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클립

[노동사회] 이주노동자 합법화 이후 장기체류자들 - 숨거나 농성하거나

페이지 정보

작성자 마님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3.♡.176.121) 댓글댓글 조회4,932회 작성일2004-04-14 23:00

본문


이주노동자 합법화 이후 장기체류자들 


한분수 (외국인이주노동자인권을위한모임 상담국장)

 
정부는 산업현장과 인권 차원을 함께 고려하여 누가 보아도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체류기한에 상관없이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을 전면 합법화 하고 강제 추방조치를 철회하는 것만이 그동안 구겨질 대로 구겨진 정부의 조령모개(朝令暮改) 정책의 실기를 만회하는 일이다.

외국인 미등록 이주노동자 합법화 조치 이후로 쉴새없이 울려대던 전화벨이 어제 이후로는 잠잠하다. 점심 먹을 새도 없이 밀려들던 외국인 노동자들도 뜸하다. 상담소에 찾아오는 외국인들은 이번 합법화 절차로 외국인등록증(E-9)을 받은 사람들뿐이다. 모두가 숨어버린 것이다. 정부에서는 불법체류자를 줄여보겠다는 의도로 이번 조치를 취했지만 전혀 실효를 보지 못하고 있다. 10여만 명의 대상자 중 15% 정도만이 출국했을 뿐 대다수의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잠적해 버린 것이다. 그동안 정부가 불법체류자 단속을 16차례나 실시했지만 항상 유야무야 됐던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이번에도 한두 달 지나면 다시 일할 수 있겠거니 하는 것이다. 실제로 상담소를 찾은 외국인들도 가겠다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라나는 한국에서 7년 동안 일했지만 방글라데시에 있는 다섯 식구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일자리가 없는 본국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작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지만 가 볼 수도 없었다. 라나는 친구 4명과 함께 경기도 포천의 외딴 시골 산밑에 방을 얻어 라면 등 비상식량을 준비해 놓고 얼마간 버틸 작정이다. 만일 단속반이 오면 산 속으로 도망칠 생각이다.


강제추방 명분 이해할 수 없어

내가 일하고 있는 단체에는 연일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의 한숨과 불안, 불만의 목소리가 넘쳐났다. 그동안 한국에서 힘들고 어렵게 일하면서 노동허가제, 그것이 안 된다면 고용허가제라도 실시하라며 싸워온 장기체류자들이다. 막상 고용허가제 입법이 되고 나서 이들에게는 아무런 보장도 없이 무조건 11월15일까지 이 땅을 떠나라고 하고, 4년 미만 체류자에 대해서만 합법 체류 자격을 주겠다니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3년 미만, 3~4년, 4년 이상 체류기간에 따라 달리 주어지는 체류자격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당연하다. 4년 이상 한국에서 일한 사람들이 한국말도 잘하고 기술도 더 많이 익혀 숙련된 사람들인데 왜 굳이 이들을 나가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입안 과정에서 장기체류자를 내보내는 것이 정주화 방지를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얼마전 모 기업에서 주최한 한국어 글짓기대회에 외국인 노동자들과 함께 참석하였다. 주최측이 내건 세 가지 주제 중에서 가장 많은 외국인들이 글감으로 선택한 것은 ‘사랑하는 나의 가족’이었다.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왔지만 그들은 눈물나게 고국과 가족을 그리워하며 어서 빨리 돈을 벌어 그리운 가족들을 만나고 싶어했다. 어느 누가 낯설고 서툰, 그것도 걸핏하면 임금체불과 산재의 고통에 시달리고 차별받는 시선 속에 서러워하며 ‘눌러 붙어’ 살겠는가.

정부의 오락가락하는 일련의 조치들로 사업주들도 덩달아 갈팡질팡이다. 한국에 온 지 5년 된 알리씨는 공장에서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를 당했으나 치료를 마치고 그 공장에서 계속 일을 하고 있었다. 치료 외에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알리는 상담소를 찾아왔다. 상담소에서 연락하자 사장은 산재보험 미가입 사업장이므로 과태료를 물어야 하니 산재절차를 밟지 않으면 산재보험으로 지급되는 수준의 보상금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했으며 알리에게 11월15일 이후에도 계속 일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2천만 원의 벌금이 염려된 사장은 보상금은 주지도 않은 채 16일 알리를 포함한 외국인들을 모두 해고했다. 사장은 대신 한국인들을 채용하였으나 일이 힘들자 이들은 이틀만에 그만두겠다고 나가버렸다. 그러다 17일 정부에서 제조업체는 당분간 단속을 나가지 않겠다는 발표를 했고, 사장은 다시 알리에게 전화하여 공장으로 와서 일을 하라고 했다. 보상금을 받지 못하여 산재보험절차를 밟으려던 알리는 당장 갈 곳이 없는 데다가 언제 단속에 걸려 강제출국 될지 몰라 울며 겨자 먹기로 다시 공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갈팡질팡하는 사업주들의 횡포

이처럼 벌금이 무서워 4년 이상 된 외국인을 해고했던 사장들은 정부의 제조업체 단속보류라는 보도가 나가자마자 해고했던 노동자들에게 다시 와서 일하라는 전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제조업체 단속보류는 사업주에 대해서만 단속보류이어서 외국인노동자들은 단속이 두려워 외출도 못한 채 공장에서만 지내야 하고, 다시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운 이들은 사업주의 부당함에도 맞서기 어려운 상황에 놓인 것이다. 그나마 분명한 일정도 없이 ‘당분간’이다.

노미씨는 형제가 같은 공장에서 2년 동안 일했다. 노미의 형은 4년 미만이어서 사증발급인정서를 발부 받아 파키스탄에 갔다. 노미는 형이 한국에 돌아오기 며칠 전 사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350만원을 자신의 통장에 입금시키지 않으면 형이 재입국을 못하도록 고용 해지 신고를 하겠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취업확인서를 받게 해준 대가를 받겠다는 것이다. 3~4년 해당자는 총체류기한이 5년까지이므로 재입국 후 체류할 수 있는 기한이 4개월, 5개월, 심지어 1개월 밖에 안 되는 사람도 있다. 법무부에서는 이들이 또다시 불법체류자가 될 것을 우려해 재입국시 사업주들에게 다시 한번 확인전화를 해 출국을 보장할 건가 하고 묻는다. 사업주들이 확답을 안 할 경우 이들은 공항에서 되돌려지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이점을 악용해 돈을 요구하는 사업주의 횡포도 그러려니와 이러한 뻔히 예상되는 부작용들을 고려하지 않은 정부의 안이함에 어이가 없다.

한 사업주가 전화를 했다. 지금 공장에 4년 넘은 외국인들이 6명 있는데 일도 잘하고 정도 들어서 계속 일했으면 좋겠는데 방법이 없느냐고 물었다. 이런 전화를 수도 없이 받고 있지만 달리 할말이 없다. 사장님들도 정부의 이번 조치에 강력히 항의하라는 말을 덧붙일 수밖에.

칸씨는 한국에서 7년을 머물렀다. 외환위기 때는 2년 가까이 일자리가 없어서 오히려 파키스탄에 있는 가족들에게 최소한의 생활비를 받아가면서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에 한국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동안 숙련된 노동자가 된 칸은 11월15일 전까지 일하던 공장에서 팀장으로 후임자에게 기술을 가르쳐 가며 열심히 일을 했고 사장도 걱정말고 일하라고 하더니 막상 14일에서야 2천만 원의 벌금 때문에 안되겠다며 결국 해고해 버리고 말았다. 본국으로 돌아가 봤자 일자리가 없을 게 뻔하고 벌금이 무서운 사업주들이 고용을 꺼리는 통에 공장을 찾을 수 없어 결국 칸은 농성장에서 차가운 겨울을 맞고 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 전면 합법화해야

강제출국의 불안에 벌써 두 명이나 목숨을 끊고 전국 곳곳에서 ‘강제추방 반대와 미등록 이주노동자 전면 합법화’를 요구하며 차가운 땅바닥에서 노숙을 하기도하고 수천 명의 외국인노동자들이 농성을 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언 발에 오줌 누듯이’ 신물나는 산업연수생 신속 도입이니 제조업체 당분간 단속보류니 하며 실로 막연한 발표만 해대고 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정부는 산업현장과 인권 차원을 함께 고려하여 누가 보아도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체류기한에 상관없이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을 전면 합법화 하고 강제 추방조치를 철회하는 것만이 그동안 구겨질 대로 구겨진 정부의 조령모개(朝令暮改) 정책의 실기를 만회하는 일이다.

출처: 노동사회 2003년 12월호, 통권82호

  • 트위터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