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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고르게 가난한 사회'와 이주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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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매닉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댓글 조회7,801회 작성일2005-09-06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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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http://www.greenreview.co.kr/ 에서 퍼온 글


'고르게 가난한 사회'와 이주노동자


 《녹색평론》제77호(2004년 7-8월호)에서 강수돌 선생이 쓴〈세계화와 이주노동자〉라는 제목의 글을 읽었습니다. 이곳, 대구 구치소에 오게 된 이유가 ‘이주노동자 운동’이었던 저로서는 각별히 관심을 끄는 글이었습니다.


  이주노동자의 고통이 세계화의 반대급부라는 강수돌 선생의 글을 읽으면서,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노동자의 생일인 지난 5월 1일, ‘이주노동자 강제추방 반대와 전면합법화 쟁취를 위한 대구지역 공동대책위원회(이하 이주공대위)’는 민주노총 대구지역본부에서 주최하는 5·1절 기념행사에 선전 부스를 설치했습니다. 이주노동자 관련 선전물을 나누어주고, 서명도 받고, 모금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때 행사장 주변에 이런저런 플래카드가 많이 걸렸는데 그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플래카드가 하나 있었습니다. 플래카드라기보다는 ‘보자기’였다고나 할까요.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고르게 가난한 사회”


  ‘이주공대위’에 후발 주자로 참여했지만 누구보다 열심을 내고 있는 대구의 작은 모임 ‘땅과자유’에서 내건 플래카드였습니다.


  한마디로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이주노동자 운동을 하면서 많은 연대단체를 만나왔지만, ‘고르게 가난한 사회’를 꿈꾸면서 연대하는 단체는 처음이었습니다. “물질적 풍요가 곧 행복은 아니다”라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지만, 그것을 뒤집는 역설에 대해서 고민해보지 않았던 저의 아둔함 때문이었습니다.


  ‘고르게 가난한 사회’라고 적힌 ‘땅과자유’ 모임의 플래카드는 이후 이런저런 투쟁의 현장에 몇번 걸렸습니다. 특히 지난 4월 27일 대구지하철 아양교 역에서 달리는 지하철에 몸을 던져 한많은 생을 마감한 중국인 여성 이주노동자 고(故) 정유홍 씨와 관련한 투쟁을 위해 노동부 ‘고용안정센터’ 앞에 농성 텐트를 쳤을 때도 그랬습니다.


  악덕 기업주에 시달리다 시달리다못해 사업장을 옮겨 달라고 몇번이나 고용안정센터를 찾았지만 번번이 거절당해 절망할 수밖에 없었던 정유홍 씨는 결국 죽음을 택했던 것입니다. 이주노동자와 관련해 수많은 문제가 있지만, 그중에 하나가 사업장 선택과 이전의 자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자기가 일할 공장을 선택할 수 없는 이런 개떡같은 제도가 어디 있습니까? ‘사업장 선택과 이전의 자유’는 천부적인 권리가 아니던가요?


  각설하고, ‘고르게 가난한 사회’라는 구호를 보던 정유홍 씨의 동료 중국노동자가 말했습니다. “그래 맞다! 미친 듯이 돈 벌러 다니는 지금보다는 차라리 없어도 서로 돕고 살던 그때가 좋았던 것 같다. 그때는 적어도 돈 때문에 서로 아둥바둥 싸우지는 않았는데…” 시장경제가 도입되기 전, ‘마오’가 이끌던 시대를 그리워하는 넋두리였습니다.


  이주노동자 운동을 하면서 ‘고르게 가난한 사회’를 많이 고민했습니다. 우리의 탐욕이, 게걸스런 욕심이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이주노동자들을 저리도 벼랑으로 내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잘살 생각’만을 했다는 말입니다. 지금 나는 ‘잘살겠다는 꿈’이 좋은 것이긴 하지만, ‘경제적 풍요’가 그 기본적인 전제가 될 때에는 그것은 아름다운 꿈이 아니라 또다른 탐욕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강수돌 선생의 글은 ‘세계화’라는 꼭지를 달고 있습니다. 세계화를 주장하고 추진하는 사람들은 곧잘 신자유주의를 말하고 그 신자유주의가 ‘모두 잘사는 사회’를 가능하게 하는 길이라고 눈가리고 아웅합니다. 강 선생님의 지적처럼 세계화를 부르짖는 사람들이 ‘모두 잘사는 사회’를 핑계 삼아 수많은 이주노동자들로 하여금 집과 고향을 떠나 ‘이주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주노동’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면 어디에서든 ‘이주노동’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게 소위 세계화를 부르짖는 이들의 책임 아닙니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주노동’을 강요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고향에서 축출하고 또 한편으로는 더욱더 지속적인 착취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유입장벽을 계속 만들어 ‘이주노동’의 조건을 까다롭게 하는 이 아이러니를 우리는 일상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니 까다롭게 할 뿐 아니라 ‘이주노동’이 결국 ‘노예노동’으로 전락하도록 강요하고 있습니다.


  인간다운 삶을 위한 ‘건강한 노동’을 꿈꾸는 우리로서는 ‘모두 잘사는 사회’의 유혹을 물리침으로써 이주노동을 노예노동으로 내모는 자본의 탐욕을 물리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제 이주노동자들에게도 ‘고르게 가난한 사회’를 열심히 이야기해 볼 생각입니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버는 것 못지않게 사람답게 사는 것에 대해서도 고민하자고 말해 볼 생각입니다.


  설사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이 아무리 엄혹하더라도 그 엄혹한 조건 때문에 우리네 삶이 무조건 정당화될 수 없음을 역설해 볼 생각입니다. ‘고르게 가난한 사회’를 꿈꾸는 이주노동자들이 많아질수록, 그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모두 잘사는 사회’를 명분으로 또다른 착취자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김헌주(‘대구 이주공대위’ 전 공동집행위원장, ‘성서공단 노동조합’ 이주노동자 사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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