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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S.C.D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댓글 조회5,877회 작성일2004-04-08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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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북경 여성 회의에서 재일 한국인 여성인 김부자 등과 나는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워크숍을 조직했다. 그 곳에서 나는 '위안부' 문제가 한일 양국간에 국익을 거래하는 도구로 이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에서 한일 양국 페미니즘은 국경을 초월해야 한다고 발언했는데, 그에 대해 굉장히 강한 반발이 일어났다. 김부자의 문장에서 인용해 보자.


(우에노의 연설에서 이야기된) 페미니즘은 내셔널리즘을 초월할 수 있을 것인가를 둘러싸고...회의장에 있던 여성 가운데 한 사람인 한국계 미국인은 다음과 같이 반론했다. "우리 국경은 당신 나라 군대에 의해 침략당했다. 그렇게 간단하게 국경을 잊으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페미니즘이 내셔널리즘과 관계가 없다고 하는 것은 구미 페미니즘이 갖고 있는 자민족 중심주의적인 사고 방식과 같은 것이 아닌가. ... 내셔널리즘은 아시아 페미니즘에 중대한 문제이다."


여기서 김부자의 논점은 일본인 페미니스트가 침략당한 나라 여성들을 포함한 여성들에게 페미니즘이 국경을 초월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일본 및 일본인의 가해성을 무마시켜 버리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지적이다. 이 책(<내셔날리즘과 젠더>)의 제1부에서 내가 논해 온 것처럼 일본 페미니즘에는 국경을 초월했던 역사는 없다. 그것은 페미니즘이 논리 필연적으로 국가를 초월할 수 없다는 것이 되는 것일까? 이 책에서 내가 제기한 물음, 그리고 답을 추구해 온 물음이 바로 그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논해 온 것은 '2류, 3류 국민'까지 동원하고자 한 '국민화'의 함정과 거기에서 도망치는 것의 어려움이었다. 하지만 젠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거기에서 도망치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과 '그것이 운명이다'고 하는 것은 다르다.

만약 페미니즘이 근대의 산물이라고 한다면 페미니즘은 근대의 사정 거리를 넘을 수 없으며, 따라서 근대와 운명을 함께하게 될 것이다. 국민 국가론 용어로 말하면 페미니즘은 국민 국가의 틀 안에서 형성되어 기껏해야 국민 국가 안에서 젠더와 관계없는 '분배평등'을 요구하는 사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된다(일국 페미니즘!). 근대 페미니즘을 회고적으로 논하는 논조 속에는 근대 페미니즘을 사전에 시민 사회적인 부르주아 페미니즘으로 축소시킨 다음 그 역사적 한계를 지적하는 식의 '눈 가리고 아웅하기'에 가까운 것도 보인다. 하지만 내가 이 책에서 증명하고자 한 것은 근대 페미니즘의 역설, 즉 페미니즘이 근대의 배리 자체이며, 따라서 근대를 물어 찢는 것 외에 활로를 찾아낼 수 없다고 하는 필연이었다.

페미니즘은 국가를 초월한 적이 없었다는 역사에 근거해 페미니즘은 국가를 초월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면, 우리는 다시 한 번 각자의 국적하에 분단되어 버린다. 더 이상 누구도 "자매 연대의 전지구화 sisterhood is global"라는 낙천적 보편주의 입장에 서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젠더라는 변수를 역사로 들고 온 것은 그 아래에서 계급, 인종, 민족, 국적의 차이를 은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차이-게다가 너무도 자연화되어 있기 때문에 차이라고 인식되지 않는 차이, 말하자면 최종적이며 결정적인 차이-를 덧붙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포스트모던 페미니즘 하에서는 젠더말고도 인종이나 계급이라는 변수가 덧붙여졌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인종이나 계급이라는 변수가 젠더라는 변수를 은폐해 온 것을 페미니즘은 고발해 왔을 것이다. 인종이나 계급이라는 변수는 새롭게 발견된 것이 아니라 젠더 변수를 계기로 더욱 복합적인 카테고리로서 '재발견'된 것이다.

페미니즘의 목적은 어떤 배타적인 카테고리를 다른 배타적인 카테고리로 바꾸는 것이 아니다. '여성'이라는 본질주의적인 공동성을 내세우는 것도 아니다. '내'가 '여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처럼 '나'는 '국민'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러한 카테고리의 상대화야말로 페미니즘이 의도하는 바이다.

국민이라는 집단적인 정체성의 배타성을 초월하기 위해 다른 한편으로 불러낸 것이 '세계 시민'이나 '개인' 또는 '인간'이라는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원리이다. 모든 국적을 초월한 코스모폴리탄, 보편적인 세계 시민이라는 개념 또한 위험한 유혹으로 가득차 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모든 귀속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에 대한 환상을 갖게 해 마치 역사에서 부담해야 할 짐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게 한다.

'국민'도 아니고 '개인'도 아니다. '나'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은 젠더나 국적, 직업, 인종, 문화, 에스니시티 등 각양 각색으로 존재하는 관계성의 집합이다. '나'는 그 어는 것도 피할 수 없지만 그 어느 하나만으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내'가 거절하는 것은 단일 카테고리의 특권화나 본질화이다. 그러한 '고유의 나'-결코 보편성으로 환원된 '개인'이 아닌-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대표=대변'의 논리이다.

페미니즘이 국경을 초월하는 방식에는 분명 김부자가 염려하는 것과 같은 '제국 페미니즘'이라는 보편주의의 강요도 있을지 모른다. 그 점에 대해서는 충분히 경계해야 할 가치가 있지만, 페미니즘은 국경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것 역시 진실이다. 페미니즘은 국경을 초월해야 하며 또한 그럴 필요가 있다.

'위안부' 소송에서 개인 보상 논리가 그러한 '국경을 초월하는'의미를 갖고 있다. '전후 보상은 양국간 조약으로 보상이 끝났다'고 하는 일본 정부의 주장에 항의해 개인이 국가를 상대로 그 책임을 묻는 것은 '나'의 이해가 국가에 의해서 대변되지 않으며, '나'의 신체가 권리가 국가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안부'의 싸움, 즉 '나'의 존엄을 회복하고 싶다는 생각은 일본이라는 국가에 대치하는 것뿐만 아니라 한국이라는 국가에 대해서도 권리의 '대표=대변'을 거부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

만약 국가가 '나'를 범하고자 한다면? '나'는 그것을 거부할 권리도 자격도 있다. '나'의 책임이란 그 국가에 대한 대치와 상대화 속에서 생겨난다. 그것은 '국민으로서' 책임을 지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나'의 신체와 권리는 국가에 속하지 않는다. 그렇다, 여성은-그리고 남성도-말할 수 있다. '위안부' 문제가 여성의 '인권 침해'라는 언설로 구성된다고 한다면 '병사'로서 국가를 위해 살인자가 된 것 또한 남성의 '인권 침해'라고 입론하는 것도 가능하다. 인권론은 거기까지 사정 범위를 갖고 있을 것이다. '위안부' 문제가 들이민 물음은 단지 전쟁 범죄가 아니다. 전쟁이 범죄인 것이다.

국민 국가를 초월하는 사상은 필연적으로 이러한 결론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여성'이라는 위치는 '여성 국민'이라는 배리를 나타냄으로써 국민 국가의 균열을 노골화했지만, 그를 위해 '여성=평화주의자'라는 본질주의적인 전제를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국민 국가'도 '여성'도 함께 탈자연화, 탈본질화하는 것. 그것이 국민 국가를 젠더화한 다음 그것을 탈구축하는 젠더사의 도달점인 것이다. (우에노 치즈코 <내셔널리즘과 젠더>, '기억'의 정치학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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