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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외국인보호소의 겨울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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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마님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11.♡.67.135) 댓글댓글 조회5,226회 작성일2004-04-07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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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가 출발했다. 창밖으론 이내 황량한 겨울 논밭이 펼쳐졌다. 길눈이 어두운 나는 기사분께 말을 건넸다. “외국인보호소 앞에서 좀 알려주세요.” 대뜸 뒤에 있던 아주머니가 내 말을 받아치신다. “거긴 보호소가 아니라 형무소예요.” 지난 2월25일, 정부의 불법체류자 단속이 시작된 후, 화성 외국인보호소는 때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낯선 건물 안의 조그마한 면회 대기실은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한참을 기다렸다가 순서가 되어 면회실에 들어서자 두 명의 불법체류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깨비와 굽다였다. 그들은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전면 합법화를 주장하며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하다 집회 중에 붙잡혀 이곳에 온 사람들이다. 유리창 너머로 앙상하게 드러난 깨비의 쇄골이 눈에 들어왔다. 수분이 빠져 푸석푸석해진 굽다의 얼굴도 눈에 띄었다. 그들은 겨울나무처럼 메말라 있었지만 그들의 입가엔 반가움의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깨비와 굽다는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불법 연행과 강제 추방을 거부하며 20일이 넘게 식사를 거부하고 있었다.

보호소행 버스에서 들었던 이야기처럼 그곳은 외국인을 ‘보호’하는 곳이 아니라 그들을 ‘감금’하는 곳이었다. 면회실에는 양편을 가르는 유리벽만으로 모자랐는지 가느다란 쇠창살이 박혀 있었다. 유리벽 가운데에 조그만 구멍들이 뚫려 있었지만, 크게 소리를 질러야만 우리 목소리가 건너편에 전달되었다.

단식이 장기화되면서 그들의 몸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고 있었다. 특히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깨비의 몸무게는 36㎏. 그의 혈당치는 언제든 쇼크가 일어날 수 있을 만큼 떨어져 있었다. 큰 소리로 건너편에 말했다. “병원에 가야 한다고 얘기해 보셨어요”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표정은 어두웠다. 매 시간 혈당치를 확인해야 할 만큼 깨비의 상태는 위험했지만, 그는 잠깐 의사를 만났을 뿐 병원에 가지 못한 채 ‘형무소’에 방치되고 있었다. 병원에 보내달라 말하면 “밥 안 먹으니까 아프지. 그러지 말고 밥 먹어!” 소리를 듣는다 했다. 단식의 힘겨움 탓인지 그 말을 건네는 깨비의 목소리는 결기가 느껴지긴 했지만 아주 조그마했다.

굽다는 명동성당 농성단에서 밥을 많이 먹기로 소문난 서른살 청년이다. 그래서 농성단 사람들은 몹시 그를 걱정했다. 굽다가 밥을 굶다니, 얼마나 힘들까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씩씩하게 단식을 견디고 있었다. 굽다는 연신 팔을 치켜들며 어설픈 한국 발음으로 “투쟁!”을 외쳤다. 농성단 사람들 중 누가 제일 보고 싶냐 물었더니 그는 바로 한 친구의 이름을 댔다. 고국에서부터 함께 지냈고, 함께 한국에 건너와 같은 공장에서 일하다가 또 함께 이주노동자의 노동조합에 들어온 친구가 굽다는 눈에 밟히는 듯했다. 그는 마음을 다잡는 듯 표정을 가다듬더니 환히 웃으며 자기는 잘 있으니 그 친구를 챙겨달라 우리에게 당부했다.

깨비와 굽다의 고국 네팔은 현재 내전중이다. 네팔 정부는 군인이건 민간인이건 빨갱이 딱지가 붙은 사람은 가릴 것 없이 사살하고 있다. 한때의 한국처럼 말이다. 한국 정부가 그들을 강제 추방시키면, 그들의 목숨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런 벼랑 끝에서 그들은 노동조합을 만들고 농성을 하고 집회를 하며 머나먼 타국에서 노동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외쳐왔다. 그리고 보호소에 들어와서까지 목숨을 걸며 싸우고 있다. 그들의 얼굴에서 우리가 익히 들어왔던, 그리고 명동성당 농성단의 마임 공연팀 이름이기도 한 전태일의 모습을 떠올렸다면 그건 나만의 착각일까.

긴 기다림에 비해 면회 시간은 너무 짧았다. 자리를 떠나는 그들은 연신 뒤돌아보는 것으로 자신들의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렇게 그들은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때를 기다렸다는 듯 보호소 안으로 단속에 걸린 이주노동자들을 가득 채운, 대한민국 법무부 마크가 찍힌 버스가 들어오고 있었다. 오늘도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그렇게 차디찬 겨울을 보내고 있다.  (임윤희/이주노동자 합법화를 위한 모임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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