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판

폐허, 상처, 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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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디온 이름으로 검색 댓글댓글 조회5,271회 작성일2006-05-09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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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공포를 사람들은 실감하지 못한다.
고통을 받아 안기에는 너무도 낯설고 불안하기 때문이겠지.
낯설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나 역시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믿기 힘들었을, 엄청난
파괴와 압살.
생명이라고는, 마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저 무지막지한 실체.
그것은 일찌기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
예정된 시나리오에 따라 진행되어 '공포'라는 결과물을 출력해냈던 이미지였을 뿐인데,
지금의 사태는 이런 저런 암시 조차 없이 전방위적으로 펼쳐진 실제 상황이므로
어안이 벙벙하다고 해야하나? 사람들은 믿기 어려워하고 믿기 싫어한다.
내 앞에서, 직접 보았다는 사람 앞에서,
자신들의 안일함을 방어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들은
경기를 하듯 놀란 얼굴이거나, 말을 잃은 척 하며 외면하거나, 그저
불편해한다. 그래, 이건 실제 상황이다.
기괴한 울음으로밖에 표현될 수 없는.

5월 광주 이야기가 여기 저기서 들려온다.
광주에서 평택으로, '화려한 휴가'에서 '여명의 황새울'로
장소와 작전명만 바뀐 반복되는 역사.
그래, 지금은 5월이다. 엄청난 생장의 달.
잎사귀들이 땅의 빛깔처럼 짙어지고, 쏘는 태양의 힘을 기꺼이 받아내는 달.
붉은 꽃 만발해 미쳐버릴 것 같은 달.
우리는 또다시 흐드러지게 피어 짓뭉개졌다.
공포는, 뒤늦게 내 뒷덜미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아아- 지워버릴 수 없는,
이젠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척척척
군홧발소리. 
밤새 땅을, 우리 가슴을 할퀴는 저 포크레인 소리.
사람들의 비명, 오열, 그리고 한 순간의 정적-
정신을 놓았다 잡았다 하는
헐떡이는 아이들의 숨소리.
도대체 무엇을 위해 오늘 하루도 살아야 하는가.

학원 아이들에게, 오늘, 합리적 이성에 대해 설명한다.
합리적 이성이라니. 내가 사는 세상에는 이미 합리적 이성은 패배했다.
그것은 사람들의 믿음과 공상 속에서만 존재할 뿐,
사람들의 이기심과 두려움에 기생해 세상을 잡아먹는 저 들판의 검은 벌레들과 무엇 다른가.
이제, 황새울 들녘의 노을도 더 이상 '아름다음'으로만 기억되지는 못하겠지.
저 푸른 보리밭도, 더 이상 '싱그러움'으로만 기억되지는 못하겠지.
아침나절 짖어대던 참새들의 소란스런 지저귐도,
멀리 날아가는 왜가리의 한적한 날개짓도
봄비가 내린 후, 땅에서 뿜어내는 더운 공기도, 더 이상 온전히 평화롭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슬픔도 절망도 두려움도, 아직은 때가 아니다.
저 들녘의 신음은 땅 속으로 얼마나 깊게 깊게 뿌리를 만들고 있는지를,
보이지 않아도 들린다.
우리는, 좀더 기다려야 한다. 기다리고 기다려야 한다.
마지막 순간이 오기 전까지 누구도 먼저 슬픔을 토하지 말 것.
누구도 먼저 한숨을 쉬지도 말며,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만 기억할 것.
꽃 지고
잎이 마르고
가지 속 물관과 체관이 타들어가
저 땅속 맨 끝 잔뿌리까지 싹 다 말라버릴 것같은 날들을
견뎌야 한다.
그래야, 꽃 진 자리에 작고 단단한 씨앗의 방들이 매달리고
느려서 잔뜩 영글은
혁명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 터지는 울음,
혼자 빈터에 나가 왈칵 쏟아내더라도

저 뻘 속같은
깊은 어둠과 외로움의 시간, 그 속에서
생명이 움틀 것이다.

그것이, 우주의 약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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