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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이주노동자들의 요구를 대변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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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깨철이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댓글 28건 조회39,438회 작성일2004-05-17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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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업장 이동의 자유쟁취!
- 노동3권의 보장
- 노동허가제 쟁취!



그렇지 않다. 위의 요구들은 '사업장 혹은 공장'안에서의 요구들에 한정되어 있다. 이 요구들은 사업장 밖에서 벌어지는 이주노동자들의 욕구와 요구를 대변하지 못한다.

사업장이나 공장의 테두리안에서-전통적인 노사관계라는 틀안에서-의 요구들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 안에서조차 이주노동자들이 대면하는 것은 공장을 넘어서는 '국가'이다. 이주노동자들에게 자본은 국가권력으로 직접 나타난다.

한편, 생산이 사업장과 공장의 틀을 넘어서 사회전체에 확장되었다는 것을 간파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주노동자들의 요구는 공장안에서만의 요구가 아니라 지역과 커뮤니티안에서의 요구들, 전통적으로 '재생산영역'이라 말해지는 영역에서 다양한 욕구들을 가진다.

육아, 결혼, 성, 교육, 의료, 복지, 문화 등에서 점증하는 욕구들은 공장밖에서도 사회적 요구를 만들고 자본과 격렬한 투쟁을 만든다. 공장을 넘어서는 이런 투쟁들은 생산의 사회화와 더불어 일반화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이주노동자를 소수자로, 이주노동을 다른 소수노동들-예컨대 여성노동, 장애인노동, 비정규직노동...-속에서 바라보고 그 연계성들을 파악해야한다. 결론적으로 위의 요구는 무척이나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요구를 향한 투쟁도, 그 투쟁의 조직화형식도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네그리를 비롯한 자율주의자들은 '사회적 공장'이라는 개념을 통해 공장밖으로 확대된 계급투쟁의 성격을 분석함을 통해 '다중의 구성'을 정치적 목표로 내세웠다. 이것은 들뢰즈/가타리의 '다중'과 많은 부분 공유하는 지점이 있다. 다중은 그 이전의 어떤 계급보다 복합적이며, 한편에서는 소수자들('다수자'와 반대되는 의미에서. 이것은 숫적인 우위나 열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이다.

이런 주장들은 보통 탈근대적 담론들 즉,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하에 있는 신사회운동이나 '정체성/탈정체성'의 정치와 관련되어 말해져왔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우선 신사회운동은 노동의 영역과 사회의 영역을 이분법으로 나누고 노동이 사회의 영역속에서 운동해야 한다는 사고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노동의 종말'(축소)과 노동운동의 쇠퇴로 말해지기도 한다. 그것이 어떤 차원에서 말해지든간에 그것은 실제 노동의 확대(우리의 경험으로는 비정규화된, 비고용된 노동의 확대. 비노동에 대한 점증하는 자본의 갈취)로 인한 '사회적공장'이라는 것과 비슷하게 보이지만 일치하지 않는다.

'정체성/탈정체성'의 정치의 발전과 확장은 사실 '사회적공장'의 결과이다. 이 담론은 커뮤니티 영역에서 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생산적 기반에 대한 분석이 취약하다는 것이다. '다중'은 단순히 문화적 영역에서 출현하게 된 주체가 아니다. 생산과 분리된 '다중'에 대한 강조는 제한적 담론에 불과해진다.

따라서 우리는 두개의 접점을 찾아야 한다. 먼저 전통적인 노동운동이 지니는 담론의 한계를 벗어나야 한다. 다른 한편 정체성/탈정체성의 정치가 지니는 담론의 한계를 벗어나야 한다. 두 개의 담론은 공히 노동과 사회라는 이분법적 분리의 사유체계속에서 작동한다. 그러나 노동사회와 시민사회는 그렇게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 자율주의자들의 생각이다.

자율주의, 그리고 오픈맑시스트들의 자본에 대한 분석과 들뢰즈/가타리의 자본에 대한 분석은 많은 부분 닮았고, 명백한 공유지점들이 발견된다(일례로 화폐에 대한 분석이 그렇다). 이것은 불가능할 것만 같은 자본에 대항하는 이론, 실천의 가능성이다.



다시 이주노동자 문제로 돌아와서 정리하자면, 이주노동자들의 요구는 사업장에서의 요구로 결코 대표되지도 대변되지도 않는다는 것. 또한 투쟁의 조직화에 있어 노동조합으로 한계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주노동자들은 다른 소수자노동들과 분명히 연계되는 욕구와 요구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공장의 틀을 넘어선다. 사회적 생산속에서 소수자노동들에 대한 분석적 연계가 필요하다. 소수자노동들이 사회적 생산속에서 어떻게 서로 연결되거나 분할되고 있으며, 어떻게 협력할 수 있는지 어떻게 공통의 사회적 요구들로 확장될 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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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미친꽃님의 댓글

미친꽃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늘 예리한 지적.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 사고를 확장시키는데 도움이 되죠. 논쟁의 부분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서 사고는 확장되는 거니까 ^^.

다꽝님의 댓글

다꽝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개철은 늘,게시판에서는
공중부양의 구마루가 아니라
지적 령도자의 구마루였구만요.
개철, 넘넘 고마워, 잘 읽고 있어요. 쪼옥

깨철이님의 댓글

깨철이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지적 령도자'라니? 남들이 들으면 농담으로 오해해요. 진지하게 '지적 도령'이라고 불러줘요. '도령'하니까 점집을 차려놓고 앉아있던 그 영험한 도령들이 생각난다. 본질상 '구루'와 별 다르지 않은 걸. 하지만 난 '구루'가 아니라 '구마루'입니다.
-오늘도 공중부양에 여념이 없는 구마루-
헉, 구마루는 구로구와 무관한 제품입니다. 구씨동맹과 구마루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social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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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말씀드리자면 딴지 거는게 아니고 순수히 궁금해서 질문하는 것입니다. 소수자노동들이 어떻게 연대하여 체제를 바꿀수 있다는 것이죠?

social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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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노동자대중이 체제를 바꿀수 없다고 보시는 것입니까?
왜 소수자노동들의 연대이어야 합니까?

깨철이님의 댓글

깨철이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이런,...노동자들이 체제를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지도 그렇게 말한 적도 없습니다. 단, 여기서 노동자의 의미는 이미 공장이라는 테두리를 넘어서 정의되고 있다는 것이고 그 모습이 소수자노동을 통해 드러난다고 말한 것입니다.  노동력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변형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과거로부터 정립되었던 공장이라는 장소에 한정된 노동, 그리고 그것과 결부된 노동자라는 형상과 이름들은 우리시대에 그 실효성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요구를 조직하는 것, 그리고 조직화 형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의 한계에 부딪치는 것이고요. 위에 거론된 요구들은 전부 사업장내지 공장이라는 틀안에서의 요구들입니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요구는 그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는 이주노동자들 전체의 요구와 욕구들과 투쟁들이 결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문제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기하신 첫번째 질문에 대한 부족한 답변이고, 두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제 답변을 예상할 수 있는 힌트가 될 수 있겠지요. 

social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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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제가 '노동자대중'이란 잘못된 용어로 질문해서 의사 전달이 안됐군요. 제 질문은 현장노동자들이 왜 벽혁의 주체일수 없느냐는 것입니다.

social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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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노동의 의미가 현재의 노동을 설명해줄수 없다는 것을 저도 인정합니다. 그런데 제가 궁금한 것은 과연 현장노동자들이 아닌 소수자 노동들이 연대할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social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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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씀드리자면 저는 사회적 생산이 '공장'의 틀을 넘어섰다는 것은, 생산의 현장이 '공장'이라는 장소를 넘어섰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저는 임금노동뿐만 아니라 사회적 노동에도 임금을 지불하라는 것(아마 그것은 국가를 통해서겠죠)이 큰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가사노동같은 분명히 사회를 재생산함에도 임금을 지불받지 않았더 부불노동에 임금을 지불한다는 것이 큰 의미가 있을까요? 그것은 체제에 포섭된 개혁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개혁을 하지 말자고 제가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단 그러한 개혁은 결코 체제를 넘어설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개혁을 통한 직접적인 결과들(객관적인 사회의 변화) 보다는 그러한 개혁을 위한 투쟁을 통해서 주관적인 조건을 창출하는 것이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social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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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저는 자율주의에 대해 모르고 '제국'을 읽은 적도 없습니다.(제 게으름에 핑계를 대자면 불과 몇 개월 전에도 고등학생으로서 대학입시에 시름하고 있었죠. 아직 기초도 부족한테 좌파들 사이에서 '제국'이란 책이 이슈가 된다고 해서 읽고싶지도 않았죠. 자율주의에서 저는 공부를 시작하고 싶지않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깨철님과 논쟁하고 싶지않았죠. 왜냐하면 제가 깨철님과 논쟁하기 위해서는 자율주의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어야 할텐데(이해하지 않은 것을 비판할 수는 없지요) 그렇지 못하니까요. 저는 처음에 말했듯이 순수히 질문하고 싶었죠.저의 이러한 상황을 먼저 이해하시길. 그러니까 저에게 논쟁을 요구하지마시고 저의 질문에 답해주세요. '사회적 노동에 사회적 임금을' 이란 요구가 어떻게 체제를 넘어설수있는지. 저의 상식적인 생각으로는 체제 내부에서도 그 요구는 충족될수 있다고 생각하기때문입니다. 스워덴 같은 국가는 그 요구를 충족하지 않은 것인가요?비록 복지라는 이름으로하기는 했지만요.

social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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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주관적인 조건의 창출'은 로자가 개량이냐, 혁명이냐에서 말하고 있는 의미입니다.

깨철이님의 댓글

깨철이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엉뚱한 대답이 되었거나, 님의 문제의식 10개에서 또 다른 문제의식 10개를 추가한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기를...

social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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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의문이 계속 드는 것은 사회적 소득을 끊임없이 추구해나가는 과정에서 꼬뮨주의가 달성될수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 ' 임노동에 임금'보다 '사회적 노동에 사회적 소득'이 지배적인 형태가 될 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이후에나 가능하다고 봅니다. 어쨌든 '사회적 노동에 사회적 소득'의 요구가 체제에 포섭되지않는 것이라 하더라도(구체적으로 왜 체제에 포섭되지 않은지 설명해주셨으면 합니다.)그 요구를 깨철님이 말한 다중이 끊임없이  충족시키려는 투쟁을 해나가야한다는 가정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이런 가정이 충족되기 힘들다고 보지만, 설사 이러한 가정이 충족된다고하더라도 저는 이런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요구를 충족시켜나가는 과정은 말씀하셨듯이 철저한 계급투쟁입니다. 계급간의 힘이 끊임없이 충돌하게 되기때문에 저는 노동계급이 그 요구를 체제를 넘어서는 데까지 밀고 나가기위해서는 자본가계급에 맞선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무엇은 국가권력이 아니라 할지라고 다른 권력의 형태(러시아 혁명기와 독일혁명기의 노동자병사평의회와 같은) 를 띠어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러시아 혁명 후에 후자의 권력형태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실시되었다면은, 그리하여 대중의 자발성과 창조성이 억압되지 않고 활력을 가지도 끊임없이 코뮨주의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분명히 러시아 혁명과 같은 혁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렇지않고 현체제에서 끊임없이 꼬뮨주의를 구성해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social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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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드리고 싶은게 하나 빠졌는데, 다중이 어떻게 근대적 주체가 아닌 꼬뮨주의적 주체로 성장할수있느냐하는 것입니다.

social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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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를 살여지가 위에 있어서 씁니다. 러시아혁명과 같은 혁명이 필요다하고 봅니다의 의미를 러시아 혁명을 모델로 삼자는 것이아니라 그냥 혁명(단절)이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social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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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독해를 자의적으로 한 측면이 있는것 같습니다. 하지만 깨철님도 독해를 자의적으로 한 측면이 있는것 같습니다.(제가 구체적으로 기술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한 것같기도 합니다.) 제가 대중에게 내재된 힘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철저히 믿습니다. 저는 역사발전의 동력은 대중의 힘과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중이 끊임없이 투쟁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믿음은 없는'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노동자대중이 끊임없이 투쟁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물론 이런 오해를 하신것은 제가 자세하게 기술하지않은 탓이겠죠) 저는 일상적 상황에서 대중의 혁명적인 힘이 발현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말은 러시아혁명과 같은 혁명기에만 대중의 혁명적인 힘이 발현된다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일상적 상황에서는 대중에게 내재되어 있는 힘과 능력이 억압된 형태로 잠재되어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대중의 힘과 능력은 투쟁을 통해서 분출됩니다. 그래서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러한 대중의 혁명적 힘과 능력을 어떻게 혁명적인 방향으로 발전시킬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현 시기 노동운동은 대중의 힘과 능력을 혁명적인 방향으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96~7년 총파업 투쟁에서 억압되어있던 노동자대중의 힘과 능력이 폭발하면서 보다 전투적인 투쟁으로 발전해가려하자, 민주노총 1기 지도부는 투쟁이 진행되는 동안 그 투쟁이 전투적인 투쟁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과도할 정도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투쟁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 지도부는 총파업 철회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는 02년 발전노조파업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가 벌어지는 근원은 노동운동의 개량화와 관료화입니다. 노동운동의 관료화와 개량화는 끊임없이 대중의 혁명적 힘과 능력이 혁명적인 방향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고, 개량운동에 가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현시기 직면한 노동운동의 직면과제는 (대중의 혁명적인 힘과 능력의 발현의 족쇄로 작용하고 있는)노동운동의 관료화와 개량화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막지 못해서 노동운동의 관료화와 개량화가 완벽히 정착되었을 때에는, 감히 혁명을, 자본주의 체제의 극복을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디까지나 역사발전의 원동력은 대중의 힘과 능력이니까요.
 저는 깨철님이 이야기하시는 것에 대해서 아직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그래서 비판하는 것을 올바르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그냥 질문만 하고 가려고 했지만 무리해서라도 제 생각을 밝히겠습니다. 저는 ‘사회적 노동에 사회적 소득을’이란 요구 자체가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말하겠습니다. 저는 대학교1학년입니다. 저는 전통적인 노동의 의미로는 노동자가 아닙니다만 깨철님이 말씀하셨듯이 저는 사회적 노동자입니다. 저는 분명히 사회적 노동을 통해서 사회적 가치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저도 사회적 가치를 생산하고 있으니까 사회적 소득을 받아야 한다고 요구해야할까요? 물론 그래야 합니다. 우리는 사회적 노동을 통해서 사회적 가치를 생산하고 있으니까 사회적 소득을 받아야 한다고 요구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생산하는 사회적 가치가 자본주의적으로 생산되고 있다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생산하는 사회적 가치가 (우리의 발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의 재생산에 사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회적 노동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임금노동이 자본주의적로 행해지고 있듯이 사회적 노동도 자본주의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이 중요하므로 우리의 노동이 자본주의적으로 행해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다시 말해 자본주의체제를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social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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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의회를 국가와 같은 권력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하셨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평의회를 국가권력이 아닌 대중권력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social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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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지금 현 국가권력을 대체하는 대중권력을 구성해나가야한다는 것에 적극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런데 깨철님은 너무 소수노동들의 연대를 통한 대중권력의 구성에 치우쳐져있다는 생각입니다. (편의상 저는 전통적인 의미의 현장을 사용하겠습니다) 현장 노동자대중에는 관심이 부족하지 않은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물론 이것은 깨철님의 글에서 판단할 수 없는 것이고 순전히 제 추측입니다.) 저는 위에서 말했듯이 혁명(단절)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혁명을 단순히 국가권력의 장악(정치혁명)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노동자계급은 단순히 이미 만들어진 국가장치를 장악하여 그것을 자신의 목적에 사용할 수가 없다"라고 맑스가 말했듯이, 노동자 계급이 단순히 부르주아 국가권력을 타도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됩니다. 국가권력의 폐지와 대중권력(이는 소비에트와 같은 평의회가 적당하겠지요)의 대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그리고 물론 대중권력을 구성해가는 것은 지금부터해나아가야할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주목하는 것은 소수노동들이 아니라 현장 노동자대중입니다. 아직 현장에는 노동자대중의 대체권력이 형성되어있지 않습니다. 총파업 투쟁에서 노동조합이 대중을 일방적으로 지도하는 것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러나 저는 현장 노동자대중이 대체권력을 구성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고, 이렇게 구성된 대체권력에 다양한 소수노동들도 당연히 참여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저또한 권력이 대중의 내재적 힘과 분리되어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체권력이 대중의 내재적 힘이 분출될 수 있는 공간으로 기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social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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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평의회가 위로부터 조직되어야한다고 생각하지않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평의회라는 대중권력은 혁명이전에는 물론 혁명이후에도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투쟁을 하지 못할 테니까요. 그런점에서 평의회는 아래로부터 자발적으로 조직될때 국가권력을 데체라려는 대중권력으로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굳이 노동조합이 아닌 평의회에 주목하는 것은, 노동조합 자체가 개량화와 관료화를 없앨 역량을 상실했다고 보기때문입니다.
깨철님은 '이주노동자 합법화 모임'의 예를 들어서 말하셨는데, 그것과 평의회의 본질은 분명히 다릅니다. 깨철님 말대로 '이주노동자 합법화 모임'은 그 적이 사라진다면, 더이상 필요치않습니다. 그러나 대중권력조직으로서 평의회는그 적(부르주아지와 국가권력)이 사라진다해도  여전히 필요합니다. 꼬뮨주의 사회는 평의회를 통한 직접민주주의체제이어야하니까요.
그리고 어째서 대중권력기관으로서 평의회가 필연적으로 노동계급 외부의 권력일 수 밖에 없다고 그러시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조직화되느냐에, 그리고 얼마나 직적민주주의적으로 운영되느냐에 달린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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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깨철님이 '이주노동자 합법화를 위한 모임'의 예를 들때, 느낀건데, 깨철님이 생각하는 소수자노동들의 연대의 형태가 '이주노동자합법화를 위한 모임'과 같은 것입니까?

social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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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의회에 대해서 더 말하지요. (더 말해야 오해가 풀릴것 같군요)평의회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현장대중투쟁조직에 주목하는 것같습니다. 저도 여기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현재 노동조합 지도부들은 대부분이 보수적입니다. 그래서 파업투쟁등에서 분출하는 대중들의 불만과 힘을 노동조합이 혁명적인 방향으로 발저시키지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파업투쟁에서 노동조합이 아닌 자발적으로  조직된 대중투쟁조직이 직접 파업투쟁을 지도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까지 현장대중투쟁조직은 파업투쟁후에 사라져버리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현재 문제이겠죠. 그러나 현재 노동조합이 개량화 노선을 노골적으로 발전시키고 있는 시점에, 현장대중투쟁조직이 노동조합을 대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현장의 대중투쟁조직이 전국적인 평의회로 발전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고 봅니다.
제가 생각하는 대중권력의 구성과 깨철님이 생각하는 것은 다른 것 같네요.

social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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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말하는 평의회는 공장평의회가 아닙니다. 공장평의회로는 체제를 변혁할 수 없겠지요. 제가 말한 평의회의 전국화는 단지 공장평의회의 전국적인 연대가 아니업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평의회가 공장을 넘어서 구성될까요? 그것을 이론적으로 이러저러하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그것은 오직 실천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겠지요. 제가 우리사회에서 평의회의 맹아로서 대중'투쟁'조직이라고 했습니다. 투쟁 속에서 대중투쟁조직이 형성되듯이, 평의회도 투쟁 속에서 형성되겠지요. 평의회가 공장을 넘어서 구성되는 것은 우리가 이론적으로 이렇다저렇다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중권력은 누가 누구에게 권력을 행사하냐고 물으셨습니다. 대중권력은 (코뮨주의의 과도적 단계로서) 사회주의적 변혁이전에는 부르주아지의 자체권력과,  (부르주아의 계급성을 갖고있는)국가권력에 대중이 대항하는 것이고 사회주의적 변혁 이후에는 국가권력에 대항해야합니다.(국가권력을 대중권력으로 전화시키기위해서0

깨철이님의 댓글

깨철이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공장을 넘어서는 사회적 생산에서의 다중들의 내재적 코뮨은 이미 투쟁 속에서 발현되고 있지 않습니까? 문제는 그것들의 커다란 협력적 구성일텐데요...그것이 님이 원하시는 평의회 형태가 아닐 뿐이지요. 우리가 투쟁 속에 드러나는 이러저러한 자율적 조직들에 대해 님처럼 이론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이라면 굳이 그 모든 조직들이 평의회체계가 아니어도 상관이 없는 것이 됩니다. '평의회'를 제기하시는 분들은 '공장'안에서 노동조합의 한계지점을 넘어서고자 하는 현시기의 필요성에 의해 제기하는 것일테구요. 그 필요성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만, 제 생각에는 노동조합의 한계는 한편 '공장'안에서의 한계를 의미하기도 한다면 기본적으로 '공장'안의 평의회가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판단됩니다.

social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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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평의회가 '공장'을 벗어나지못한다고 보시는지 모르겠군요.
그리고 깨철님의 생각과 저의 생각은 너무나 상이한 것 같네요.
사회적 생산에서의 다중들의 내재적 코뮨은 이미 투쟁 속에서 발현되고 있다고 하셨지만, 자본주의 체제 내부에서의 코뮨은 진정한 코뮨이 될 수 없겠지요. 오직 자본주의체제 외부에서만 코뮨은 실현될 수 있겠지요. 그리고 국가권력을 대중권력으로 전화시킨다는 발상이 없다고 하셨는데, 아마 코뮨주의로 가는 과도기로서 사회주의를 부정하는것 같군요. 너무도 저와는 다르네요.

social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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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깨철님은 '권력'을 부정적으로 본다고 하셨습니다. 그게 무슨의미인지 잘모르겠는데, 대중권력도 부정적으로 본다는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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