 서류를 일괄적으로 규제하는 것은 어렵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10년 넘게 이주아동의 학교 입학을 도왔던 이은하 성동외국인근로자센터 사무국장은 “서류가 완비되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다보니 학교를 못 가게 된 아이들은 학습 공백이 발생한다”고 지적했다.</p>
<p class="content_text"><br />2010년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개정으로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자녀도 국내 거주 사실만 확인되면 학교에 입학할 수 있다. 하지만 법을 개정해도 상당수 학교들은 체류 신분 등을 문제 삼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박씨가 학교에서 요구한 서류를 모두 가져갔지만 학교에서는 아들의 체류 신분을 문제 삼았다. 박씨는 “ ‘불법체류자 아니냐’ ‘한국 국적은 언제 나오느냐’고 묻는 선생님들이 많았다”면서 “문제가 생기면 책임진다는 각서라도 쓰겠다고 하자 그제야 학교 측은 검토는 해보겠다는 식으로 나왔다”고 말했다. 박군은 서울 서대문구와 은평구에 있는 모든 중학교에서 입학을 거절당했다. 다행히 베트남 학생을 받아준다는 중학교를 어렵게 소개받아 입학할 수 있었다. 교육부 관계자는 “출입국 사실증명 서류 등을 요구하는 사례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는 있지만 처벌 규정이 없어서 어쩔 수 없다”고 답했다. 이어 “현행 초·중등교육법은 대한민국 국민의 교육권 보장을 위한 것이고, 이주아동 학생들에 대해서는 예외적으로 입학을 받아준다는 취지라 이런 문제가 심화된 건 사실”이라면서 “차별 철폐를 위해서 처벌이나 징계 조항이 생기는 등 규정이 강화돼야 학교장 입학 거절 문제가 해결될 수 있지만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말했다.</p>
<p class="content_text"><strong class="strapline"><br />입국 이주아동 재학률 21.7%<br />고등학교는 3.1%에 불과하고<br />미취학 아동부터 갈 곳 없어</strong></p>
<p class="content_text"><br />“잘사는 집 아이들이 많이 다니는 학교라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면서 이주아동을 거절하는 학교도 있다. 이주아동 ㄷ양(12)은 서울 성동구의 한 초등학교에서 입학을 거절당했다. 교장선생님이 “특별활동 비용 등을 아이가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면서 거절한 것이다. 유엔아동권리협약 제28조는 아동의 교육받을 권리는 소득, 국적, 인종, 불법 이주와 관계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1991년 유엔아동권리협약의 당사국이 된 한국에서 이주아동의 교육권은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p>
<p class="content_text"><strong><br />■법은 “거주 증명하면 입학 허용”…현실은 학교장 재량으로 “불가”</strong></p>
<p class="content_text"><strong class="strapline">처벌규정 없어 거부 못 막아<br />의무교육 권리도 ‘국민’ 한정</strong></p>
<p class="content_text"><br />2010년 개정된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제19조에 따르면 미등록(불법체류)인 이주아동 학생도 거주지가 속하는 학군 안에 있는 초·중등학교의 장에게 학생의 입학 또는 전학을 신청할 수 있다. 2010년 전에는 출입국에 관한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서류를 제출해야 했지만 임대차계약서나 거주사실에 대한 이웃 주민의 보증서 등 거주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서류만 제출하면 입학할 수 있게 된 것이다.</p>
<p class="content_text"><br />하지만 “귀국한 아동은 교육감이 정하는 바에 따라 귀국학생 특별학급이 설치된 초등학교에 입학 또는 전학할 수 있다”는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제19조 4항을 악용해 학교장들이 입학을 사실상 거절하는 사례가 많은 것으로 전해졌다.</p>
<p class="content_text"><br />이은하 성동외국인근로자센터 사무국장은 “학교장들이 특별학급이 설치된 학교로 입학을 권유하지만 특별학급이 설치된 학교가 많지 않아 아이들이 장거리 통학을 해야 한다”며 “교육청에 도움을 요청해도 학교장 재량이라는 말만 되돌아온다”고 했다. 이주아동을 위한 예비학교를 운영하는 서울 지역 초등학교는 2017년 기준 9곳이고, 중학교는 3곳, 고등학교는 1곳뿐이다.</p>
<p class="content_text"><br />전문가들은 유엔아동권리협약에 따라 의무교육의 권리를 대한민국 영토 내 모든 아동에게 보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김진 이주민지원공익센터 감동 변호사는 “현행 교육기본법 제8조는 의무교육의 권리를 “국민”으로 한정하고 있는데, 유엔아동권리협약에 맞춰 모든 “아동”은 의무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개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p>
<p class="content_text"><br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 등은 교육 관련 법령을 통해 국가의 영토 내에 존재하는 모든 아동이 의무교육을 받을 수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특히 프랑스의 모든 아동들은 시청에 별다른 서류 없이 입학신청서만 제출하면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공립학교에 자동으로 배정된다. 이 과정에서 아동의 신분을 확인하는 절차도 없다. 프랑스는 학교장이 입학을 거부할 경우 소송을 통해 구제받을 수 있도록 했다.</p>
<p class="content_text"><br />김 변호사는 “프랑스 등 많은 나라에서 이주아동 입학을 거부하는 학교에 법적 제재를 가한다”면서도 “전입학 거부를 금지하는 법 규정도 필요하고 예산 부족 등으로 이주아동을 감당하지 못하는 학교들을 감안해 이주아동 특별학급 설치를 지원하는 규정도 함께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p>
<p class="content_text"><br />석원정 성동외국인근로자센터장은 “이주아동에게는 취학통지서가 발부되지 않고 취학에 관한 정보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어 한국 상황을 모르는 이주노동자 부모가 적절한 시기에 자녀를 입학하도록 하는 것이 쉽지 않다”면서 “이주아동도 대한민국 아동과 동일한 조건에서 의무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p>
<p class="content_text"><br />&lt;시리즈끝&gt;</p></div>]]></description>
<dc:creator></dc:creator>
<category>커뮤니티</category>
<category>구술 프로젝트</category>
<pubDate>Sun, 05 May 2019 07:37:52 +0900</pubDate>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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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미등록 이주아동 리포트]①‘출생등록권 보장’ 법 개정이 출발점</title>
<link>https://stopcrackdown.net/interview/19</link>
<guid>https://stopcrackdown.net/interview/19</guid>
<description><![CDATA[<div><a h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5032315005" rel="nofollow">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5032315005<br /><br /></a>
<div class="art_subtit">
<p class="content_text"><strong>유엔아동권리협약에도 명시</strong><br /><strong>영토 내 모든 아동에 적용해야</strong></p>
</div>
<div class="art_photo photo_center ft">
<div class="art_photo_wrap"><img src="/data/file/interview/1926105049_f65803ac_l_2018050401000494400038591.jpg" alt="몽골 출신 불법체류자 가나(가명)가 아들과 함께 지난 1일 서울 거리를 걸어가고 있다. 정지윤 기자" width="700" />
<p class="caption">몽골 출신 불법체류자 가나(가명)가 아들과 함께 지난 1일 서울 거리를 걸어가고 있다. 정지윤 기자</p>
</div>
</div>
<p class="content_text"><br />행정안전부 통계에 따르면 2008년 5만8007명이던 이주아동 수는 2016년 20만1333명으로 늘었다. 하지만 이는 ‘결혼이민자’와 ‘한국 국적 취득자’의 외국 국적 자녀들만 포함하고 있어 부모가 모두 외국 국적자인 이주아동은 반영되지 않았다. 법무부는 출입국기록을 바탕으로 국내 만 18세 미만 미등록 이주아동을 2895명으로 집계하고 있지만 국내에서 태어난 미등록 이주아동을 포함하지 않아 현실성이 떨어지는 수치다.</p>
<p class="content_text"><br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가 지난해 경기도에 거주하는 만 0~12세 이주아동 14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4명 중 1명(26.2%)은 미등록 상태였다. 이에 비춰 상당수 이주아동들이 미등록된 것으로 추정된다.</p>
<p class="content_text"><br />이처럼 정부 차원의 미등록 이주아동 수에 대한 집계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원인은 현행법상 외국인의 출생등록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현행 가족관계등록법은 대한민국 국민의 출생에 대해서만 증명 사항을 규정하고 있다. 한국도 1991년 당사국이 된 ‘유엔아동권리협약’은 모든 아동의 출생신고를 보장하는 ‘보편적 출생신고 제도’를 도입할 것을 촉구하고 있지만 전혀 반영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이주아동도 부모의 국적국 재외공관에서 출생신고를 할 수 있다는 입장이지만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등 한국에 대사관이 없는 국가는 30개 이상이다.</p>
<p class="content_text"><br />전문가들은 ‘출생등록권’ 보장이 이주아동 인권의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김사강 이주와인권연구소 연구위원은 “출생등록을 하지 못한 아동은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의료·교육·복지 등 기본적인 사회서비스에서 배제되고, 아동학대 같은 문제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게 된다”면서 “이주아동의 출생등록을 제도적으로 보장해 이주아동 수를 정확히 집계해야만 그에 맞춰 정책을 세울 수 있다”고 말했다. 김진 이주민지원공익센터 감동 변호사는 “현행 가족관계등록법에 이주아동의 출생신고에 대한 별도의 특례조항을 도입하는 등 이주아동이 공적으로 기록될 수 있도록 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밝혔다.</p>
<p class="content_text"><br />대한민국 아동의 권리만을 한정적으로 보장하는 관련법 개정도 시급하다. 캐나다, 영국 등은 유엔아동권리협약에서 보장하는 모든 권리를 국적과 상관없이 영토 내 모든 아동에게 적용하도록 하고 있다.</p>
<p class="content_text"><br />하지만 한국에서는 현행 아동복지법, 국민기초생활보장법 등이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아동에게만 무상보육, 교육비, 기초생활수급 등을 지원하게 하고 있다. 출입국관리법에는 이주아동 부모에게 임시체류 자격을 부여할 법적 근거가 없다.</p>
<p class="content_text"><br />김종철 공익법센터 어필 변호사는 “헌법 제6조 1항에 따르면 유엔아동권리협약은 국내법과 같은 효력이 있는데, 현행 아동복지법 등은 이 협약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않다”면서 “유엔아동권리협약에 맞춰 법을 개정하든지 아니면 해석상이라도 이주아동에게 적용되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p></div>]]></description>
<dc:creator></dc:creator>
<category>커뮤니티</category>
<category>구술 프로젝트</category>
<pubDate>Sun, 05 May 2019 07:35:17 +0900</pubDate>
</item>
https://stopcrackdown.net/data/file/interview/1926105049_70c34025_218385_74761_389.jpg<item>
<title>예멘인 추방하자는 사람들, 21세기 '인종주의자'</title>
<link>https://stopcrackdown.net/interview/18</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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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div><p> <a href="http://m.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18385" rel="nofollow">http://m.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18385</a></p>
<h2>예멘인 추방하자는 사람들, 21세기 '인종주의자'</h2>
<h3>김현미 교수 "문화 차이는 반대 이유 될 수 없어…그들이 말하게 하라"</h3>
<p class="date"><strong class="dark">최승현 기자</strong>   기사승인 2018.06.29  14:07:57<br /><br /><br /></p>
<blockquote>
<p>"저게 난민이냐? 불법 취업자들이지. XXX 정부야, 난민이 비행기 타고 와? 난민이 스마트폰 들고 있어? 난민이 저런 헤어스타일 해? 난민이 옷을 저렇게 입어? 저 사람들 진짜 전쟁 피해서 여기까지 왔을 거라고 생각하는 쓰레기 국회의원, 공무원 XX들아."</p>
</blockquote>
<p><br />[뉴스앤조이-최승현 기자] 한 포털 사이트에 게재된 예멘인 관련 기사에 올라온 댓글 중 하나다. 이 댓글에 수십 명이 동의 버튼을 눌렀다. 반대는 단 한 명뿐이었다.</p>
<p><br />예멘 난민 이슈가 한국 사회 주요 논쟁거리가 됐다. "왜 우리가 무슬림을 받아 줘야 하느냐"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온다. 난민으로 인정받기 어렵게 법을 강화하고 예멘인들을 돌려보내라는 청와대 청원 서명자 수는 벌써 54만 명에 육박한다. 6월 30일에는 시청 앞 광장에서 예멘인 추방을 요구하는 '촛불 시위'도 열릴 예정이다.</p>
<p><br />김현미 교수(연세대 문화인류학과)는 이러한 반反난민 정서가 '신자유주의'와 '인종주의'에 기반하고 있다고 말했다. 난민인권센터가 6월 28일 서울혁신파크에서 개최한 '한국 사회와 난민 인권' 기획 강좌에서, 김 교수는 '신자유주의와 난민 인권'을 주제로, 왜 한국이 왜곡된 난민관을 갖고 있는지 분석했다. 지금 뜨겁게 달아오른 이슈답게, 강좌에는 사전 신청자 100명 외에도 수십 명이 몰렸다.</p>
<br /> <img src="https://stopcrackdown.net/data/file/interview/1926105049_70c34025_218385_74761_389.jpg" alt="" /><br /><em>서울혁신파크에서 열린 난민 인권 강좌에는 100명 넘는 사람이 참석해 높은 관심을 나타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em><br /><br />
<p><br />김현미 교수는 1980년대 이후 등장한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와 난민의 상관성을 찾는 것으로 강연을 시작했다. 신자유주의가 중시하는 '노동의 유연화'에 따라 각국의 이주 정책이 바뀌면서 난민 문제가 발생했다고 말했다.</p>
<p><br />정부는 과거 일정 기간 거주하면서 돈을 벌면 영주권을 주는 '정착형 이주'에서, 사회 통합 비용이 들지 않는 식으로 정책을 바꿨다. 언어교육, 문화적 차이 극복 등에 드는 비용을 절감하려 한 것이다. 주 타깃은 '청년'이었다. 워킹 홀리데이나 기술·산업 연수생 명목으로 자국 기피 산업의 수요를 채우는 방식이었다. 굳이 복지·의료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아도, 이들은 '좋은 경험'을 했다는 마인드로 곧 본국에 돌아갔다.</p>
<p><br />각 정부는 유연한 노동자들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정착형 이주자와 난민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반난민 정책을 노골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현미 교수는 과거 정착형 이주자를 받아들이던 선진국들이 최근 입장을 바꾸고 이주 문제를 정치화했다고 말했다. 안보·문화적 문제가 있다며 난민을 격리하고 수용소를 짓는 등 이율배반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지적이다. 김 교수는 이러한 모습이 '어떻게 책임을 분담할까' 고민하는, 이른바 '버든 쉐어링(burden sharing)'의 성격을 띠게 됐다고 분석했다.<br /><br /></p>
<blockquote>
<p>"선진국이라는 곳에서, 민주주의를 강조한다는 국가에서 난민이 온다고 하니 받지 않을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난민 이슈를 인권 패러다임에서 정치·안보 패러다임으로 바꿔 버렸어요. 이를테면, 유럽에서는 '우리와 이슬람은 양립이 불가능하다'고 강조해요. 영국 식민 지배 때 건너온 파키스탄·인도 사람들은 벌써 6~7세대가 유럽에 정착해 살고 있어요. 이제 와서 '문화적 정체성' 운운하면서 난민을 막으려는 건, 사실 '우리가 문화를 취사선택해서 받겠다'는 말이죠. 이것이 현재의 이주 레짐(regime)입니다."</p>
</blockquote>
<p><br />'책임 분담' 정책은 곧 난민을 '짐이자 쓸모없는 존재'로 인식하게 만든다고 김 교수는 지적했다. 인도주의적 원칙과 관용은 온데간데없고 감시와 정찰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좋은 나라로 보내 주겠다는 '브로커'들의 등장으로, 난민은 역사적이면서 구조적인 착취의 산물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p>
<img src="https://stopcrackdown.net/data/file/interview/1926105049_c486c5d2_218385_74760_376.jpg" alt="" /><br /><em>김현미 교수는 "난민 지위를 인정받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남성이 먼저 오고 이후 가족을 초청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이런 맥락을 모르면서 '강간 위험 증가' 등의 유언비어가 퍼지는 현상을 비판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em> <br /><br />
<h2 class="point-line border-box"><br />백인과 결혼하면 '글로벌 가족',<br />동남아인과 결혼하면 '다문화 가족'<br />"문화 차이로 난민 못 받는다?<br />진짜 문제는 신인종주의"</h2>
<p><br />한국 또한 난민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뿌리 깊다. 김현미 교수는 한국인들이 난민을 "교육받지 못하고 철저한 무권력 상태인 사람들"로 인식하지만, 이들은 정치·경제적 자유를 위해 국경을 넘은 능동적인 사람들이라고 했다. 이주지에서 더욱 건실하게 살 능력과 역량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점은 난민 논의에서 배제되고 있다고 했다.</p>
<p><br />한국인의 '인종주의적 시각'을 개선해야 한다고 김 교수는 말했다. 수많은 댓글에서 볼 수 있듯, 예멘인을 반대하는 이유 중에는 문화가 너무 달라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여론, 즉 '문화적 양립이 불가능하다'는 말이 많다. 무슬림이 돼지고기를 먹지 않아서, 여성을 하대해서, 일하다 말고 하루 5번 기도해야 해서 같이 못 살겠다는 이유를 댄다.</p>
<p><br />김현미 교수는 "하루 5번 기도해도 직장에서 하는 건 2번뿐이다. 그 5분 기도하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렇게 따지면 한국 사람 중 교회에 거의 살다시피 하면서 심신의 안정을 취하는 사람은 무엇인가"라고 되물었다. 한국인 중에도 채식을 실천하는 사람이 있고, 그 안에도 베지테리언·비건 등으로 나뉜다고도 했다.<br /><br /></p>
<blockquote>
<p>"사람들은 '내가 인종주의자냐'면서 반발해요. 인종주의자라고 낙인찍히기가 싫은 것이죠. '피부색 같은 신체적 특징으로 차별하거나 혐오하는 게 아니라, 문화가 달라서 못 살겠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런 대상을 살펴보면 '우연히도' 무슬림이거나 비기독교인인 경우가 많죠.</p>
<p>무슬림이 여성을 억압해서 강간당할 우려가 있다고요? 화장실에서 몰카 찍힐까 봐 전전긍긍하며 소변 봐야 하는 게 일상적 위협인가요, 아니면 500여 명 예멘인이 우리의 위협인가요? 무슬림은 남녀 공간 구별이 너무 엄격해서 몰카도 못 달아요. 차라리 '싫다'고 말하는 게 더 솔직할 것 같아요. 그냥 '나 인종주의자다'고 말했으면 좋겠어요."</p>
</blockquote>
<br /> <img src="https://stopcrackdown.net/data/file/interview/1926105049_90f045cc_218385_74762_4124.png" alt="" /><br /><em>6월 29일 오후 1시 30분 현재 '난민법 강화' 관련 청원자 수가 53만 9000명을 넘어서고 있다. 청와대 홈페이지 갈무리</em> <br /> <br />
<p><br />한국전쟁 직후, 이승만 정권은 일국일민주의一國一民主義를 내세워 혼혈 아동을 해외로 내보냈다. 김현미 교수는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국민성國民性이라는 것은 철저한 추방과 배제의, 인권침해 역사 위에 있다. 만일 혼혈 아동들이 한국에서 성장해 기업가가 되고 정치가가 되었다면, 지금의 인식이 많이 달라졌을 텐데 아쉽다"고 말했다.</p>
<p><br />인종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가 있다. 백인과 결혼한 가정은 '글로벌 가족'이라고 하면서, 동남아인과 결혼한 가정은 '다문화 가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br /><br /></p>
<blockquote>
<p>"나와 다른 피부색을 지니면 싫어하면서, 다니엘 헤니나 줄리엔 강은 왜 좋아하죠? 리틀 싸이라고 불리는 황민우 어린이는 엄마가 베트남 여성이라는 이유로 왜 6살의 나이에 10만 명의 악플러와 싸워야 하죠?"</p>
</blockquote>
<br />
<h2 class="point-line border-box">난민들 "'가짜' 식별한다는 한국에<br />더 큰 상처받았다(more traumatized)"<br />"난민과의 공존 기획하는 사회 돼야"</h2>
<blockquote>
<p>"가짜 난민을 걸러 내는 게 온 국민의 관심사인데, 그럼 진짜 난민은 누구인가요? 종편 채널에 '3분에 한 명씩 아이가 죽어 가고 있습니다'는 문구와 함께 나오는 아이를 상상하나요? 난민은 교육받으면 안 되고, 똑똑하면 안 되고, 미래를 계획하면 안 되고, 가족을 먹고살게 하기 위한 장기적 전망을 세워서도 안 되는, 무력한 구호의 대상이어야 하나요?"</p>
</blockquote>
<p><br />김현미 교수는 난민들을 만난 자리에서 "본국에서의 정치적 박해를 받을 때보다 한국에 온 이후 더 큰 상처를 입었다(more traumatized)"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난민들은 한국이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은 나라', 'UN사무총장을 배출한 나라'여서 인권 옹호국인 줄 알고 왔는데 낭패를 봤다고 했다. 한국에서 이주민은 신원보증이 없으면 휴대전화도 개통 못 한다며, 기본권조차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나라라고 했다.</p>
<p><br />김현미 교수는 난민과 함께하는 민주적 사회를 기획하자고 제안했다. 신자유주의가 지닌 불안정성의 '공동적 대응자'로서 함께하자고 했다. 난민은 제국주의와 폭력, 탄압에 따른 정신적 상처와 스트레스가 많은 이들이라고 했다. 이들의 경험을 공유하지 못하면, 이들의 트라우마와 분노가 가중되어 '게토화'할 수밖에 없고, 우리 스스로도 적대와 혐오를 부추기면서 더 불안정한 느낌으로 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p>
<p><br />만일 그들 문화에 차별적 요소가 있다면, 한국에서는 최소한 그런 문화가 허용될 수 없다는 것을 시민교육이라는 장치로 대처하자고 했다.</p>
<p><br />김현미 교수는 '시공간적'으로 함께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가 난민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br /><br /></p>
<blockquote>
<p>"난민은 정말 완벽한 타자예요. 우리가 잘 몰라요. 예멘? 저도 찾아보고 공부해서 알았고, 이슬람 종파가 그렇게 다양하다는 거 처음 알았어요.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믿겠다고 하면, 소수 중 소수인 예멘 난민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요. 너무 소수여서 자기를 대표할 수 있는 통로도 없어요.</p>
<p>우리가 보고 싶은 대로 이분법적으로 사유하고, '너를 처단하겠다', '추방하겠다' 이런 언명에 쾌감을 느끼지 말고,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좋겠어요. 우리 방식으로 조급하게 처리하려 하지 말고, 먼저 그들의 입으로 말하게 했으면 좋겠습니다."</p>
</blockquote></div>]]></description>
<dc:creator></dc:creator>
<category>커뮤니티</category>
<category>구술 프로젝트</category>
<pubDate>Sat, 04 May 2019 23:57:11 +0900</pubDate>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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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경향] [미등록 이주아동 리포트] ①있지만 없는 아이들</title>
<link>https://stopcrackdown.net/interview/17</link>
<guid>https://stopcrackdown.net/interview/17</guid>
<description><![CDATA[<div><p class="header_tit_serial"><a h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5032334005" rel="nofollow">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5032334005</a><br /><br />미등록 이주아동 리포트<br />유설희 기자</p>
<p class="figure_thumb"><img class="thumb_img" src="https://stopcrackdown.net/data/file/interview/17533413_bbacf33b_l_2018050401000551100038621.jpg" alt="불법체류 외국인인 몽골 출신 여성 가나(가명)가 한국에서 태어난 미등록 이주아동인 9세 아들과 함께 지난 1일 서울 청계천에 발을 담근 채 물놀이를 하고 있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p>
불법체류 외국인인 몽골 출신 여성 가나(가명)가 한국에서 태어난 미등록 이주아동인 9세 아들과 함께 지난 1일 서울 청계천에 발을 담근 채 물놀이를 하고 있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p class="art_sub_tit"><strong><br />인권 사각 ‘18세 미만의 사람’</strong><strong>2만여명 추정뿐 실태 불명확</strong><strong>불법체류 부모 추방에 생이별</strong></p>
<p><br />“자동차, 팽이, 엄마가 제일 좋아요. 아빠는…한번도 본 적이 없어요.”</p>
<p><br />휴대전화를 손에 쥔 채 자동차게임에 정신이 팔린 현우(9·이하 가명)가 말했다. 현우 기억에 아빠는 ‘없는 존재’다. 몽골 국적으로 한국에서 미등록(불법체류) 이주노동자로 일하던 현우 아빠는 현우가 태어난 지 5개월 만에 강제추방돼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론 연락이 닿지 않는다.</p>
<p><br />“남편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몰라요. 몽골 가서 찾고 싶지만, 그러다 잡힐까봐….” 현우 엄마 가나(46)의 얘기다. “경찰만 봐도 무서워서 도망 다닌다”는 가나 역시 미등록 신분으로 서울 중구의 영세 비닐공장에서 일한다. 일요일을 제외하고 아침부터 밤까지 한 달을 꼬박 일해 손에 쥐는 돈은 150만원. 오후 2시면 학교에서 돌아오는 현우는 엄마를 기다리며 집에서 TV를 본다. 현우는 얼마 전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진단을 받았다. 일 때문에 아이와 함께할 수 없는 가나는 지난달부터 현우를 몽골어 학원에 보내기 시작했다. “언제 추방될지 모르니까, 말이라도 가르치려고요.” 한국에서 태어난 현우는 한국말밖에 하지 못한다.</p>
<p><br />현행 출입국관리법에 따르면 체류자격이 없는 외국인은 강제추방 대상이며, 아동 역시 별도 규정이 없어 성인과 동일하게 강제추방된다. 다만 2013년부터 법무부는 이주아동의 학습권 보장을 위해 최장 15세 또는 중학교 과정 수료 시까지 학생과 그 부모에 대한 강제퇴거 집행을 유예한다는 지침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이 이주민들의 얘기다.</p>
<p><br />실제 나이지리아 출신 불법체류자 ㄱ씨는 한국에 초등학교에 재학 중인 자녀들이 3명이나 있지만 2013년부터 지난 3월까지 화성외국인보호소에 구금돼 가족들을 돌볼 수 없었다. 출입국당국은 ㄱ씨가 구금돼 있는 동안 강제추방 시도도 여러 차례 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우와 그의 어머니도 당국에 적발되면 강제추방되거나 어머니가 외국인보호소에 수용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p>
<p><br />특히 이 지침은 이주아동의 학습권을 보장한다는 취지에서 시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취학 전의 영·유아 이주아동이나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미성년자 이주아동을 둔 불법체류 외국인 가족들은 그대로 강제추방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p>
<p><strong><br />▶“부모 국적·체류자격 따지기 전에 ‘아동인권’ 보장이 먼저”</strong></p>
<p><strong>법무부 강제퇴거 우려에 출생신고도 외국인등록도 못해</strong></p>
<p><strong>복지부 ‘보호 지침’은 강제성 없어 지자체마다 제각각</strong></p>
<p><br />또 다른 미등록 이주아동인 지훈(15), 지원(10) 형제는 3년 전 보육시설에 맡겨진 채 베트남인 엄마 응옥(46)과 9개월간 떨어져 있어야 했다. 1999년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입국한 응옥은 한국에서 동향인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았지만, 남편은 불법체류 신분이 발각돼 강제출국됐다. 이후 응옥은 단기 비자를 얻기 위해 아이들을 이웃에게 맡기고 베트남으로 갔다. 그런데 이웃이 갑작스러운 사정이 생겨 아이들을 보육원에 맡겼다. 베트남에서 소식을 들은 응옥은 곧바로 보육원을 찾았지만, 보육원 측은 그의 불안한 체류 자격을 문제 삼으며 아이들을 돌려주지 않았다. 한국인 신원보증인을 구해 가까스로 아이들을 찾게 된 응옥은 자신의 불안한 신분 때문에 언제든 홀로 남을 수 있는 아이들이 걱정이다.</p>
<p><br />법무부 출입국기록상 국내 만 18세 미만 미등록 이주아동은 2895명(2월 기준)이지만, 이는 현우나 지훈이 형제처럼 국내에서 태어나 출입국기록에 남지 않는 아이들은 포함되지 않은 수치다. 이들처럼 단속과 강제퇴거 우려 때문에 출생신고 및 외국인등록 등을 하지 못한 국내 출생 이주아동은 2만여명으로 추정되고 있다.</p>
<p><br />김대권 아시아의친구들 대표는 “부모의 나라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상황에서 무조건 부모의 국적국으로 돌아가라고 등을 떠미는 것이 옳은 일인지는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정부 공식 통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아이들’인 이들 미등록 이주아동에게 유엔아동권리협약이 밝히고 있는 ‘아동의 부모와 함께 살 권리’는 요원한 일인 것이다.</p>
<p><br />부모의 불안정한 체류 자격으로 인해 적절한 보호를 받지 못해 차라리 ‘행려자’가 되는 길을 택하는 이주아동들까지 있다. 2011년 한국에서 태어난 준영(6)이의 어머니는 베트남 출신 결혼 이민자였다. 결혼 이민자로 입국해 한국 남성과 결혼했지만 곧 이혼해 체류 자격을 잃었고, 그 뒤 준영이를 낳았다. 엄마가 결핵 진단을 받아 전문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준영이는 보육원에 맡겨졌고, 퇴원한 엄마는 강제출국돼 본국으로 돌아갔지만 건강 악화로 세상을 떠났다.</p>
<p><br />문제는 준영이의 ‘미등록’ 신분. 현행 아동복지법은 국적과 관계없이 아동을 ‘18세 미만의 사람’으로 포괄적으로 정의하고 있지만 보육원은 준영이를 돌보기 위한 의료급여나 기초생활수급 등 지원금을 받을 수 없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과 사회복지사업법 등 사회복지 관련 법령에서 보호 대상은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아동’으로 한정되기 때문이다. 결국 준영이는 구청의 도움으로 ‘행려자’로 인정됐다. 준영이를 도와주고 있는 이주아동 지원단체 관계자는 “행려자로 인정된 후 지원을 받고 있지만 준영이가 출생 등록을 한다면 베트남 국적자가 돼 지원이 모두 끊길지 모르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라고 말했다.</p>
<p><br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아동 분야 사업 안내 지침’을 통해 보호조치가 필요한 무국적 및 외국 국적, 미등록 상태의 아동에 대해서도 적절한 보호조치를 하라고 안내했다. 하지만 이 또한 강제성이 없는 지침인 데다 일선 지방자치단체나 복지시설의 이해와 의지에 따라 일관성 없는 지원이 이뤄지고 있다.</p>
<p><br />김종철 공익법센터 어필 변호사는 “미등록 신분인 나이지리아 여성이 생활고로 인해 아이를 복지시설에 맡기기 위해 찾아갔는데, 복지시설에서 아이를 맡기 위해서는 ‘아동학대’라도 인정돼야 가능하다고 해 경찰에 엄마를 신고한 사례가 있다”면서 “결국 엄마는 경찰 신고로 외국인보호소에 구금됐다”고 말했다. 김사강 이주와인권연구소 연구위원은 “아동은 부모의 국적이나 체류자격과 무관하게 ‘아동’이라는 이유만으로 기본적인 권리를 누려야 하지만, 이런 사회적 권리를 오로지 ‘국민’에게만 한정하는 법과 제도 때문에 미등록 이주아동은 장애가 있어도 장애인 등록을 하지 못하고 건강보험에도 가입하지 못한다”며 “보호받아야 할 대상의 국적과 체류자격이 ‘아동’이라는 사실에 우선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p></div>]]></description>
<dc:creator></dc:creator>
<category>커뮤니티</category>
<category>구술 프로젝트</category>
<pubDate>Sun, 28 Apr 2019 20:54:53 +0900</pubDate>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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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새벽 4시, 남구로역에 중국어가 울려 퍼진다</title>
<link>https://stopcrackdown.net/interview/15</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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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div><div class="arl_view_title_box">
<h3 class="arl_view_sub_title">대림동의 하루는 건설 현장 노동자들이 움직이면서 시작한다. 직업소개소에선 모텔, 사우나 등 숙식 제공 일자리를 연결해준다. 일자리를 찾는 이들 중엔 단기 체류 중인 한족도 많다.</h3>
</div>
<div class="arl_view_writer_box"><span class="arl_view_writer"><span class="arl_view_writer">김동인 기자 <a class="arl_view_email" href="mailto:astoria@sisain.co.kr?subject=%EC%83%88%EB%B2%BD%204%EC%8B%9C,%20%EB%82%A8%EA%B5%AC%EB%A1%9C%EC%97%AD%EC%97%90%20%EC%A4%91%EA%B5%AD%EC%96%B4%EA%B0%80%20%EC%9A%B8%EB%A0%A4%20%ED%8D%BC%EC%A7%84%EB%8B%A4">astoria@sisain.co.kr </a> <span class="arl_view_date">2019년 02월 08일 금요일 </span><span class="arl_view_hosu">제594호<br /><br /><br /></span></span></s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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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연단에 선 강사가 수강생을 둘러보며 말했다. “자, 여기서 한국어 읽을 줄 아는 분 손 들어보세요.” 6명 가운데 손을 든 사람은 기자를 포함해 두 명뿐이었다. “그럼 한국어 알아듣는 건 괜찮으신가요?” 세 사람이 추가로 손을 들었다. 나머지 한 명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여기 한국분이 한 명 계시니까, 이분이 동의하시면 중국어 자막 수업 영상으로 진행하도록 하죠.” 교실에 있는 모든 사람이 기자를 쳐다봤다. 고개를 끄덕이자 강사가 교육 영상 재생 버튼을 눌렀다.<br /><br />지난해 12월19일,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에 위치한 한 건설 안전교육 학원. 건설 현장 잡부 일을 하려면 이곳에서 4시간짜리 안전교육을 반드시 수강해야 한다. 수업을 듣는 이들 대부분은 재한 조선족이었다. 함께 교육을 받게 된 한 50대 남성은 지방 제조업 공장에서 일하다 일감이 떨어져 이곳을 찾았다고 말했다.<br /><br />수업은 50분씩 총 네 차례 이어졌다. 1교시는 산업안전보건법에 관한 영상을 시청했다. 2교시부터는 건설회사에서 오래 일한 강사가 각종 현장 안전수칙(비계 작업, 용접, 리프트 작업 등)을 말로 설명했다. 한국어를 못 알아듣는다던 40대 남성도 졸음을 쫓으며 강사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중국어 자료는 1교시 수업에만 사용했을 뿐 나머지 시간은 한국어 자료로 수업을 진행했다. “이런 걸 조심하지 않으면 죽을 수 있다”라는 내용의 강의를 모두가 이해했는지 알 수 없었다.</p>
<table class="news_photo_table" width="600" align="center">
<tbody>
<tr>
<td><img src="/data/file/interview/1926105049_134ab8d6_33871_65941_0142.jpg" alt="" width="600" /></td>
</tr>
<tr>
<td class="news_photo_table_caption">
<div class="a_credit">ⓒ시사IN 신선영</div>
1월18일 새벽 남구로역 교차로에서 조선족 노동자들이 일감을 기다리며 서 있다.</td>
</tr>
</tbody>
</table>
<p>안전교육을 받은 직후 작업복 매장에 들렀다. 가격별로 걸려 있는 작업복 매대에서 한국GM과 팔도식품 마크가 박힌 작업복을 발견했다. 도매상에서 덤핑으로 떼 온 제품이었다. 가격은 1만5000~3만원 정도. 디자인과 상관없이 무조건 따뜻해 보이는 옷을 집어 들었다. 대기업 협력업체 작업복이 대림동을 거쳐 각 지역 공사장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p>
<p>건설업은 대림동을 처음 찾은 이들이 가장 먼저 택하는 업종 중 하나다. 현재 다른 일을 하더라도 정착 초기에 ‘노가다(막일) 경력’이 없는 남성은 찾기 어렵다. 대림동은 이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한다. 저렴한 월세방, 기본적으로 필요한 장비를 파는 매장, 각종 직업소개소가 골목 곳곳에 포진해 있다.<br /><br />건설 인력시장의 영향은 대림동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슈퍼마켓이나 철물점, 열쇠 가게뿐 아니라 동네 세탁소 앞에서도 붉은색 반코팅 장갑을 묶음으로 팔고 있었다. 대림역 8번 출구에서 대림역 9번 출구로 이어지는 길목에는 각종 안전화 매장이 늘어서 있다. 280㎜ 사이즈의 안전화를 구하기 위해 인근 매장 다섯 군데를 넘게 돌았다. 근처 생활용품 매장에서는 현장에 나가는 사람들이 구입하는 대형 백팩을 팔고 있었다. 현장 노동자 대부분은 이 백팩에 작업복과 안전화 따위를 담았다.<br /><br />대림동의 하루는 건설 현장 노동자들이 움직이면서 시작된다. 새벽 4시30분이면 여러 무리의 사람들이 서성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많은 재한 조선족 건설 노동자들이 팀 단위로 움직였다. 건설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재한 조선족 가운데 일부는 ‘팀장(오야지)’이 되어 다른 재한 조선족 인력을 이끈다. <br /><br />팀에 속하지 않고 직업소개소를 통해 일을 구하는 것도 가능하다. 대림역 8번 출구 인근 직업소개소를 돌아보았다. 직업소개소 대부분은 재한 조선족 출신 직업소개사가 일자리를 소개하고 있었다. “처음이신가 보구나. 30대 남성이 할 만한 일이 있긴 한데…. 일단 소개비 12만원을 선납해야 해요.” 그는 경기도 화성에 있는 환풍구 설치 업체를 안내했다. 하루 일당은 10만원, 특근까지 하면 5만원이 추가되는 일자리였다. 소개받는 사람이 하루를 일하든, 1년을 일하든 소개비는 건당 12만원이었다. 당일치기로 일을 구할 수는 없었다. “그러려면 남구로역 용역회사로 가야지. 대림동에서는 주로 지방에서 숙식하는 업종을 취급한다.”<br /><strong><br />“우리도 동남아 출신이나 한족한테 밀린다”</strong><br /><br />대림동 직업소개소가 취급하는 업종은 다양하다. 건설 현장 외에도 시설 정비, 모텔, 사우나, 요양원, 제조업 공장 등 주로 숙식을 제공하는 지방 일자리를 연결해준다. 각 소개소 입구에는 ‘오늘의 일자리’를 알리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지역, 임금, 그리고 일이 가능한 비자 종류를 설명한다. 대림동 직업소개소 일대에는 재한 조선족뿐 아니라 동남아, 중동, 아프리카 출신도 자주 만날 수 있었다.<br /><br />1월18일 새벽 4시, 대림역 8번 출구 앞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도림천을 건넜다. 도림로를 따라 15분 정도 걷다 보면 남구로역 교차로에 도착한다. 넥워머를 걸치고, 커다란 백팩을 멘 남성들이 줄지어 남구로역 인력시장으로 향했다. 하나은행 구로동지점 앞으로 가니 일감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뤘다. 대부분 중국 출신이었다. 남구로역 교차로를 사이에 두고 남구로역 2번과 5번 출구 앞에는 한국인이, 하나은행 코너에는 중국인이 늘어서 있었다.<br /><br />중국인 구역에서 일을 구하려 서성였다. 새벽 5시, 묘하게 긴장감이 흘렀다. 이곳에 모여든 수백명 인파 대부분은 중국어를 사용했다. 재한 조선족 외에 단기 체류 중이거나 불법체류 중인 한족까지 모여 있었다. 한 재한 조선족은 “이쪽에서는 중국어가 가능한 재한 조선족 팀장이 주로 인력을 데려간다”라고 설명했다. 사람을 구하는 팀장들은 조용히 다가와 중국어로 가격을 협상하고 인력을 데려갔다. 누가 일감을 제안하는 사람(팀장)이고, 누가 일감을 찾는 사람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중국어를 못하는 상태에서 일을 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br /><br />길 건너 한국인들은 중국 국적 노동자에 대해 적개심을 감추지 않았다. 한족 출신 중국인 인력이 많아지면서, 임금 협상력이 갈수록 떨어진다는 이유였다. 일부 팀장들이 불법체류 인력을 중개하면서 단가를 낮추고 있다고 주장했다. 합법적인 절차로 일을 구하는 재한 조선족 노동자도 고충을 털어놓았다. “우리도 동남아 국가 출신이나 한족한테 밀린다.”<br /><br />새벽 5시58분이 되자 주변 지역을 청소하던 환경미화원 4명이 일제히 하나은행 앞에 모여 바닥에 버린 종이컵과 담배꽁초를 쓸기 시작했다. 사실상 파장을 알리는 신호였다. 일을 구하지 못한 채 다시 돌아온 대림역 12번 출구에는 하루를 공친 건설 노동자들이 하나둘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p>
<p>※ 더 많은 사진과 영상은 <a href="http://daerim.sisain.co.kr/" target="_blank" rel="nofollow noreferrer noopener">‘대림동 한 달 살기’ 웹페이지(daerim.sisain.co.kr)</a>에서 볼 수 있습니다.</p>
<table class="news_photo_table" width="600" align="center">
<tbody>
<tr>
<td><a href="http://daerim.sisain.co.kr/" target="_blank" rel="nofollow noreferrer noopener"><img src="/data/file/interview/1926105049_4ebaf185_33871_66109_2916.jpg" alt="" width="600" /></a></td>
</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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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class="news_photo_table_caption"> </td>
</tr>
</tbody>
</table>
<br />
<p> </p>
<div>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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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arl_view_copywriter">&lt;저작권자 ⓒ 시사IN (http://www.sisai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gt;</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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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div>]]></description>
<dc:creator></dc:creator>
<category>커뮤니티</category>
<category>구술 프로젝트</category>
<pubDate>Wed, 03 Apr 2019 01:39:11 +0900</pubDate>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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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F4’ 비자를 따기 위해서라면</title>
<link>https://stopcrackdown.net/interview/14</link>
<guid>https://stopcrackdown.net/interview/14</guid>
<description><![CDATA[<div><div class="arl_view_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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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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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019년 현재 재한 조선족(한국계 중국인)은 몇 단계를 거쳐 가장 안정적인 ‘귀화’로 접어든다. 가장 기초적인 단계는 C38(단기 체류)이다. 3년에 한 번씩 방문해 90일 동안 머물 수 있는 방문 비자(90일 복수 비자)다. 3개월간 머물며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기는 쉽지 않다. 친인척이 한국에 있어서 곧바로 재외동포(F4) 자격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방문취업(H2) 비자를 선택한다.<br /><br />2007년에 제정된 방문취업제도는 중국 및 구소련 지역 동포를 위해 도입했다. 이 제도를 통해 H2 비자를 받으면 최대 3년간 체류할 수 있다. 무연고 한국계 중국인, 즉 친족이 한국에 없는 경우에도 합법적이고 안정적인 체류가 가능해졌다는 데 의미가 있다. 방문취업제도 도입 이후 중국 내 조선족 사회에서 한국행이 가속화됐다.</p>
<table class="news_photo_table" width="600" align="center">
<tbody>
<tr>
<td><img src="/data/file/interview/1926105049_65bac45f_33869_65924_5344.jpg" alt="" width="600" /></td>
</tr>
<tr>
<td class="news_photo_table_caption">
<div class="a_credit">ⓒ시사IN 신선영</div>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신분을 확보하고 싶은 조선족들은 갱신만 하면 되는 F4 비자를 따기 위해 노력한다.</td>
</tr>
</tbody>
</table>
<p>H2 비자를 얻더라도 한국 사회에 뿌리 내리기는 어렵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중국에 돌아가서 재입국해야 한다. 좀 더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신분을 확보하고 싶은 이들은 자연스럽게 F4 비자에 눈을 돌린다. F4 비자는 중국으로 돌아갈 필요 없이 갱신만 하면 된다. 단순노무 업종을 제외하면 직업 선택의 자유도 H2 비자에 비해 폭넓게 보장된다. 60세 이상 재외동포는 F4 비자를 획득할 자격이 있는데, 60세 미만 재외동포는 국가 기술자격인 ‘기능사’ 자격증을 따야 F4 비자를 받을 수 있다. 대림동에 거대한 학원시장이 등장한 것은 이 때문이다. 2010년대 들어 F4 비자를 얻는 이들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22~23쪽 인포그래픽 참조). 2016년에는 처음으로 재외동포 비자를 얻은 이들이 방문취업 비자로 체류하는 이들을 추월하기도 했다. 영주권(F5)을 얻거나 귀화를 신청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 이 같은 변화는 재한 조선족의 안정적인 체류가 확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p>
<p> </p>
<p>※ 더 많은 사진과 영상은 <a href="http://daerim.sisain.co.kr/" target="_blank" rel="nofollow noreferrer noopener">‘대림동 한 달 살기’ 웹페이지(daerim.sisain.co.kr)</a>에서 볼 수 있습니다.</p>
<table class="news_photo_table" width="600" align="center">
<tbody>
<tr>
<td><a href="http://daerim.sisain.co.kr/" target="_blank" rel="nofollow noreferrer noopener"><img src="/data/file/interview/1926105049_92c0a802_33869_66107_2745.jpg" alt="" width="600" /></a></td>
</tr>
<tr>
<td class="news_photo_table_caption"> </td>
</tr>
</tbody>
</table>
<br />
<p>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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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reator></dc:creator>
<category>커뮤니티</category>
<category>구술 프로젝트</category>
<pubDate>Wed, 03 Apr 2019 01:38:12 +0900</pubDate>
</item>
/data/file/interview/1926105049_e7efc6f7_33875_65949_0401.jpg<item>
<title>“조선족 커뮤니티는 한국 사회 그 자체”</title>
<link>https://stopcrackdown.net/interview/13</link>
<guid>https://stopcrackdown.net/interview/13</guid>
<description><![CDATA[<div><div class="arl_view_title_box">
<h3 class="arl_view_sub_title">중국 지린성 출신인 박우 한성대 교수는 ‘재한 조선족 커뮤니티’를 10여 년 동안 연구해 박사 논문을 완성했다. 그에게 ‘이주민 출신 연구자의 시선으로 관찰한 대림동’에 대해 들어보았다.</h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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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박우(37) 한성대 교양교직학부 교수는 윤동주 시인의 고향으로 잘 알려진 중국 지린성 룽징(용정) 출신이다. 2005년 한국으로 유학 왔다. 당시 우연한 계기로 서울 가리봉동에서 재한 조선족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자진 출국’ 상담을 돕게 되었다. 그 경험이 박 교수를 재한 조선족 집거지 연구로 이끌었다. 연구 과정에서 재한 조선족 커뮤니티의 중심이 가리봉동에서 대림동으로 옮아가는 걸 목격하기도 했다.</p>
<table class="news_photo_table" width="600" align="center">
<tbody>
<tr>
<td><img src="/data/file/interview/1926105049_e7efc6f7_33875_65949_0401.jpg" alt="" width="600" /></td>
</tr>
<tr>
<td class="news_photo_table_caption">
<div class="a_credit">ⓒ시사IN 신선영</div>
￼박우 교수(사진)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보인 개발주의 광풍이 재한 조선족 사회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고 말한다.</td>
</tr>
</tbody>
</table>
<p>10여 년에 걸친 참여 관찰 연구 끝에 박사 논문 &lt;재한 조선족 집거지 사업가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gt;(서울대 사회학과, 2017)를 완성했다. 같은 재한 조선족이더라도 시민권이 부여된 경로·시기·자격이 각각 달랐고, 이를 바탕으로 개인이 획득하는 ‘기회 구조’도 달랐다. 이는 곧 재한 조선족 분화로 이어졌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보인 개발주의 광풍이 재한 조선족 사회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박 교수는 가리봉동과 대림동 같은 재한 조선족 커뮤니티는 그 자체로 한국 사회를 보여준다고 설명했다.</p>
<p>1월14일 이주민 출신 연구자로 오랜 기간 지역에 밀착해 있었던 박 교수를 만나 ‘연구자의 시선으로 관찰한 대림동’에 대해 물었다.<br /><strong><br />재한 조선족 커뮤니티를 연구하기 시작한 게 2005년이다. 당시에는 가리봉동이 가장 큰 조선족 커뮤니티였다.</strong><br /><br />2005~2006년 법무부가 자진출국제도를 시행했다. 2004년 재외동포법을 개정했고, 2007년 방문취업제도 도입 전까지 일종의 준비 기간이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집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다. 불법체류 신분이라 밖에서 활보하기 어려웠다. 법적 신분이 안정을 찾으면서 사람들이 거리로 나오고, 상권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대림동 얘기가 나온 것도 이즈음(2006년)부터다. 식당 하는 분들도 가리봉동이 포화상태가 되면서 대림동 쪽으로 가야 한다고 얘기하기 시작했다. 가리봉동은 공단 노동자가 거주하기 위한 공간이지만, 대림동은 집도 넓고 상가도 컸다.<br /><br /><strong>재한 조선족 사이에서 중산층이 출현한 것도 그즈음부터인가? </strong><br /><br />양꼬치 식당이 등장하기 시작한 게 2005~2006년이다. 처음에는 공사장에서 일하고, 그러다 돈을 모아 가게를 여는 식으로 자본을 축적했다. 결국 지역에서 여러 목소리를 내는 건 사장들이다. 커뮤니티 안에서 이른바 중국동포들의 권익을 위해 목소리 내는 사람 중에 노동자가 없었다. 자영업을 하는 ‘프티부르주아지’가 지역 담론을 대변하고 대표하는 모습이 포착됐다.<br /><br /><strong>재한 조선족 사이에서 ‘불평등’ 문제는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나?</strong><br /><br />재외동포법 개정 이후 방문취업제도가 실시되면서 사람마다 기회 구조가 달라졌다. 국가가 비자 체계를 통해 일종의 ‘위계적 시민권’을 부여했다. 국가도 나름 이유가 있었다. 다양한 국민의 목소리를 반영해야 하기 때문이다. 공동체를 위해 얼마나 공헌했는지 따져보고 시민권을 준 셈이다. 일종의 ‘공헌적 권리’다. <br /><br /><strong>각 이주민의 공헌도를 판단하는 건 결국 국가라는 이야기인가?</strong><br /><br />그렇다. 그런데 공헌도를 판단하는 근거가 굉장히 개발주의적이다. 학력이 높거나 자본이 많으면 대한민국 국민에 가까운 권리를 주고, 그것도 안 된다면 신체라도 건강해야 한다. 그래야 산업노동력으로서 권한을 주는 거다.<br /><br /><strong>그렇게 얻은 ‘기회’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랐나?</strong><br /><br />예를 들어 재외동포(F4) 비자는 국민에 준하는 권리를 갖는다. 선거권·피선거권을 빼면 경제적 권리는 누릴 수 있다. 반면 방문취업(H2) 비자는 일종의 ‘동포 노동자’ 권리다. 비자가 끝나면 다시 나갔다가 들어와야 한다. F4는 전문직도 할 수 있고, 자본 소유도 가능하니까 여기서 쭉 살 수 있다. H2나 단기체류(C3) 비자는 동산 소유가 안 된다. 이 차이로 인해 F4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자본가가 출현했다. 안 그래도 인적자본과 사회자본이 다 다른데, 국가가 추가로 자격을 매겨준다. 여기서 분화가 촉발됐다. 한국 사회의 불평등 메커니즘과 닮았다.<br /><br /><strong>중산층만 되어도 다들 자신의 성공에 자부심을 가지더라.</strong><br /><br />개발주의적인 사고가 잘 드러나는 모습이다. 연구를 위해 인터뷰하다 보면 다 본인이 힘들었던 얘기를 한다. 1960~1970년대 한국인이 고도성장 과정에서 분투했던 모습이 보인다. (그런 자부심을 갖게 된 것 자체가) 이들이 한국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을 보여준다.<br /><br /><strong>성공한 이들이 한국 주류 사회로부터 인정받고자 경쟁하는 모습도 보았다.</strong><br /><br />메인스트림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크다. 여기에서도 개발주의적 마인드가 드러나는 게, 일부 중산층들은 “내가 가방끈이 짧다”라면서 몸을 사린다. 상을 받거나, 공적인 자리에 서야 하면 언어 구사가 서투르니까 선뜻 나서지 못하는 분들도 있다. 단체끼리 경쟁하는 경우도 있는데, 오히려 경쟁 때문에 단체들이 건강해지는 면도 있다. ‘우리는 정관이 있다’ ‘회원이 얼마다’ ‘우린 이사회 연다’ ‘우린 감사도 있다’는 식으로, 시스템을 근거로 서로 우위를 점하려 한다.</p>
<table class="news_photo_table" width="600" align="center">
<tbody>
<tr>
<td><img src="/data/file/interview/1926105049_48e6d4b3_33875_65950_0437.jpg" alt="" width="600" /></td>
</tr>
<tr>
<td class="news_photo_table_caption">
<div class="a_credit">ⓒ시사IN 김동인</div>
2010년대 들어 다양한 조선족 단체가 설립되었다.<br />위는 재한 조선족 사회의 큰 단체 중 하나인 CK여성위원회의 2018년 송년회 모습.</td>
</tr>
</tbody>
</table>
<p><strong>그런 민주주의 시스템을 이들은 중국에서 배워본 적이 없잖나.</strong></p>
<p>10년 넘게 대림동에서 지내며 그런 민주적인 가치를 뒤늦게 체득한 것이다.<br /><br /><strong>민주주의를 체득한다는 점도 흥미롭다. 살아온 체제와 문화가 달라서 충돌하는 문제도 있을 것 같다.</strong><br /><br />쓰레기 분리수거 문제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국가가 모든 영역에 개입해서 관리했다. 처음 한국에 온 사람들은 애초에 분리수거라는 걸 몰랐다. 중국에서는 쓰레기를 버릴 때 ‘위생비’를 납부하면 관리자(국가)가 알아서 한다. ‘거버넌스’도 한국에서는 ‘협치’로 번역하지만 중국에서는 ‘치리(治理)’라고 부른다. 위에서 아래로 지시하는 방식이다. 이를테면 사람이 지나가면 차가 양보를 하잖나. 이걸 최근 중국에서는 CCTV로 찍어서 벌금을 때리는 식으로 강제로 질서를 만든다. 치리의 대표적인 사례다.<br /><strong><br />다른 갈등도 비슷한 맥락인가?</strong><br /><br />내가 보기엔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의 차이다. ‘개인주의에 대한 상상의 차이’가 있다. 개인주의라는 게 내가 잘되기 위해 너도 잘되어야 한다는 이해와 같다. 중국에서는 개인주의 없이 집단주의 체제에서 살았고, 내가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다. 쓰레기 분리수거 말고도 고성방가 문제라든가, 흡연 문제도 마찬가지다.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이 정도고 하면 안 되는 행동은 이 정도다’라고 선을 그었을 때 한국인의 기준과 충돌하는 것이다.<br /><br /><strong>상대적으로 노동자층에서 불평등에 대한 불만이 제기됐을 것 같은데.</strong><br /><br />파편적으로는 있지만 집단화되기는 어렵다. 대형 공장을 중심으로 한 동네에 계속 산다면 노동조합이라도 만들겠지만, 이 동네에서는 비정규직으로 계속 옮겨 다녀야 하니까 세력화가 어렵다. 동네에 대해 얘기하고 동네 이미지에 민감한 건 결국 상인들이다. 상인은 지역 주민 아이덴티티가 강하지만, 일용직 노동자에게 대림동은 어차피 떠날 곳이다. 중국으로 간다는 게 아니라, 한국 내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일한다는 뜻이다.<br /><br /><strong>대림동에 한족 출신 중국인이 늘고 있다. 언젠가는 대림동이 이들로 대체될 것이라는 예상도 있다.</strong><br /><br />쉽지 않다. 한족 출신 중국인은 법적 지위를 획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재한 조선족은 예외적으로 법적 지위를 얻었다. 한국의 ‘동포적 세계화’ 덕분이다. 자본이 해외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그 지역 교민과 동포가 미들맨 구실을 했다. 재외동포법도 처음에는 재미교포와 유럽 지역 교민을 위한 것이었다(1999년 제정 당시 중국동포는 해당되지 않음). 그래서 초반에는 중국이나 구소련 동포에게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다. 정치 환경이 그랬으니까. 그런 게 풀리면서 중국동포라는 일종의 혈통적·법적 카테고리가 출현한 것이다.<br /><br /><strong>사실 ‘조선족’이라는 경계는 한국에 오는 순간 무의미해진다. 귀화하면 동포라는 흔적도 사라진다. 조선족은 시간이 지나면 결국 사라지는 개념인가?</strong><br /><br />한국에서는 사라지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점진적으로 귀화도 더 확대될 것이다. 다만 중국에서는 이미 그 자체가 일종의 ‘시티즌십’이다. 한국에 80만명이 와 있다고 하지만, 동북 지역에 여전히 80만~90만명, 중국 내 대도시에 10만명 정도 분산되어 유지되지 않을까. 지금 동북3성도 농촌 지역은 다 비었다. 대도시에서 클러스터화된다. 조선족 공동체가 붕괴된다며 우려하는 이들도 있는데, 오히려 도시에 모여 살면서 교육 기회가 늘었다는 장점도 있다. 이런 도시 집중 현상은 중국동포뿐 아니라 중국 전역이 겪는 문제다.<br /><br /><strong>일각에서는 아예 대림동을 차이나타운으로 관광 상품화하자는 의견도 있다.</strong><br /><br />상권에 영향을 받는 사람과 실제로 거주하며 사는 사람들 사이에 이해가 충돌한다. 대림동에는 이미 한국화된 중국동포가 많다. 그래서 오히려 ‘중국동포타운’ 같은 걸 조성하려는 움직임을 싫어한다. ‘차이나타운으로 개발하고 정비하자’는 것도 너무나 한국적인, 개발주의적 마인드다. 1990년대 한국식 지역 개발과 닮았다. 대림동에는 한국화를 넘어서 서울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많다. 아이들한테 중국 지역 사투리 대신 표준말을 쓰게 하려고 노력한다. 흔히 ‘초국적 이주’라고 하지만, 어떻게 보면 (대림동 이주는) ‘초국적 상경’이라고 볼 수 있다.</p>
<p>※ 더 많은 사진과 영상은 <a href="http://daerim.sisain.co.kr/" target="_blank" rel="nofollow noreferrer noopener">‘대림동 한 달 살기’ 웹페이지(daerim.sisain.co.kr)</a>에서 볼 수 있습니다.</p>
<div>
<table class="news_photo_table" width="600" align="center">
<tbody>
<tr>
<td><a href="http://daerim.sisain.co.kr/" target="_blank" rel="nofollow noreferrer noopener"><img src="/data/file/interview/1926105049_f7c779f1_33875_66111_3232.jpg" alt="" width="600" /></a></td>
</tr>
<tr>
<td class="news_photo_table_caption"> </td>
</tr>
</tbody>
</table>
</div>
<p>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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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area_import_notice"> </div>
<div class="clear_both"> </div>
<div class="arl_view_copywriter">&lt;저작권자 ⓒ 시사IN (http://www.sisai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gt;</div>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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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class="arl_view_writer"><span class="arl_view_hosu"><br /></span></span></div></div>]]></description>
<dc:creator></dc:creator>
<category>커뮤니티</category>
<category>구술 프로젝트</category>
<pubDate>Wed, 03 Apr 2019 01:37:19 +0900</pubDate>
</item>
/data/file/interview/1926105049_f63bb891_33874_65942_0309.jpg<item>
<title>양꼬치 성지엔 프랜차이즈가 없다</title>
<link>https://stopcrackdown.net/interview/12</link>
<guid>https://stopcrackdown.net/interview/12</guid>
<description><![CDATA[<div><div class="arl_view_title_box">
<h1 class="arl_view_title">음식점 데이터로 들여다본 대림동은 더욱 흥미롭다. 서울 다른 지역과 달리 대림역 주변에는 프랜차이즈 밀집지가 보이지 않는다. 외국인이 운영하는 음식점 수도 압도적으로 많다.</h1>
</div>
<div class="arl_view_writer_box"><span class="arl_view_writer">신수현 (도시데이터 분석가) <a class="arl_view_email" href="mailto:webmaster@sisain.co.kr?subject=%EC%96%91%EA%BC%AC%EC%B9%98%20%EC%84%B1%EC%A7%80%EC%97%94%20%ED%94%84%EB%9E%9C%EC%B0%A8%EC%9D%B4%EC%A6%88%EA%B0%80%20%EC%97%86%EB%8B%A4">webmaster@sisain.co.kr </a> <span class="arl_view_date">2019년 02월 08일 금요일 </span><span class="arl_view_hosu">제594호</span></span></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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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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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대림동’이라는 지명을 들으면 어떤 게 떠오르는가? 꽤 많은 이들은 조선족 혹은 중국 사람이 생각날 것 같다. 또 누군가는 지하철 7호선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는 긴 에스컬레이터를, 그 길을 올라갈 때 바깥으로 얼핏 보이는 원색의 직업소개소 간판을 떠올리지 않을까. 그런데 대림동을 음식으로 기억하는 이들도 많다. 양꼬치와 칭다오(맥주)에서 마라탕이나 훠궈까지. 그래서 음식점 관련 데이터로 대림동을 들여다보았다.<br /><br />서울에서 운영 중인 음식점은 15만 개를 약간 넘는다(2019년 1월 기준). 이 중 프랜차이즈가 차지하는 비율은 얼마나 될까? ‘공정거래위원회 가맹사업시스템에 등록된 영업표지(브랜드)가 상호에 포함된 음식점’ 개수는 1만 개 정도로, 전체의 6%를 약간 넘는 수준이다. 음식점 15개 중 1개가 프랜차이즈 음식점인 셈이다.<br /><br />프랜차이즈는 브랜드 규모나 정체성에 따라 나름의 출점 전략을 가지고 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프랜차이즈는 일반적으로 유동인구와 주변 사업체, 거주 인구 규모를 따진다. 대림역 주변 사업체 분포와 스타벅스 입지를 한번 살펴보자(아래 &lt;그림 1&gt; 참조). 대개 진한 색으로 표시된 사업체 밀집지역에는 스타벅스가 촘촘히 들어서 있고, 거주지 인근에도 드물지 않게 들어가 있다. 대림역 주변의 다른 지하철역 주위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대림역 주변에는? 없다.</p>
<table class="news_photo_table" width="600" align="center">
<tbody>
<tr>
<td><span class="big_size_img"><img src="/data/file/interview/1926105049_f63bb891_33874_65942_0309.jpg" alt="" width="600" /></span></td>
</tr>
<tr>
<td class="news_photo_table_caption"> </td>
</tr>
</tbody>
</table>
<p>서울에 존재하는 프랜차이즈 음식점 지도를 그려보면, 자연스럽게 유동인구가 집중된 주요 지하철역 주변에 프랜차이즈 밀집지가 나타난다(아래 &lt;그림 2&gt; 참조). 대림역 주변에는 밀집지가 보이지 않는다. 서울 서남부를 거점으로 출퇴근하는 사람에게 “대림역에 사람이 없느냐”라고 묻는다면 코웃음을 칠 게 뻔할 정도로 꽤 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지역이다. 그런데도 프랜차이즈 밀집지가 형성되지 않았다. 기존 음식점 밀도지도와 비교하면 그 차이가 더 뚜렷하다. 음식점 밀집지는 존재한다. 상권의 크기만으로 따지면 홍대 앞이나 종로, 강남까지는 아니지만 분명 사당이나 수유, 불광 정도는 된다. 음식점은 있는데 프랜차이즈가 보이질 않는다. </p>
<p> </p>
<table class="news_photo_table" width="600" align="center">
<tbody>
<tr>
<td><span class="big_size_img"><img src="/data/file/interview/1926105049_6a4b4c98_33874_65947_0326.jpg" alt="" width="600" /></span></td>
</tr>
<tr>
<td class="news_photo_table_caption"> </td>
</tr>
</tbody>
</table>
<p>신규로 프랜차이즈를 내려는 사람들은 자기가 잘 모르는 동네에 가게를 내려고 하지 않는다. 음식점의 경우 더 그렇다. 대림동을 이미 일반적이지 않은 곳, 낯선 곳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결과적으로 대림동은 프랜차이즈가 쉽게 들어오지 않는, 혹은 들어오지 못하는 동네가 되었다.<br /><br /><strong>대림동은 서울의 다양성에 기여</strong><br /><br />서울시 열린데이터광장에 공개된 음식점 데이터에는 업장 대표의 내·외국인 여부와 국적이 등록되어 있다. 15만 개에 이르는 음식점 중 외국 국적 거주민이 대표로 등록된 업체 수는 약 1800개로 전체의 1%를 조금 넘는다. 이를 국적별로 다시 나눠보면 중국이 68%로 가장 높고, 미국·캐나다가 13%, 타이완·일본이 각 4% 정도를 차지한다. 그 1%의 음식점들은 어디에 몰려 있을까? 지도를 통해 밀집도를 살펴보면, 한눈에 그 결과를 알 수 있다. <br /><br />아래 &lt;그림 3&gt;에서 왼쪽은 서울 전체 음식점 밀집지역이다. 진하게 표시된 밀집지역은 종로-명동, 합정-홍대-신촌, 강남대로-테헤란로 등 대표적인 번화가(&lt;그림 1&gt; 왼쪽과는 또 다르다)와 각 지역의 중심지를 포괄한다. &lt;그림 3&gt;에서 오른쪽 지도는, 그중 외국인이 대표자인 음식점들만을 골라 밀집한 지역을 표시했다. 건대입구역 부근에 약간의 밀집지역이 보이지만, 압도적으로 밀집을 보이는 지역은 대림역 일대, 딱 한 곳이다.</p>
<table class="news_photo_table" width="600" align="center">
<tbody>
<tr>
<td><span class="big_size_img"><img src="/data/file/interview/1926105049_39f61529_33874_65948_0338.jpg" alt="" width="600" /></span></td>
</tr>
<tr>
<td class="news_photo_table_caption"> </td>
</tr>
</tbody>
</table>
<p>도시정책에서 ‘다양성’ 이라는 가치가 등장한 지 꽤 오래되었지만, 그 다양성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나는지, 또 그것을 어떻게 확보하고 이용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도시 전체의 스케일로 보면 대림동은 이미 서울의 다양성에 기여하는 공간이다. 외국인(중국인)이 운영하는 유일한 클러스터가 서울의 반경 안에, 그것도 수도권 전철역 중 상위 10% 수준의 승하차 인구를 가진 지역에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공간은 충분히 잠재성이 있다.</p>
<p>※ 더 많은 사진과 영상은 <a href="http://daerim.sisain.co.kr/" target="_blank" rel="nofollow noreferrer noopener">‘대림동 한 달 살기’ 웹페이지(daerim.sisain.co.kr)</a>에서 볼 수 있습니다.</p>
<table class="news_photo_table" width="600" align="center">
<tbody>
<tr>
<td><a href="http://daerim.sisain.co.kr/" target="_blank" rel="nofollow noreferrer noopener"><img src="/data/file/interview/1926105049_f83711d9_33874_66110_3012.jpg" alt="" width="600" /></a></td>
</tr>
<tr>
<td class="news_photo_table_caption"> </td>
</tr>
</tbody>
</table>
<br />
<p>  </p>
</div>
<div class="arl_view_copywriter">&lt;저작권자 ⓒ 시사IN (http://www.sisai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gt;</div>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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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reator></dc:creator>
<category>커뮤니티</category>
<category>구술 프로젝트</category>
<pubDate>Wed, 03 Apr 2019 01:35:54 +0900</pubDate>
</item>
/data/file/interview/1926105049_73212c81_33868_65923_5309.jpg<item>
<title>조선족 이주민들은 왜 대림동으로 옮겼을까</title>
<link>https://stopcrackdown.net/interview/11</link>
<guid>https://stopcrackdown.net/interview/11</gu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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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l>
</div>
<div>
<table class="news_photo_table" width="400" align="left">
<tbody>
<tr>
<td><img src="/data/file/interview/1926105049_73212c81_33868_65923_5309.jpg" alt="" width="400" /></td>
</tr>
<tr>
<td class="news_photo_table_caption">
<div class="a_credit">ⓒ시사IN 신선영</div>
중국인들이 많이 사는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의 ‘벌집’ 주택.</td>
</tr>
</tbody>
</table>
<div> </div>
<p>1978년부터 시작된 중국 정부의 개혁개방 정책은 상하이·칭다오 등 연해 지역의 성장을 이끌었지만 전통적 중공업 지역이던 동북3성(헤이룽장성·지린성·랴오닝성)은 오히려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이 지역에 모여 살던 중국 조선족은 1990년대 중국 내 연해 지역이나 대도시 외에도 한국·일본·미국·영국 등으로 일자리를 찾아 움직였다.<br /><br />1990년대에는 이들이 한국에 장기 체류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제한적이었다. 체류 기한을 넘긴 채 한국에 불법체류자로 남는 이들이 늘었다. 이들 중 상당수가 1970~1980년대 구로공단 노동자들이 살던 ‘가리봉동 벌집’(1인용 방이 벌집처럼 배치되어 있고 공용화장실을 이용하는 구조)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한국 저임금 노동자의 열악한 주거 환경은 그대로 중국 저임금 노동자의 초기 정착 터전이 되었다. 마침 가리봉동은 남구로역 근처의 인력시장과 가까웠고 영세 소기업과 각종 인력사무소가 모여 있었다.<br /><br />음지에 있던 조선족 이주민들은 2004년 재외동포법 개정, 2007년 방문취업제도 시행을 통해 양지로 나올 수 있었다. 합법적이고 안정적인 거주가 가능하게 되면서 좀 더 나은 주거 환경에 대한 요구가 뒤따랐다. 마침 2003년 가리봉동 일대가 균형발전촉진지구로 지정되면서 세입자였던 이주민들이 주거 안정을 위협받기 시작했다. 방문취업제도 시행 이후 한국을 찾는 조선족 수도 급격히 증가했다. 신분 보장, 인구 증가, 상권 확대, 재개발 이슈가 결합하면서 재한 조선족 커뮤니티는 인근 대림동으로 재편되기 시작했다.</p>
<p> </p>
<p>※ 더 많은 사진과 영상은 <a href="http://daerim.sisain.co.kr/" target="_blank" rel="nofollow noreferrer noopener">‘대림동 한 달 살기’ 웹페이지(daerim.sisain.co.kr)</a>에서 볼 수 있습니다.</p>
<p> </p>
<table class="news_photo_table" width="600" align="center">
<tbody>
<tr>
<td><a href="http://daerim.sisain.co.kr/" target="_blank" rel="nofollow noreferrer noopener"><img src="/data/file/interview/1926105049_ea319ca3_33868_66106_2657.jpg" alt="" width="600" /></a></td>
</tr>
<tr>
<td class="news_photo_table_caption"> </td>
</tr>
</tbody>
</table>
<br />
<p> </p>
</div>
<div class="area_import_notice"> </div>
<div class="clear_both"> </div>
<div class="arl_view_copywriter">&lt;저작권자 ⓒ 시사IN (http://www.sisai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gt;</div>
</div>
<div class="arl_view_other_writers"><a class="avw_a" href="https://www.sisain.co.kr/?mod=news&amp;act=articleList&amp;sc_area=I&amp;sc_word=astoria" rel="nofollow">글 김동인 기자·사진 신선영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a></div></div>]]></description>
<dc:creator></dc:creator>
<category>커뮤니티</category>
<category>구술 프로젝트</category>
<pubDate>Wed, 03 Apr 2019 01:33:58 +0900</pubDate>
</item>
/data/file/interview/1926105049_8b0b2e39_33866_65911_4618.jpg<item>
<title>대림동 고시원에서 보낸 ‘서른 번의 밤’</title>
<link>https://stopcrackdown.net/interview/10</link>
<guid>https://stopcrackdown.net/interview/10</guid>
<description><![CDATA[<div><div class="arl_view_title_box">
<h3 class="arl_view_sub_title">재한 조선족은 왜 대림동에 모였을까. 우리는 그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대림동 한 달 살기’는 이런 질문에서 출발했다. 대림동은 그들이 한국 사회에 뿌리내리는 과정이자 결과였다. 우리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었다.</h3>
</div>
<div class="arl_view_writer_box"><span class="arl_view_writer"><span class="arl_view_writer">글 김동인 기자·사진 신선영 기자 <a class="arl_view_email" href="mailto:astoria@sisain.co.kr?subject=%EB%8C%80%EB%A6%BC%EB%8F%99%20%EA%B3%A0%EC%8B%9C%EC%9B%90%EC%97%90%EC%84%9C%20%EB%B3%B4%EB%82%B8%20%E2%80%98%EC%84%9C%EB%A5%B8%20%EB%B2%88%EC%9D%98%20%EB%B0%A4%E2%80%99">astoria@sisain.co.kr </a> <span class="arl_view_date">2019년 02월 08일 금요일 </span><span class="arl_view_hosu">제594호<br /><br /></span></span></span>
<div class="arl_view_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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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l>
</div>
<div>
<h1 class="arl_view_title">우리가 몰랐던 세계를 만나다</h1>
<div> </div>
<p> </p>
<p>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상점 간판에는 중화요리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각(閣)·루(樓)·원(園)·옥(屋) 같은 으리으리한 단어가 없다. 그저 점(店)이나 관(館) 따위 이름이 붙은 ‘작은 가게’뿐이다. LED 장식이 가로등 대신 길거리를 비추고, 향신료 냄새와 여기저기 울려 퍼지는 중국어가 후각과 청각을 마비시킨다. 중국 소도시 하나를 통째 옮겨놓은 듯 날것 그대로다.<br /><br />서울 지하철 2·7호선이 만나는 대림동은 약 20년간 꾸준히 내국인 인구가 감소해온 지역이다. 2000년 2만4254명이 살던 대림2동은 2018년 1만2758명으로 절반 가까이 줄었다. 떠난 자리는 이주민이 채웠다. 2000년 89명에 불과하던 대림2동 상주 외국인은 2018년 9240명으로 늘었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외국인은 이보다 많다. 반드시 이곳에 살지 않더라도, 대림동은 중국 출신 이주민에게 일종의 ‘관문’으로 기능한다. 장을 볼 때에도, 스마트폰을 개통할 때에도, 고향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라도 들러야 하는 ‘배후지’다.<br /><br />&lt;시사IN&gt;은 지난해 12월2일부터 올 1월2일까지 한 달간 이곳에서 대림동을 들여다보았다. 기자는 대림2동 대림중앙시장 인근 작은 고시원에서 서른 번의 밤을 보내며 원주민과 이주민, 정착민과 임시 거주민을 만났다. 통계와 법률로는 포착되지 않는 경계에 놓인 삶을 마주했다. 조화와 갈등이 복잡하게 반복되는 이곳에서도 생은 계속되고 있다.</p>
<p> </p>
<table class="news_photo_table" width="600" align="center">
<tbody>
<tr>
<td><img src="/data/file/interview/1926105049_8b0b2e39_33866_65911_4618.jpg" alt="" width="600" /></td>
</tr>
<tr>
<td class="news_photo_table_caption"> </td>
</tr>
</tbody>
</table>
<table class="news_photo_table" width="600" align="center">
<tbody>
<tr>
<td><img src="/data/file/interview/1926105049_77656648_33866_65912_4618.jpg" alt="" width="600" /></td>
</tr>
<tr>
<td class="news_photo_table_caption">
<div class="a_credit">ⓒ시사IN 신선영</div>
1월18일 금요일 저녁 조선족들이 약속 장소로 가장 많이 이용하는 대림역 12번 출구 모습.</td>
</tr>
</tbody>
</table>
<table class="news_photo_table" width="600" align="center">
<tbody>
<tr>
<td><img src="/data/file/interview/1926105049_fb139263_33866_65913_4619.jpg" alt="" width="600" /></td>
</tr>
<tr>
<td class="news_photo_table_caption">
<div class="a_credit">ⓒ시사IN 신선영</div>
새벽에 남구로역 교차로에 모였던 조선족 노동자들이 봉고차에 타고 일터로 이동하고 있다.</td>
</tr>
</tbody>
</table>
<table class="news_photo_table" width="600" align="center">
<tbody>
<tr>
<td><img src="/data/file/interview/1926105049_39062cf7_33866_65914_4619.jpg" alt="" width="600" /></td>
</tr>
<tr>
<td class="news_photo_table_caption">
<div class="a_credit">ⓒ시사IN 신선영</div>
대림2동 한 음식점 종업원이 가게 앞에서 전화를 받고 있다.<br /><br /></td>
</tr>
</tbody>
</table>
<p> </p>
<p> </p>
<h1 class="arl_view_title">대림동 고시원에서 보낸 ‘서른 번의 밤’</h1>
<p> </p>
<p> </p>
<p>몸을 뒤척일 때마다 책상 모서리에 무릎을 찧었다. 월 38만원짜리 고시원 침대에 누우려면 다리를 책상 아래로 집어넣어야 했다. 네댓 번 잠을 설치고 나면 겨우 아침이 왔다. 이불 밖으로 얼굴을 내밀면 냉기에 콧등이 시큰했다. 2018년 12월, 5㎡(1.5평) 남짓한 크기의 고시원에서 서른 번의 밤을 보냈다.<br /><br />고시원이 위치한 상가 건물은 서울시 영등포구 도림로 38길 끄트머리에 있다.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이른바 ‘대림동 메인 스트리트’라 불리는 대림중앙시장 길 한가운데다. 고시원 투숙객 열에 아홉 사람의 모국어는 중국어였다. 방은 12개이지만, 화장실은 하나뿐이었다. 주말이면 지하 1층 가라오케에서 2층 방까지 노랫소리가 흘러 들어왔다.</p>
<table class="news_photo_table" width="600" align="center">
<tbody>
<tr>
<td><img src="/data/file/interview/1926105049_ae7fdf8e_33867_65915_4741.jpg" alt="" width="600" /></td>
</tr>
<tr>
<td class="news_photo_table_caption">
<div class="a_credit">ⓒ시사IN 신선영</div>
지난해 12월7일 드론으로 촬영한 대림동 일대 저녁 풍경.</td>
</tr>
</tbody>
</table>
<p>법정동 기준 서울시 영등포구 대림동, 행정동 기준 대림1·2·3동은 2017년 8월 영화 &lt;청년경찰&gt;의 개봉과 흥행으로 새삼 주목받았다. 영화에서 대림동은 가출 청소년을 납치해 난소를 적출하는 일당의 근거지로 묘사됐다. 영화 속 택시 기사는 “여기 조선족들만 사는데 여권 없는 중국인도 많아서 밤에 칼부림이 자주 나요. 경찰도 잘 안 들어와요. 웬만하면 밤에 다니지 마세요”라는 대사를 한다. 대림동에 거주하는 재한 조선족(중국동포, 한국계 중국인 등을 통칭) 커뮤니티는 공동대책위원회를 꾸려 제작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2018년 11월8일 1심 재판부는 “개인이 아닌 전체를 혐오 집단으로 묘사했다고 보기 어렵다”라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p>
<p>2018년 10월2일 &lt;동아일보&gt;는 ‘서울 초교 첫 全(전) 신입생 다문화 학생’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대림2동에 위치한 대동초등학교 2018년도 신입생 전원이 다문화가정 자녀라는 내용이었다. 오보였다. &lt;동아일보&gt;는 “1학년 70명 중 54명이 다문화가정 자녀”라고 기사 내용을 수정했다. 초등학생이라는 ‘다음 세대’가 부각되며 대림동이 다시 주목받았다. 대림동 내 재한 조선족 커뮤니티의 확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br /><br />재한 조선족은 왜 하필 대림동에 모이기 시작했을까? 동네는 얼마나 어떻게 변했고, 그곳에서 사는 삶은 또 어떨까? 대림동은 정말 위험할까? 우리는 재한 조선족에 대해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을까? 지난해 12월2일 시작된 ‘대림동 한 달 살기’는 이런 질문에서 출발했다.<br /><br />적응이 쉽지는 않았다. 낯선 것들로 가득했다. 이동통신 매장은 위챗(중국 메신저 앱) 아이콘을 붙여두고, 식당 입구에는 틱톡(TikTok:중국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동영상 기반 소셜 미디어) 아이디가 적혀 있다. 상점에서 취급하는 물건도, 식당에서 주문할 수 있는 음식도 달랐다. 목 좋은 곳에는 빠짐없이 여행사·행정사·환전소·이동통신 매장이 빼곡히 들어섰고 간판은 대개 중국어 간체로 적혀 있었다.<br /><br /></p>
<table class="news_photo_table" width="400" align="left">
<tbody>
<tr>
<td><img src="/data/file/interview/1926105049_59a1f6f1_33867_65916_4813.jpg" alt="" width="400" /></td>
</tr>
<tr>
<td class="news_photo_table_caption">
<div class="a_credit">ⓒ시사IN 신선영</div>
건물 옥상에서 내려다본 대림2동 풍경.<br />대림중앙시장 거리에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다.</td>
</tr>
</tbody>
</table>
<p><strong>내국인은 이탈하고, 외국인은 느는 곳 </strong><br /><br />대림동은 의외로 작고 생각보다 복잡했다. 대림1·2·3동도 각각 다르다. 대림1동은 최근 아파트 재건축이 진행 중인 ‘안쪽 동네’다. 지하철 7호선 신풍역과 대림역 사이에 있어서 상가보다는 주거지가 많다. 대림역을 기준으로 북쪽에 위치한 대림3동은 상대적으로 ‘젊은 동네’다. 길과 골목이 비교적 정방형으로 구획되어 있고, 아파트와 빌라가 어우러진 평범한 서울 동네에 가깝다. 거주 인구도 가장 많다.<br /><br />반면 대림2동은 미로처럼 뒤엉킨 옛 골목을 유지하고 있다. 주거 환경만 놓고 볼 때 대림2동은 이 지역에서 가장 낙후됐다. 집은 낡았고, 길목은 좁으며, 주차할 곳을 찾기 어렵다. 하지만 대림중앙시장을 중심으로 전통적인 상권이 활성화되었고, 지하철 2·7호선 대림역과 2호선 구로디지털단지역이 인접해 있어서 대중교통 이용이 편리하다. 서울 전역에서 모여들기 쉬운 동네이자, 서울 어디든 이동하기 편리한 동네다. 대림동에서도 가장 많은 외국인이 거주하는 곳이다. 언론에서 흔히 말하는 ‘대림동’은 대림2동인 경우가 대부분이다.<br /><br />재한 조선족은 얼마나 많이, 언제부터 이곳에 모여들기 시작했을까. 서울시에서 발표한 ‘등록인구 통계’를 통해 이주의 흐름을 짐작해볼 수 있다(아래 그래프 참조). 2000년 대림동 전체(대림 1·2·3동 합계) 인구는 총 8만2139명, 이 가운데 등록 외국인은 299명이었다. 대림2동만 놓고 봐도 내국인은 2만4254명이었지만 외국인은 89명뿐이었다. 상황은 2003년부터 2006년 사이에 급격히 변했다. 2003년 1378명이었던 대림2동 등록 외국인 수는 2006년 5073명으로 3배 이상 급증했다. 이후에도 2007년 6408명, 2008년 8167명으로 꾸준히 증가한 대림2동 등록 외국인은 2018년까지 10년간 8000~1만명을 유지하고 있다.</p>
<p> </p>
<table class="news_photo_table" width="600" align="center">
<tbody>
<tr>
<td><span class="big_size_img"><img src="/data/file/interview/1926105049_35cf642b_33867_66052_1629.png" alt="" width="600" /></span></td>
</tr>
<tr>
<td class="news_photo_table_caption"> </td>
</tr>
</tbody>
</table>
<br />
<p> </p>
<p> </p>
<table class="news_photo_table" width="600" align="center">
<tbody>
<tr>
<td><span class="big_size_img"><img src="/data/file/interview/1926105049_bd765e2e_33867_66053_1648.png" alt="" width="600" /></span></td>
</tr>
<tr>
<td class="news_photo_table_caption"> </td>
</tr>
</tbody>
</table>
<br />
<p> </p>
<p>통계에 잡히지 않는 단기 체류자를 고려하면 실제 대림동 거주 외국인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림동이 중국에서 온 이주민들에게 일종의 ‘관문(Portal)’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거주 중인 등록 외국인 수가 통계상 10년 동안 정체되어 있다고 해서 ‘2008년 이후 대림동 외국인 인구는 그대로다’라고 단정 짓기 어렵다. 오히려 이 통계에서 눈여겨볼 지점은 내국인의 이탈이다. 2000년 2만4254명이던 대림2동 내국인 인구는, 2018년 1만2758명으로 반 토막 났다. 최근 7년 사이 5200여 명이 감소했다. 내국인은 이탈하고 외국인은 늘고 있다.</p>
<p><br />왜 하필 대림동이었을까. 재한 조선족 주민 다수는 “가리봉보다 살 만해서”라는 이유를 첫 번째로 꼽았다. 대림동 이주는 2000년대 중반 본격화된다. 반지하 월세방일지언정 가리봉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거 환경이 쾌적했다. 지하철 7호선 남구로역 인력시장과도 멀지 않았다. 여성들의 경우 강남 지역 식당을 오가기에 2호선이 다니는 대림동은 최적의 위치였다.<br /><br />대림동의 독특한 부동산 구조도 한몫했다. 특히 재한 조선족의 이주가 집중적으로 이뤄진 대림2동은 아파트를 찾기 어려운 동네다. 과거 논밭이었던 이곳은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 사이 다가구주택 밀집지역으로 변신했다. 대림2동 대다수 주택은 당시 유행했던 건축 구조를 따르고 있다. 2층 독채에는 주인집이 살고 있고, 1층은 둘로 나누어 전세를 놓는다. 지층은 공간을 3~4개로 나누어 월세를 놓는 식이다. 여기에 옥탑방이 추가되면서 8가구 정도가 함께 사는 공동주거 공간이 완성된다. 주민들은 이런 집을 ‘대림2동 표준형 주택’이라고 불렀다.<br /><br />재한 조선족들이 몰리면서 상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시작은 먹거리였다. 식재료 상점부터 연회가 가능한 대형 음식점(대주점)이 2000년대 들어 등장했다. “그때 시장 인근에 ‘전화방’이 많았어요. 길거리에 아예 전화기를 내놓고 영업하는 곳도 있었죠.” 대림동에서 20년 넘게 거주한 내국인 고안수씨(49)의 말이다. 가족과 멀리 떨어져 지내는 사람들에게 대림동은 필요한 모든 것이 제공되는 공간이었다.</p>
<p> </p>
<table class="news_photo_table" width="600" align="center">
<tbody>
<tr>
<td><span class="big_size_img"><img src="/data/file/interview/1926105049_31081d2c_33867_66054_1717.png" alt="" width="600" /></span></td>
</tr>
<tr>
<td class="news_photo_table_caption"> </td>
</tr>
</tbody>
</table>
<p><br /><br />매주 토요일이면 대림중앙시장 골목은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이 몰렸다. 대림2동 주민뿐 아니라,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리며 곳곳이 인산인해였다. 지난해 12월은 연말이라 더욱 붐볐다. 크고 작은 식당마다 송년회가 열렸다. 이른바 ‘대주점(大酒店)’으로 불리는 연회장이나 ‘연변냉면’ ‘하룡냉면’ 같은 유명 식당은 예약 손님으로 붐볐다. 재한 조선족이 대림동이나 구로동에만 사는 건 아니다. 다른 동네에 살더라도 대림동은 필요에 따라 꼭 들러야 하는 공간이다. 시장과 식당, 일자리를 구하는 직업소개소 외에도 각종 여가를 보내는 곳이다. 중국산 게임을 할 수 있는 PC방과 당구장 외에도 각종 유흥업소가 몰려 있다. 장을 보고, 친구를 만나고, 생활 편의시설을 이용하며 일자리를 구한다.<br /><br />대림2동 유동인구의 규모는 서울시 공공 빅데이터로도 확인할 수 있다. 서울시는 전체 행정구역을 1시간 단위로 쪼개 유동인구를 파악한다. 대중교통과 스마트폰 이용량을 분석해 추산한 결과다. 2019년 1월5일 토요일 기준, 중국 국적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 유동인구가 많은 시간대와 장소는 저녁 9시 대림2동(약 8070명)이었다(아래 인포그래픽 참조).</p>
<p> </p>
<p> </p>
<table class="news_photo_table" width="600" align="center">
<tbody>
<tr>
<td><span class="big_size_img"><img src="/data/file/interview/1926105049_6492e7f9_33867_66055_1804.png" alt="" width="600" /></span></td>
</tr>
<tr>
<td class="news_photo_table_caption"> </td>
</tr>
</tbody>
</table>
<p> </p>
<p> </p>
<table class="news_photo_table" width="600" align="center">
<tbody>
<tr>
<td><span class="big_size_img"><img src="/data/file/interview/1926105049_da86f991_33867_66056_1818.png" alt="" width="600" /></span></td>
</tr>
<tr>
<td class="news_photo_table_caption"> </td>
</tr>
</tbody>
</table>
<br />
<p> </p>
<p> </p>
<p><br /><strong><br />학원 전단지 쏟아지는 대림역 12번 출구 <br /></strong><br />이 밖에도 이주민은 각종 ‘정보’를 찾아 대림동으로 모여든다. 정보의 핵심은 불법체류 단속 등 신분 변화와 관련한 내용이다. 마침 기자가 이곳에 머무른 기간은 법무부가 지정한 ‘특별 자진 출국 기간’이었다. 2018년 10월1일부터 2019년 3월까지, 6개월 내 자진해서 출국할 경우 추후 입국 규제 등 불이익 조처를 취하지 않겠다는 내용이다. 반대로 이 기간 단속에 적발된 불법체류자는 입국 규제 규정이 엄격해져 길게는 10년간 입국이 금지된다. 매주 ‘자진 출국’ 안내문을 나누어주는 이들을 대림역 주위에서 만날 수 있었다. 각종 상가 건물에도 ‘불법(체류자) 상담’이라는 안내문이 나붙었다.</p>
<p> </p>
<table class="news_photo_table" width="600" align="center">
<tbody>
<tr>
<td><img src="/data/file/interview/1926105049_94d25b42_33867_65917_4844.jpg" alt="" width="600" /></td>
</tr>
<tr>
<td class="news_photo_table_caption">
<div class="a_credit">ⓒ시사IN 신선영</div>
요즘 대림동에서 인기를 끄는 자격증은 실기 비중이 높은 버섯종균기능사다.</td>
</tr>
</tbody>
</table>
<br /><br />정부의 외국인 출입국 정책은 해마다 노동시장의 요구에 따라 변했다. 주기적으로 자진 신고 기간을 마련해서 불법체류 중인 이들을 제도 안으로 편입시키는 한편, 상황에 따라 입국 문호를 넓히거나 좁히기를 반복했다. 제도가 자주 바뀌다 보니 관련 정보에 늘 귀를 기울여야 했다. 대림동에는 한국식 행정절차와 각종 서류 작업을 대행해주는 여행사나 행정사 사무실도 잇달아 문을 열었다. 여행사·행정사 외에도 정부 정책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업종이 바로 각종 학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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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대림동을 처음 찾은 사람들은 다른 동네에선 볼 수 없는 몇 가지 기호에 혼란을 겪는다. C38·H2·F4·F5처럼 암호 같은 낯선 문구가 점포마다 붙어 있다( <strong><u><span style="color:#3a32c3;"><a href="http://sisain.kr/33869" target="_blank" rel="nofollow noreferrer noopener">‘F4’ 비자를 따기 위해서라면</a></span></u></strong> 기사 참조). “직원 구함. H2, F4, F5, 한국인 가능” “F4를 위한 최고의 선택. ○○○학원” 온종일 사람들로 북적이는 대림역 12번 출구 근처에서는 정오 무렵부터 한 무리의 사람들이 각종 학원 전단지를 돌리기 시작한다. “철근 수강료는 60만원이고, 거푸집은 70만원이야. 각각 재료비는 20만원이고. 원서비는 따로 내야 돼.” 형틀(거푸집), 건축도장(페인트), 건축목공(목수), 온수온돌(설비), 방수, 철근, 비계 등 건설기능사 외에도 미용, 요리, 제과·제빵, 세탁기능사 학원이 도림로 인근 빌딩마다 들어차 있다.</p>
<p>‘제빵기능사가 세탁기능사보다 따기 쉽습니다.’ 대림2동에 위치한 한 학원 외벽에 붙은 광고 문구다. 대림동 학원가의 경쟁은 노량진 학원가 못지않다. 합격자 사진을 외벽에 걸어두거나 합격자 명단을 학원 입구에 붙여둔다. 한 내국인 주민은 “요즘은 이곳에서 버섯종균기능사가 가장 핫하다”라고 말했다. 재한 조선족 중에는 대화는 가능해도 한국어 독해나 글쓰기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이 많다. 버섯종균기능사처럼 필기 비중보다 실기 비중이 높은 자격증이 인기다. 이들 학원은 ‘손쉬운 비자 전환’을 전면에 내걸며 홍보한다. 최근에는 종로나 여의도에 있는 학원까지 홈페이지에 ‘F4(재외동포) 비자’를 내세우며 ‘비자용 학원 시장’ 공략에 나섰다.</p>
<p><br />잠깐 돈만 벌어서 돌아가려는 계획을 세운 이들도 비자를 전환하고 체류 기간이 길어질수록 ‘앞으로’를 고민하게 된다. 재한 조선족의 이주는 가족 단위로 확장된다. 혈혈단신 한국에 입국하더라도 안정적으로 체류하게 되면 가족과 친지가 연이어 건너온다. 대림동에서 20년 이상 거주한 김정숙씨(38)는 “우리 집도 지층과 1층에 세를 주고 있는데, 부부가 살다가 애가 태어나면 돌봐줄 사람이 없으니까 중국에서 부모가 한국으로 온다”라고 말했다. 2000년대 대림동 이주가 2인 가구 시대를 열었다면, 2010년대 대림동은 ‘3대가 모여 사는 삶’이 펼쳐진다. 이들 가운데 거주 기간이 오래되고 일정한 자격 요건을 갖춘 이들은 영주권 비자(F5)로 전환하거나 귀화를 추진하기도 한다. 재외동포재단에 따르면 지금까지 귀화한 재한 조선족(법무부 분류명 한국계 중국인)은 10만여 명으로 추산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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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class="news_photo_table" width="600" align="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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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span class="big_size_img"><img src="/data/file/interview/1926105049_81e4da6c_33867_66057_2237.png" alt="" width="600" /></span></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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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class="news_photo_table_caption"> </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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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 /><br />장기 체류를 거쳐 3대 정착에 이르기까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들이 바로 ‘조선족 3세대’다. 경제활동이 가장 활발한 세대다. 대림동에서 가장 대표적인 동포 조직 중 하나인 한마음연합회 김용선 회장(42)은 조선족 세대 구분을 이렇게 설명했다. “일제시대에 만주 땅으로 넘어온 1세대 동포들이 우리 조부모 세대다. 해방 직후 국경이 닫히면서(분단) 그대로 머물며 살다 우리 부모 세대인 조선족 2세대가 태어났다. 하지만 2세대는 문화대혁명 영향으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채 그저 농사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같은 3세대들은 그나마 축복받은 세대다. 조선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웠고, 한국 사회에서 새로운 기회를 얻었다.”<br /><br />굳이 한국으로 오지 않더라도 이들 3세대 조선족의 ‘이중 언어’ 능력은 중국 내에서 자산이 되었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칭다오(청도) 같은 연해 지역 대도시에 한국 기업이 대거 진출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중국 내 한국 기업에서 일하다 2010년대에 뒤늦게 한국으로 오는 이들도 늘었다. 한국 제조업 기업이 동남아 지역으로 이전하거나 사업을 철수하기 시작하면서다.<br /><br />1970~1980년대에 태어나 상대적으로 교육받을 기회가 많았고, 이중 언어라는 자원을 가지고 있으며, 중국에 다양한 네트워크를 가진 조선족 3세대는 2010년대 ‘대림동’을 더 입체적으로 바꿔놓았다. 정착 초기만 해도 이들 3세대는 내국인보다 낮은 임금을 받으며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돈을 모아 상점을 열고, 조그만 사업을 시작하면서 ‘재한 조선족 3세대 중산층’이 등장했다.<br /><br />3세대 중산층은 주로 자영업에서 성공을 거뒀다. 전통시장 활성화 사업 중 하나인 ‘대림중앙문화관광형시장 사업단’ 단장을 맡고 있는 윤민진 박사는 대림동 상권의 특성을 “다른 지역에 비해 경기를 타지 않는다”라고 설명했다. 내국인을 상대로 영업하는 다른 동네와 달리, 이주민을 상대로 한 대림동은 국내 경기변동의 영향을 덜 받는다. 다른 지역과 달리, 프랜차이즈에 의지하지 않는 방식도 대림동 자영업자의 특징이다( <strong><u><span style="color:#3a32c3;"><a href="http://sisain.kr/33874" target="_blank" rel="nofollow noreferrer noopener">양꼬치 성지엔 프랜차이즈가 없다</a></span></u></strong> 기사 참조). 이들은 식당을 크게 열거나, 대림동과 구로동에 비슷한 점포를 여러 개 소유하면서 같은 재한 조선족이나 한족 출신 중국인을 고용하기도 한다.<br /><br /><strong>“한국인 1등, 조선족 2등, 한족은 3등 시민” </strong><br /><br />무역업으로 성공하는 3세대도 늘었다. 초기 정착민인 부모 세대와 달리, 중국 내 네트워크가 많다는 것이 이점으로 작용했다. 한국 상품을 중국으로 수출하는 권양석씨(49·가명)는 “한국 내 네트워크가 빈약하다 보니 중국 물품을 한국에 수입하는 사업은 어렵다. 하지만 중국 내 유통망은 우리가 더 빠삭하니까 괜찮은 한국 상품을 중국에 수출하기에 상대적 이점이 있다”라고 설명했다. 특히 인기 있는 품목은 한국 화장품이다. 보따리상부터 정식으로 법인을 차려서 화장품 수출 사업을 벌이는 이들까지 규모도 다양하다. 이들 회사의 물류창고와 사무실은 비교적 덜 복잡한 대림3동에 모여 있다.<br /><br />안정적으로 한국 사회에 정착하며 영주권이나 국적을 획득한 이들의 등장은 대림동 인구 지형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2010년대 들어 3세대 중산층의 ‘재이주’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가족이 늘고 좀 더 안정적인 주거를 필요로 하는 대림2동의 3세대 중산층이 대림3동으로 많이 이사했다. 단독주택 반지하에서 좀 더 나은 주거 환경을 찾아 상대적으로 정비가 잘된 대림3동으로 이주하는 식이다. 2010년 대림3동 외국인 인구는 3187명이었지만 2018년에는 4907명으로 늘었다. 대림3동에 거주 중인 한 이주민은 “대림2동은 지하철역이나 시장과 가까워 월세가 많이 올랐다. 최근 젊은 친구들이 대림3동에 가게를 많이 냈는데, 젊은 층은 대림2동보다 이쪽 가게를 더 자주 찾는다”라고 말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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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class="news_photo_table" width="600" align="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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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img src="/data/file/interview/1926105049_f39143ee_33867_65918_4916.jpg" alt="" width="600" /></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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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class="news_photo_table_caption">
<div class="a_credit">ⓒ시사IN 신선영</div>
대림중앙시장에서 한 주민이 음식 포장을 기다리고 있다.</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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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아예 대림동을 벗어나기도 한다. 그리 멀지 않은 수도권 지역을 눈여겨보았다. 대림동을 벗어난 재이주 지역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집값이 저렴해야 한다. 먼저 이주한 재한 조선족이 있다면 더 좋고, 주변에 전통시장이 있다면 금상첨화다. 또 하나 중요한 조건이 있다. 지하철로 언제든 쉽게 대림동을 찾을 수 있어야 하는 곳이어야 한다. 이런 조건을 갖춘 가장 적합한 지역이 바로 인천 부평구 부평동과 과거 소사구로 묶여 있던 부천시 심곡본동, 소사동 지역이다. 2010년 12월 경기도 부천시와 인천시 부평구에 거주하는 재한 조선족은 각각 564명과 287명이었지만, 2018년 9월에는 부천시 7615명, 인천시 부평구 3892명으로 10배 이상 늘었다.</p>
<p>3세대 중산층은 오피니언 리더로 떠오르기도 한다. 이들이 조직한 단체는 1990년대 가리봉동을 중심으로 중국동포 인권운동을 주도하던 ‘교회 커뮤니티’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중국동포를 대상으로 활동하는 지역 언론사는 한때 20개가 넘었다. 이들 단체는 각종 봉사활동과 동포 지원 사업을 벌인다. 목표는 한국 사회에서 이주민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차별적 대우를 줄이는 데 있다. ‘중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삶’이 ‘한국에 뿌리내리는 삶’으로 바뀌면서 차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자는 목소리도 높아졌다.<br /><br />3세대 중산층이 등장했지만 오늘날 대림동의 근간을 이루는 이들 다수는 육체 노동자다( <strong><u><span style="color:#3a32c3;"><a href="http://sisain.kr/33871" target="_blank" rel="nofollow noreferrer noopener">새벽 4시, 남구로역에 중국어가 울려 퍼진다</a></span></u></strong> 기사 참조). 대림동에 거주하거나 대림동을 거쳐 가는 모두가 중산층으로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대림동을 오가는 재한 조선족 가운데 다수는 내국인 평균 이하의 소득을 얻고 있다. 재외동포재단이 2016년 실시한 ‘국내 체류 중국동포 현황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가운데 54.6%가 연간 소득 2000만원 미만으로 나타났다. 1인 거주자 비율은 28.8%, 월세 또는 임시 거처에서 지내는 이들은 약 72.7%에 달했다.<br /><br />대림동 곳곳에서도 이 같은 통계를 뒷받침하는 삶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고시원에 머무는 이들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가장 열악한 주거는 찜질방이다. 대림역 11번 출구 인근에 있는 한 대형 찜질방에는 캐리어 보관실이 따로 있다. 30~ 40ℓ 백팩을 들고 온 이들은 사우나 탈의실 라커 위에 가방을 올려두기도 했다. 사우나 탈의실 곳곳에는 건설 현장 안전모, 세탁용 가루비누, 작업복 등이 방치돼 있었다. 돈이 없어서 월세를 구하지 못한 사람도 있지만 지방 현장 일이 끝난 후 다른 일을 찾는 동안 머무르는 이들도 많았다.</p>
<table class="news_photo_table" width="600" align="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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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img src="/data/file/interview/1926105049_a6760ed4_33867_65919_4950.jpg" alt="" width="600" /></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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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class="news_photo_table_caption">
<div class="a_credit">ⓒ시사IN 신선영</div>
지난해 12월15일 중국 조선족 자녀와 한국인 자녀가 함께 교육받는 구로도서관 어울림학교에서 학생들이 공연을 하고 있다.</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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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대림동에는 재한 조선족만 거주하는 게 아니다. 한국어가 낯설더라도 새로운 기회를 얻으려 한국을 찾는 한족 출신 중국인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일부는 투자 이민을 통해 한국에 들어왔지만, 꽤 많은 한족이 재한 조선족 사장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일하거나, 재한 조선족 ‘오야지(팀장)’가 이끄는 건설 현장에서 일한다. 대림동에서 만난 한 한족 출신 중국인은 “여기서 한국인은 1등 시민, 조선족은 2등 시민, 한족은 3등 시민이지 않나”라며 보이지 않는 차별이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중국에서 조선족이 소수민족으로 차별받는 것과는 반대 양상이 대림동에서 펼쳐지는 셈이다. 특히 한국에서 ‘언어(한국어)’는 일종의 권력이고 자산이 된다. 한 내국인 집주인은 “최근에는 반지하 방에 조선족이 한족을 데려와서 대신 임차 절차를 밟아주기도 한다. 옛날에는 세입자들이 대부분 말이 통했는데, 최근에는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세입자도 많아서 걱정이다”라고 말했다.</p>
<p>2010년 중반 이후 대림동은 새로운 변화를 맞이했다. 골목에서 아이들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대림동 주민들은 “최근 2~3년 사이에 대림동에 10대와 20대 젊은이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라고 말했다. 대림동에 터전을 이룬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나, 부모를 찾아 입국한 젊은 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이른바 재한 조선족 4세대의 등장이다.<br /><br />어린 나이에 한국에 오거나, 아예 한국에서 태어난 4세대는 한국 사회에 쉽게 적응했다. 학교에서 한국 아이들과 다를 바 없다. 정작 부모들은 아이들이 ‘중국어를 할 줄 모른다’며 걱정스러워한다. 이중 언어를 경쟁력으로 삼았던 3세대와 달리 한국에서 한국 교육을 받고 자란 자녀들은 어쩔 수 없이 중국어가 낯설 수밖에 없다. 귀화를 원하는 이들이 늘어난 것도 이 때문이다.<br /><br /><strong>“비자 문제 때문에 경범죄도 안 저질러” </strong><br /><br />하지만 ‘중도 입국 자녀’로 중국에서 뒤늦게 건너온 4세대의 고충은 좀 더 복잡하다. 부모 없이 청소년기를 보낸 이들이 많다. 부모가 한국에서 자리를 잡는 동안 조부모나 친척 밑에서 중국식 교육을 받고 자란 이들은 한국에서 가장 먼저 언어 문제에 봉착한다. 특히 한국의 공교육 체계에 편입해야 하는 10대는 언어 문제로 교육과정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의 적응 문제는 교육 문제에서 사회 문제로까지 확대된다. 동포지원센터 최승이 센터장은 “다른 동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구로·대림동 치안이 불안한 건 아니다. 다만 최근 들어 중도 입국 청소년 범죄 문제는 신경이 쓰인다. 이 지역 특성상 부모가 오랫동안 일하러 나가거나, 아이들을 제대로 돌봐줄 수 없는 가정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편이다. 가정이 흔들리면 청소년 범죄도 늘어난다”라고 말했다.</p>
<table class="news_photo_table" width="600" align="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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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img src="/data/file/interview/1926105049_f385bd37_33867_65920_5013.jpg" alt="" width="600" /></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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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class="news_photo_table_caption">
<div class="a_credit">ⓒ시사IN 신선영</div>
1월18일 저녁 조선족 동포로 구성된 외국인 자율방범대 대원들이 방범 활동을 펼치고 있다.</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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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내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을 대림동 외부에서는 ‘위험신호’로 인지한다. 치안에 대한 우려도 정작 동네 내부에서 바라보는 시선과 외부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다. 대림동에서 오랜 기간 지낸 내국인 가운데 “시장 골목은 조금 낯설고 무서워서 잘 가지 않는다”라는 이들도 있는 반면 “여기서 수십 년 살았지만 ‘칼부림’ 같은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라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다수다. 오히려 재한 조선족들은 “비자 문제 때문에 경범죄도 저질러선 안 된다”라고 설명한다. 과태료나 벌금 기록이 남을 경우 재외동포(F4) 비자를 가지고 있더라도 연장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몇 년에 한 번씩 ‘한국 거주 자격을 심사받는’ 이들로서는 범죄기록을 늘 조심할 수밖에 없다.</p>
<p>재한 조선족이 모여든다는 이유로 대림동을 서울의 대표적인 슬럼처럼 묘사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이미 대림동은 서울 서남권에서 손꼽히는 상업지역이다. “영화 &lt;청년경찰&gt;이 대림동에 대해 안 좋은 이미지를 확대하기도 했지만, 반대로 그만큼 호기심도 불러일으켰어요. 실제로 맛집을 찾아 대림동에 오는 사람도 많아요.” 한 재한 조선족 상인은 최근 몇 년 사이 대림동에 생겨난 변화를 이렇게 설명했다. 실제로 대림동에는 언론을 통해 이름을 알린 식당과 상점이 하나둘 등장했다. 주민들 역시 대림동이 ‘서울에서 들러볼 만한 에스닉타운(이색적인 동네)’으로 자리매김해 사람들이 활발히 오가는 게 가장 긍정적인 미래라고 생각한다. 일부는 시 차원에서 대림동을 ‘차이나타운 특구’로 지정하기를 바라기도 한다.<br /><br />1992년 한·중 수교를 기준으로 보면 재한 조선족 이주 역사는 올해로 27년째다. 대림동의 변화는 이들이 한국 사회에 적응하며 뿌리내리는 과정이 반영된 결과다. 새로운 세대의 출현은 이들의 체류를 ‘정착’으로 바꿔놓았다. 정착에는 갈등이 따른다. 정체성과 차별의 문제가 찾아온다. 대림동에서 시흥동으로 옮겨 가정을 일구어 살고 있는 김정필씨(가명·33)는 한국에서 지내는 삶을 ‘세련된 차별의 연속’이라고 말한다. “좀 친해진 한국인들도 ‘한국과 중국이 축구 경기를 하면 어디를 응원할 거냐’는 질문을 생각 없이 던진다. 이런 질문은 ‘엄마가 좋냐, 아빠가 좋냐’는 질문과 마찬가지다. 어렸을 때부터 한국은 모국이고 중국은 조국이라고 배우며 자랐다.” 김씨는 중국에서도 ‘소수민족’이라는 경계에 선 삶을 살아왔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기사 나가면 악플이 달린다는 걸 잘 안다. 우리한테 ‘짱깨’라고 욕하는 거 다 안다. 그래도 우리 목소리와 우리 삶, 우리가 가진 고민이 대림동 밖으로 알려졌으면 좋겠다.”  <br /><br />※ 더 많은 사진과 영상은 ‘대림동 한 달 살기’ 웹페이지(<a href="http://daerim.sisain.co.kr/" target="_blank" rel="nofollow noreferrer noopener"><strong><span style="color:#3a32c3;">daerim.sisain.co.kr</span></strong></a>)에서 볼 수 있습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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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style="width:1159px;"><a href="http://daerim.sisain.co.kr/" target="_blank" rel="nofollow noreferrer noopener"><img src="/data/file/interview/1926105049_127ef2a5_33867_66105_2456.jpg" alt="" width="600" /></a></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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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class="news_photo_table_caption" style="width:1159px;"> </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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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lt;저작권자 ⓒ 시사IN (http://www.sisai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gt;</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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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arl_view_other_writers"><a class="avw_a" href="https://www.sisain.co.kr/?mod=news&amp;act=articleList&amp;sc_area=I&amp;sc_word=astoria" rel="nofollow">글 김동인 기자·사진 신선영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a></div>
<span class="arl_view_writer"><span class="arl_view_hosu"><br /><br /></span></span></div></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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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ory>커뮤니티</category>
<category>구술 프로젝트</category>
<pubDate>Wed, 03 Apr 2019 01:30:03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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