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판

코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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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돕헤드 이름으로 검색 댓글댓글 1건 조회5,445회 작성일2006-09-11 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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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를 출발해 의정부로, 다시 인천으로 이틀간 전국행진을 하다 대추리로 돌아왔다.
당장 이곳에 경찰과 용역이 곧 쳐들어온다고 한다.
오늘밤 지킴이들은 맘 편히 잠을 자지 못하고 있다.


며칠 동안 밖에 나가 있으면서 대추리 생각이 많이 났다.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하면서 제일 불편하고 힘들었다.
불판집에 내가 만들어놓은 생태화장실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한번 퇴비화장실에 정이 들고 나니, 마실 수도 있는 깨끗한 물에 오줌과 똥을 눈다는 것이 참 고역이었다.


매일 촛불행사에서 보던 들소리 방송도 전국행진하면서 보지 못해서 힘들었다.
매일 보던 방송을 보지 못하니 참 답답하더라.


지킴이네집에서 손수 지어 먹던 따뜻한 밥과 채식 반찬들도 그리웠다.
행진하면서는 시간도 부족하고, 장소도 마땅치 않아서 도시락으로 식사를 대신하는 경우가 몇 번 있었는데, 그럴 때면 정말이지 내가 먹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저 밥과 김치와 깍두기 정도였다.
식사를 하러 간 식당도 고기집이기 일쑤였다.
채식을 시작한지 3년이 지났기에 이제는 이런 상황에 익숙해졌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이 무심결에 시켜버리는 고기범벅 식사를 그냥 조용히 거부하고, 내가 먹을 수 있는 것들만 골라서 먹으며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고 지내왔다.
간혹 인권 감수성이 높은 친구들이 채식주의자들을 배려해 '고기를 뺀' 식사를 꼼꼼하게 챙겨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예외적인 경우였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고기를 뺀 식사에 나온 것들은 계란이나 물고기 등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내가 못먹는 것들이다)


대추리에 들어오려면 원정삼거리와 내리에 버티고 서있는 수십 명의 경찰들을 상대해야 한다.
그들이 저지르는 불법을 일일이 열거하고 꼼꼼하게 따져보지만 그들은 요지부동이다.
그게 너무나 스트레스를 주기 때문에 나는 이제 그냥 조용히 신분증을 내밀고 만다.
이렇게 타협을 해야 하는 상황이 끔찍하게 싫었다.
이틀에 한 번 꼴로 식재료 등을 사러 밖을 나가야 하는데, 매번 스트레스를 받으며 저들과 대결하기가 싫어서 그냥 타협을 해야 하는 그런 것이 싫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계란후라이와 쏘세지와 멸치와 고기 우려낸 국물로 범벅이 된 식사를 받으면서 내가 배려 받지 못하는 현실과 어쩔 수 없이 타협을 해야 하는 상황이 싫었다.


이제는 대추리 안이다.
더이상 불법검문 때문에 시달릴 필요도 없고, 고기 냄새가 진동하는 설렁탕 집에 들어갈 필요도 없으며, 물을 낭비해가며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할 필요도 없다.


지난 5월 3일 밤이 생각난다.
그러니까, '전날 밤'이었다.
사람들이 대추초등학교에 많이 모여 있었다.
결의대회를 하고 있었다.
마이크에서는 연신 '전투'니 '투쟁'이니 '사수'니 '결사'니 하는 말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급박한 상황이었다는 것도 다 알고, 결의를 다져야 한다는 것도 모인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을텐데도 여전히 마이크에서는 사람들의 분노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라도 짜내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었던 것 같다.
모인 사람들은 이미 긴장한 사람들이고, 분노한 사람들이고, 결의를 밝힌 사람들이고, 각오한 사람들이었다.


정부가 마을을 파괴하려 들어온다고 해도 이번엔 '전날 밤'처럼 그렇게 하지 말고 그냥 나긋나긋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고 위로할 수 있도록 했으면 한다.
나래도 나가서 '아무것도 아닌 일' 같은 위로가 되는 노래를 불러야지, 결심해본다.


재밌는 이야기 하나 하련다.
아까 원정삼거리를 들어오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평소와는 다르게 이파리 네 개짜리 경사가 와서 직접 경례를 하며 소속을 잘 들리지 않는 말로 웅얼거리고는 검문을 하려 한다.
평소에는 전경이 길을 막아서며 경례 따위는 하지 않고 그냥 퉁명스럽게 '어디 가십니까?(실은 '너 이 자식, 데모하러 가는 것이지?)' 하는데, 오늘은 경사가 직접 나오다니 역시 다르긴 달랐다.
민변 변호사와 인권활동가들이 원정삼거리에 서서 하루종일 항의하면서 경찰의 위법사례를 수집해갔기 때문이었다.
굴욕감을 느꼈지만 일단 마을로 들어가 내 집을 지키는 것이 보다 중요했으므로 조용히 신분증을 내밀었다.


그 경사양반이 내 얼굴과 신분증에 나온 얼굴을 뚫어지게 대조해보더니, 이런다.


"사진에는... 이것을 뭐라고 하죠, 거시기, 그 코에 박는 반짝거리는 게 없는데, 어떻게 된 것입니까?"


(어휴ㅡ 물을 걸 물어라, 이 바보야)
난 천천히 코걸이를 빼보였다.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걸이니까.
내가 즉시 코걸이를 빼니까 경찰이 약간 당황한 듯 하다.
(참고로 말하자면 내 코걸이는 고정식이 아니어서 쉽게 넣고 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아, 저기 됐습니다. 그냥 가시죠..."


다음엔 당장 물로 간단히 지울 수 있는 문신이라도 얼굴에 좀 크게 그리고 들어가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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