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판

소박한 생태주의를 향한 몇 가지 질문들

페이지 정보

작성자 이름으로 검색 댓글댓글 조회8,343회 작성일2007-02-06 14:21

본문

요즘 같은 사무실에 계신 양반이 어디에 쓴 글인데, 맘에 들어서 올려보아요.
-------------
소박한 생태주의를 향한 몇 가지 질문들
(오경석, 민주사회정책연구원, 사회학)


생태주의, 가 우리 시대의 화두가 된 지 이미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환경’은 별로 나아지는 게 없는 것 같다. 주택보급율은 이미 100%가 넘었다는데도, 우리네 들판과 숲의 곳곳은 아파트 건설의 열기로 분주하기만 하다. 규모농 정책으로 30여만 농가 가구의 철수가 예정되어 있고 그로부터 생겨날 잉여 농지들을 개발하기 위한 암중모색이 한참인 마당에, 한편에서는 농지 확보가 절실하다는 웃지 못할 이유로, 푸르른 바다들이 잔인하게 메워지고 있다. 더 이상 고속도로가 필요없다는 진단이 나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앞으로도 무려 16곳에 고속도로 추가 건설 계획을 세워 놓고 있다. 이러한 무모한 개발을 통해, 몇 십만에 달하는 우리의 이웃들은 소위 ‘개발 난민’이 되어, 유랑하는 신세로 전락할 수 밖에 없을 것이며, 우리의 산하는 머지 않아 생명체들의 온기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거대한 시멘트 무덤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 우리의 산하도 원하지 않는, 우리들의 삶의 (더구나 생태적인 삶의) 필요와 무관한 이러한 무모한 개발과 그로 인한 환경 파괴를 반길 사람들은 아마 그로부터 막대한 이익을 챙길 수 있는 몇몇 사람들을 빼놓고는 거의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어이없는 개발의 광기를 다스릴 수 있는 뾰족한 방도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가 이건 아니야, 하면서도, 그럼 어쩌지, 별 수 없는 것 아니야, 하고 있는 순간에, 오히려 ‘에코(혹은 에콜로지)와 그린’이라는 녹색의 강령마저 개발주의자들의 (이를테면 ‘생태’ 박물관, ‘그린’ 화장품, 심지어 ‘에콜로지’ 모피에 이르기까지) 최적의 마케팅 수단으로 조롱당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과연 생태주의 진영의 개발주의 진영에 대한 이러한 전적인 무기력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아마 우리들이 꿈꾸고 기획하는 생태주의가 지나치게 소박한 탓이 아닐까 싶다. 소박함이란, 말 그대로 꾸밈없고 거짓이 없고 수수하다, 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박함이란 바로 생태주의 본연의 미덕일 수 있다. 그러나 생태주의가 전투인 한, 소박함은 버려야 할 무기에 불과할 따름이다. 

소박한 생태주의는 환경 문제를 환경 자체의 문제로 파악한다. 환경 오염과 자원의 고갈이 환경 문제의 핵심이며, 따라서 자연의 보존, 보전, 복원이 최대의 과제가 된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두 가지 문제를 간과하고 있다. 우선 환경 (고유의 생존 조건의) 파괴라는 문제 자체가 우리 시대에 최초로 발현한 새로운 문제는 아니라는 점이다. 환경 문제 자체는 인류 문명의 개시와 함께 시작된 아주 오래된 것이다. 자연생태계의 종다양성은 농경 사회라는 고대 문명에 의해 최초로 교란되기 시작했으며, 고대의 여러 문명들이 자원의 남용으로 쇠망했음도 우리들은 잘 알고 있다. 다른 하나, 소위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의 출현으로 ‘탈신비화’됨으로써 자연은 그 고유한 가치와 권위를 상실한다. 이를테면 근대 이후의 자연은 모두 ‘사회화된’ 자연일 뿐이다. 이런 마당에 환경 자체를 보호하자는 것은 환경 문제가 왜 우리 시대만의 특별하며 긴박한 의제인지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미 도구화된 자연 자체를 보호하자는 것은, 그를 전제로 건설된 (환경 파괴적인) 근대 문명의 토대자체를 보호하자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소박한 생태주의는 환경 문제가 개인들의 개별적이며, 일상적인 노력으로 해소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경이로운 일곱 가지 물건(Seven wonders)”만으로 “지구를 살릴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동남아 지역의 국지적인 농촌 경제가 IMF가 강요한 단일 작물 재배 정책으로, 완전하게 파괴될 수 밖에 없었음을 아는 사람이라면, ‘타이 국수’를 많이 먹는다고 환경 문제와, 식량 부족 문제가 개선될 수 있으리라는 소박한 꿈은 꿀 수 없을 것이다. 공급 과잉의 유휴 전력을 소진하기 위해 값싼 심야 전략제도를 만들어내고, 그 사용을 권장하는 사회에서, 에너지 절약 캠페인에 적극 동참하는 성실한 개인들이 다수 존재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방사능 폐기물과 유전자 오염원을 마구 만들어내면서, 담배 꽁초 하나 함부로 버리지 않는 환경친화적인 시민이 되자고 설득하는 것은 또 무슨 의미가 있는가. 개개인의 인내와 절제심이 소위 개발 레짐의 반생태적 속도와 규모를 당해낼 수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소박한 생태주의는 과학(나아가 과학‘주의’ 그리고 ‘전문가 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를 철회할 의사가 없다. 이것은 두 가지 양상으로 구체화된다. 환경 파괴, 환경 오염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탐색, 분석해서, 그 원인을 제거하고, 책임 소재를 분명하게 추궁하려는 접근이 그 하나다. 그러나 환경 문제의 인과 연쇄는 본질적으로 무한하다. “모든 것은 모든 것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라는 명제가 괜한 이유로 생태학의 제 일의 원칙이 되었겠는가? 결국 이러한 생태주의의 원칙을 수용하는 경우, 과학은 환경 문제의 여러 원인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역할 이상을 수행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여러 원인 중의 하나를 제거하는 것이, 원인자체를 제거하는 것을 의미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노릇이다. 다른 하나는, 과학을 통해 환경을 ‘관리’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다. 관리를 위해 자연은 통제되어야 하고, 나아가 제조될 수 있어야만 한다. ‘복원된 청계천’은 오염된 자연을 제조된 자연으로 대체한 것에 불과하다. 그를 통해 사람들의 자연에 대한 감각 자체는 더욱 왜곡되고 말았다. 오염물질 배출 규제 기준도 비슷한 작용을 한다. 규제는 오염의 해악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화’할 뿐이다. 규제를 통해 오염의 위협은 ‘정상적인 것’으로 재규정될 뿐이다. 한 마디로 과학은 환경 위험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제조’해낼 수 있을 뿐이다. 치명적인 것은 과학 자체에 의해 ‘승인된 위험’이 보다 대규모의, 보다 심각한 환경 재앙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환경 문제와 관련, 과학은 “금기의 파괴자가 아니라 금기의 대상”일 뿐이다. 

소박한 생태주의는 제도적인 차원에서 환경 문제를 둘러싼 다양한 철학, 이념, 이해 관계의 조정을 시도한다. 그러한 조정이 보존 혹은 파괴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창출함으로써, 환경 문제의 격렬함을 체제내화하는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는 탓이다. 그러나 환경 문제의 핵심은 환경 문제가 기존 제도들의 자율성의 토대 자체를 박탈하는 전복적이며 탈범주적인 특성을 갖는다는 점에 있다. 이를테면 "핵발전소의 건설은 과학적 연구 결과를 토대로 법적 책임 한계를 거친 정치적 의사 결정을 통하여 경제성이 보장되는” 경우에만 가능해진다. 따라서 핵발전소가 만들어내는 환경 문제를 조정하기 위해서는, 과학, 법, 정치, 경제 영역을 관류하는 공통의 규준이 만들어질 수 있어야 한다. 헌데 각 제도들은 각자의 고유한 코드에 의해서만, 환경 문제에 부분적으로 반향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맥락에서 혹자는 환경 문제를 “산업적으로 생산되어, 경제적으로 외화되며, 법적으로 개인화되고, 과학적으로 정당화되어, 정치적으로 최소화되는, 산업사회의 온갖 제도의 토대에 깊숙이 뿌리박고 있는 산업 사회 (그리고 산업 사회의 제도들) 자체의 위기”로 규정하는 것이다. 결국, 환경 문제에 의해 그 정당성의 토대를 박탈당할 수 밖에 없는 기존의 제도들을 세련화시키는 방식으로, 환경 문제는 결코 제어될 수 없다는 뜻이다.(우리 나라의 ‘갈등조정위원회’가 단 하나의 환경 갈등도 조정할 수 없었다는 현실이 이를 여실히 입증한다.)

소박한 생태주의는 환경 문제의 전지구성, 총체적 지평을 말 그대로 너무 소박하게 신봉한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의 지구에 살고 있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것이 우리들이 똑같은 지구에 살고 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환경 문제가 전지구 공간을 평등하게 포용하지만, 환경 문제의 강도가 모든 지역에 평등하게 분배되는 것은 아닌 탓이다. 지구라는 유일한 생태계 전체를 거주 공간으로 삼는 거대한 생명체는 존재할 수 없다. 수많은 작은 생태계들의 무한한 조합이 지구라는 공통의 생태계의 실제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지구만을 강조하게 되는 경우, 강한 생태계와 약한 생태계, 환경 파괴의 수혜자와 피해자를 동일시하는 ‘허구적 혹은 폭력적 보편화’라는 전체주의의 오류를 답습하지 않을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전지구라는 총체적 지평에 대한 강조가 아니라, 지역 생태계 차원에서, 차별적으로 발현되고, 혹은 강요되는 환경 불평등을 어떻게 최소화시킬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정답을 찾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오답을 거부하는 것은 용이한 일이다. 결코 하나의 생태 전략(이를테면, 오염 물질 배출 및 개발 제한에 대한 전지구적으로 동일한 규준)만이 주창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수많은 생태계 각각에 어울리는, 수많은 생태적 전략들이 차별적으로 배치될 수 있어야 한다. 덧붙여 생태주의자는 전지구를 구원하겠다는 ‘거인의 꿈’을 접을 수 있어야만 한다. 환경 문제의 해법과 관련, 거인은 전혀 힘을 쓸 수 없는 무력한 존재다. 도대체 “전체로서의 사회와 환경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 그 누구에게 어떤 행동을 직접적으로 강요할 수 있다는 말인가?”

소박한 생태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환경 자체가 아니라 사회를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개인이 아니라, 구조를 볼 수 있어야 하며, 과학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를 철회할 수 있어야 한다. 제도적인 장치를 통해 환경 문제의 해법이 말끔하게 합의될 수 있다는 꿈을 접을 수 있어야 하며, 전지구를 호령하는 거인의 기개를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싸울 수 있어야 한다. 이 싸움은 전방위적이되, 아주 작아져야 하며, 보이지 않는 것들과의 투쟁까지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싸움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개발 레짐과 그 전위대들과 맞서야함은 물론이요, 자연과 과학과 제도의 이름으로, 환경 파괴의 전제와 토대를 ‘합법화’하고 ‘보호’하려는, 소박한 생태주의자들과도 맞서 싸울 수 있어야 한다. 왜 나는 이 싸움에 보다 치열하게 나서지 않으려하는가. 왜 나는 여전히 보다 작아지려 하지 않는가. 그 보이지 않는 ‘중심을 향한 꿈’과도 싸울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참고한 책들]

가타리, 펠릭스, 1989, 세 가지 생태학, 윤수종 옮김, 2003, 동문선
라이언, 존, 1999, 지구를 살리는 7가지 불가사의한 물건들, 이상훈 옮김, 2002, 그물코
루만, 니클라스, 1986, 현대사회는 생태학적 위협에 대처할 수 있는가, 이남복 옮김, 2002, 백의
초스도프스키, 미셸, 1997, 빈곤의 세계화, 이대훈 옮김, 1998, 당대
홍성태 엮음, 2005, 개발공사와 토건국가: 개발공사의 생태민주적 개혁과 생태사회의 전망, 한울
Beck, Ulrich, 1991, Ecological Enlightenment: Essays on the Politics of the Risk Society, Humantity Books
  • 트위터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