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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관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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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현장노동자 이름으로 검색 댓글댓글 조회5,224회 작성일2004-05-23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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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조관료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리고 그것에 맞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


7월 1일 철도노조 천환규 위원장의 파업 철회로 현장 활동가들과 조합원 대중은 배신감에 치를 떨어야 했다. 파업 철회로 철도 투쟁만이 아니라 달아오르던 03년 투쟁전선에 찬물이 끼얹어졌다. 철도 노동자들만큼은 아니더라도 철도 투쟁으로 고무된 타 사업장, 타 업종 노동자들 또한 배신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노조 지도부의 배신은 이미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최근에만 하더라도 재작년 울산 화섬3사 연대투쟁 당시 현대자동차 노조의 7.5 총파업 철회, 작년 발전 노동자의 38일 파업투쟁을 백기투항으로 끝나게 한 4.2 총파업 철회, 그리고 이번 철도노조 파업 철회에 이르기까지 이제 노조 지도부의 배신이 일상사가 되고 있는 지경이다.
조합원들은 결연히 파업을 사수하려고 하는데 여론 악화를 핑계로 집행부가 멋대로 파업을 접거나, 또는 파업에 들어가겠다고 약속해 놓고 ‘현장에 동력 없다’는 핑계를 대면서 파업 철회를 선포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 거듭된 노조관료의 배신으로 솟구치던 투쟁이 일거에 무너지면서 노동자의 생존권은 계속 후퇴하고 자본의 현장 탄압과 통제는 더욱더 극심해지고 있다.
공식 노동조합 지도부에 의해서만 파업투쟁이 가능하다는 생각, 노조 집행부의 주도 없이는 파업이 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배신을 막아낼 길이 없다. 더 이상 노조 지도부에 의존하다가 배신당하는 사태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노조운동 일반과 남한 노조운동의 역사적 발전단계, 노동조합 집행부의 역할 등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때다. 무엇보다도 노조관료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획득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에 기초해 노조운동 전략․전술을 내와야 한다.

노동운동사는 또한 노조 지도부들의 배신의 역사이기도 하다

국제 노동운동사에서처럼 남한에서도 노동자계급은 영웅적 투쟁과 배반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지도부에 의해 ‘수요 파업/ 토요 집회’로 전환하면서 무너져 내린 96-97년 노개투 총파업이 그렇다. 또 그 후 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투쟁과 작년 발전 노동자 투쟁 등에서도 노동대중이 보여준 영웅적인 비타협적 투쟁과 지도부가 보인 소심함과 타협주의, 배신의 역사를 볼 수 있다.
노동조합 관료주의는 가장 전투적이고 대규모적인 파업에서도 결국 그 파업의 확대를 가로막고 나아가 억눌러서 패배로 이끄는 결정적인 역할을 해 왔다. 이 노조 관료주의를 분쇄하지 못한다면 노동자의 해방은 물론 자본의 공격에 대항하는 생존권적 투쟁조차도 올곧게 펼칠 수 없다는 것을 노동운동의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노조 관료주의의 분쇄는 노조운동에서 선진활동가들에게 제기되는 근본적인 임무 가운데 하나다. 노조 관료주의는 노동조합 운동이 합법적이고 대중적으로 전개된, 따라서 제도권 속에 편입되고 개량주의가 대중적 기반을 갖게 된 서구에서 먼저 나타났다. 상대적으로 오랜 계급투쟁 평온기를 거치면서 서구 노동조합은 체제내화 되고 노조 상근 전임자층도 안정적으로 형성되었다. 노조운동에서 개량주의가 득세하고 전임자층이 노동조합의 관료화를 주도해 나갔다. 이들 노조관료들 중심으로 개량주의적이고 의회주의적인 노동당․사회당 등으로 정치세력화가 이루어졌고, 이것이 이번에는 노조운동의 관료화와 개량화를 더욱 부추겼다. 
남한의 경우 노동조합(민주노조)은 87년 대투쟁을 통해 현장 대중투쟁기관으로 출현하였다. 그러나 90년대 초중반 이후 대공장에서 자본의 포섭 정책과 노사협조주의 세력이 득세하면서 민주노조는 대중투쟁기관으로서의 성격을 탈각해 갔고, 교섭중심의 일상적 노동조합으로 굳어져 갔다. 또 상급단체 결성과 함께 노조 집행부들 및 투쟁 명망가들이 조합원 대중으로부터 자립화하면서 관료층으로 형성되어 갔다. 이러한 추세가 점점 굳어져 가면서 현재는 노조운동이 본질적으로 서구와 다르지 않은 양상을 보이고 있다.

조합원 대중으로부터 자립화한 노조관료 집단

노동조합 관료는 노동조합이 체제 내에서 합법적이고 안정적으로 기능하게 될 때 사용자와 교섭하는 일을 주업으로 하는 인자들과 그렇지 않은 노동자 대중 사이에 분업이 생겨나는 가운데 형성된다. 투쟁 지도부로서 보다는 중재자, 불만 관리자. 자본주의 사회의 노자 양대 계급 사이에서 줄타기하기 등을 자신의 역할로 한다. 노조관료는 기본적으로 현상유지적인 사회계층으로 자립한다. 그래서 투쟁을 견제, 통제하면서도 그렇다고 완전한 어용은 아니다. 만일 노골적인 어용으로 가면 조합원 대중이 더 이상 노동조합을 필요 없다고 여기게 되므로 이런 정도로까지 가는 것은 교묘히 피한다. 노조관료는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와 명망의 원천인 노동조합 조직을 보존하는 일, 즉 조직보존주의에 사활적인 이해관계를 가진다.
노조관료는 선진층 조합원과 후진층 조합원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 수동적이고 조합 일에 무관심한 조합원들에 기대어, 활동적이고 전투적인 선진 부위의 조합원들을 견제한다.또한 노조관료는 노동자들이 여러 노동조합으로 분열되어 있는 상황으로 인해 완전히 통일된 행동을 조직하는 일이 어려운 점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투쟁회피주의에 대한 알리바이를 만든다. 연대파업을 기피하고, 그 책임을 서로 떠넘기면서 서로 간에 변명거리를 제공한다. 단사 노조는 연맹에, 연맹은 단사노조에, 그리고 서로 다른 단사노조에 책임을 떠넘긴다.
자본으로부터 오는 위로부터의 압력과 조합원 대중으로부터 오는 아래로부터의 압력이 둘 다 강해서 노조관료는 화해할 수 없는 두 세력 사이에 낀 샌드위치 꼴이 될 때도 있고,반대로 양방향의 압력이 모두 약해서 비교적 운신폭을 크게 누릴 때도 있다. 그러나 관료는 늘 자신들의 자립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므로, 어느 경우든 노조 관료가 일반 노동자들을 진짜 대표하고 있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노조 상층부 내 좌파블록을 강화할 것인가, 평조합원 운동을 강화할 것인가?

좌파 노조관료와 우파 노조관료 사이의 차이는 현장의 전투적 활동가들의 입장에서 볼 때 전술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들 간의 ‘좌우’ 차이보다도 관료로서의 근본적인 동질성을 보아야 하며 이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투쟁이 중대한 위기 국면에 처할 때(자본과 정권이 총파업을 무력으로 진압하려는 결정을 내릴 때 파업을 더욱 확대시키느냐 아니면 움츠려 드느냐와 같은 중대한 고비에) 좌파 관료와 우파 관료의 차이라는 것은 부차적이다. 그러한 때에는 좌우를 막론하고 관료 전체가 노동자의 투쟁을 통제해 들어간다. 노개투 총파업때 지도부가 솟구치던 총파업을 ‘수요 파업, 토요 집회’로 전환하여 투쟁을 파괴할  당시 지도부 내에 본질적인 이견은 없었다. 노조관료는 결정적인 때면 언제나 좌우를 막론하고 자본가 국가의 편으로 돌아선다.

 그러면 이러한 노조 집행부의 배신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혁명적 선진노동자들이 노조 지도부들을 견인, 전취하거나 또는 스스로 선거를 통해 노조 집행부가 되어 노동조합을 혁명적․계급투쟁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이는 그릇된 환상이다. 과거 국제노동운동에서 스탈린주의의 ‘혁명적 노조’론이나 우리나라 노동운동 일각에서 제기된 ‘계급투쟁적 노조’론(또는 ‘계급적 산별노조’론)이 이런 경우이다.
노동조합을 혁명적으로, 계급투쟁적으로 되게 하는 것은 그 말만 놓고 보면 당연히 필요한 일이며, 선진노동자의 항상적인 임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론적 차원이 아니라 현장의 선진활동가 주체가 운용하는 전술의 문제로 들어가면 그것은 현장중심 운동 및 현장권력 쟁취의 과제와 대립하게 된다. ‘계급투쟁적 노조’론은 일차적으로 노조 집행권력 장악을 목표로 하는 노선이다. 반면 현장 전술주체들의 전술적 목표는 일차적으로 현장권력 쟁취 및 강화이다. 노동조합을 계급투쟁적으로 되게 하는 것은 이러한 목표를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결과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그 자체가 전술적 목표인 것은 아니다. 이러한 현장권력 쟁취의 과제와 분리되어 그 자체가 전술적 목표가 되는 ‘계급투쟁적 노조’ 노선은 필연적으로 상층부 운동, 관료적 운동으로 빠져들어 가 현장중심의 평조합원 운동과 대립하게 마련이다.
실제로 서구에서 유럽공산당 소속 노조 활동가들이 노동조합을 좌익적으로, 계급투쟁적으로 바꾸겠다는 명분 아래 사민당 소속 노조 지도부들에 맞서는 상층부 내 ‘좌파블록’ 전술로 전환하면서 현장중심 운동에 대립하는 좌파관료 운동으로 타락한 역사적 사례가 있다.
남한에서도 ‘계급투쟁적 노조’론이나 ‘계급적 산별노조’론이 체계적인 운동노선으로 발전하면 이러한 좌파 노조관료 지향 운동으로, 노조 상층부 내 좌파블록 전술로 나타날 것이다. 비록 이러한 ‘론’을 내세우지는 않았더라도 과거 현자 이상욱 집행부나 민주노총 이갑용 집행부 같은 좌파 지도부들이 노동조합과 민주노총을 전투적으로, 계급적으로 만들겠다고 공언하지 않아서  총파업을 철회하는 배신을 저지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들 좌파관료들은 노조를 전투적으로, 계급적으로 혁신하겠다고 공언하여 당선된 집행부들이다.
‘계급투쟁적 노조’론은 노조관료의 성격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며, 그 계층에 대한 환상을 부추김으로써 전투파 평조합원들의 의식과 행동을 무디게 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내가 집행부를 장악하면 노동조합을 계급투쟁적, 혁명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순진무구한 주관주의적 망상이다. ‘계급투쟁적 노조’론의 현실적 표현인 좌파노조관료 지향 운동 또는 노조 상층부내 좌파블록 전술은, 현장중심의 평조합원 운동을 강화하거나 현장권력 쟁취에 주력하기 보다는 노조 선거를 통한 집행부 장악에 전술과 실천활동의 중심이 가 있는 현단계 대공장 현장조직운동 속에서 사실상 널리 실천되고 있다.
 
한편 이러한 혁명적 노조론이나 계급투쟁적 노조론이 초좌익적인 편향으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다. 기존 노조운동 속에서 실망을 느끼고 기존 노조로는 혁명적으로, 계급투쟁적으로 되게 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기존 노조운동 밖에서 새로운 혁명적 노조를 건설하자는 ‘적색노조’ 노선이 그런 경우이다.
혁명적 선진노동자들은 기본적으로 평조합원들의 자주적 활동을 고무하고 비공인 현장중심 운동을 발전시키는 데 주력한다. 노동조합이 계급적으로, 계급투쟁적으로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이러한 현장중심 평조합원 운동의 강화를 통해서 노동조합 기구 내 타협적이고 동요하는 인자들이 체계적으로 배제되어 투쟁기관으로 바뀌어질 때에만 가능하다. 예를 들어 노동조합 쟁대위, 비대위가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대표들로, 현장 지도력을 갖춘 인자들로 확대 재편되는 경우가 그러하다. 전투적 평조합원 운동을 강화시키는 전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전술을 국제노동운동사를 통해 제기되어 온 노조운동 전략․전술의 맥락 속에 놓고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노동귀족’과 노조관료

러시아 노동자 혁명의 지도자 레닌은 1902년에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운동의 교본이 되는 책을 썼다. 이 책 이래 레닌과 볼셰비키당의 노동조합론은 일반론적인 수준에 머물렀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들의 활동무대인 러시아에 대중적인 합법 노조운동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체적인 노조운동 전술을 발전시킬 여지가 없었다. 달리 말하면, 당시의 서구와는 달리 러시아에서는 노조운동 내에 대중적인 기반을 두고 있는 개량주의나 노조관료 같은 현상이 존재하지 않은 덕분에 이와 씨름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레닌과 볼셰비키는 대중적인 개량주의(대중적 노조운동에 뿌리를 내린 개량주의)와 노조관료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키지 않고서도 러시아에서 노동자 운동에 효과적으로 개입하고 노동운동 전략전술을 구체화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론적 수준의 노동조합론으로는 서구나 현재의 남한에서처럼 노동조합 관료와 평조합원의 이해관계가 대립했을 때 나타나는 복잡한 사정을 명확하게 다룰 수가 없다. 나중에 레닌은 1914년에 가서 제1차 세계대전(제국주의 전쟁)이 터지면서 서구의 노조운동에 대해 집중적으로 고민할 수밖에 없게 되자 기존의 일반론을 넘어서 노동귀족론 같은 좀더 구체적인 분석을 발전시켰다. 그 동안 노동자 국제주의를 외치다가 막상 제국주의 전쟁이 터지자 자국 자본가계급의 전쟁노력을 지지하는 서구 노조운동 지도부들에 대해 레닌은 경악하였다. 레닌은 이러한 배신을 노동귀족 이론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서구 노동운동의 개량주의는 러시아의 개량주의와 성격이 달랐다. 러시아의 개량주의는 대중적인 합법 노조운동에 둥지를 틀 수 없었으며, 따라서 그 기반이 대단히 취약했고 멘셰비키 당에서 보듯이 정파적인 운동을 넘어서지 않았다. 반면 서구에서의 개량주의는 대중운동에 광범위하게 뿌리내린 대중적 개량주의였다.
레닌의 노동귀족론은 이 서구 개량주의의 경제적 토대를 파헤치고자 한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한 줌도 안 되는’ 노동귀족의 경제적 토대는 제국주의와 이 제국주의적인 식민지 착취가 가져다주는 초과이윤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노동귀족론의 기본 취지는 옳지만, 서구 자본주의의 대팽창과 제국주의적 초과이윤이 가져다 준 ‘매수’ 효과는 “한 줌도 안 되는” 노동귀족만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대부분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즉 레닌이 이해한 것보다 서구 개량주의의 기반은 훨씬 더 대중적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실천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서구에서 혁명적 노동운동을 건설하려는 노력은 러시아보다 더 커다란 어려움들에 맞닥뜨릴 것이며, 따라서 강고하고 지속적인 투쟁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레닌은 노동귀족을 노동자계급 내에서 “한 줌도 안 되는 협소한 층”이라고 하여 그 대중기반을 과소평가한 반면(즉 노동귀족을 형성시켰다고 하는 그 제국주의 초과이윤이라는 것이 실제로 노동자계급 전반에 미친 영향력에 대해서는 간과한 반면), “한 줌도 안 되는” 노동귀족층 자체에 대해서는 그 범주를 너무 광범하게 잡고 있기도 하다. 1916년 10월에 쓴 <제국주의와 사회주의의 분열>이라는 글에서는 위험하게도 영국과 독일의 노동조합원 전체(조직 노동자)를 밑바닥 노동자층과 대비시켜 노동귀족으로 보는 듯한 경향까지 나타난다.
한 걸음 나아가 볼셰비키 지도부의 일원으로 코민테른 총책이었던 지노비에프의 경우는 아예 직접적으로 등치시키고 있는데, 그가 쓴 <기회주의의 사회적 뿌리>라는 글에서는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대표적인 대공장 노동자층이었던 군수산업 노동자 전체를 노동귀족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날 무렵 전유럽에서 바로 이들 군수공장 노동자들을 비롯하여 가장 잘 조직된 금속산업 노동자들이 새로운 전투성을 보이면서 투쟁의 선두에 섰다. 이런 식의 노동귀족론은 그 논리적 결론으로까지 끌고 가게 되면 기존 노동조합에서 활동하기를 그만 두는 초좌익적 기권주의 태도로 빠질 수도 있다는 점을 조심해야 한다. 노조관료와 평조합원을 구별하지 않는 이런 류의 노동귀족론은 실천적으로 초좌익적인 편향의 위험성을 항상 내포하고 있다.

대공장 노조관료와 조합원 대중은 구별되어야 한다

현재 남한에서도 대공장(대사업장) 노동자들을 노동귀족으로 보아 대공장 사업을 포기하고 비정규직운동 중심론을 제기하면서 처녀지로 존재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민주노조운동의 혁신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향후 운동을 주도할 것이라는 주관주의적 믿음을 유포하는 경향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남한의 대공장 노동조합 내부에서 노조관료와  평조합원 대중 사이에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현실을 구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추상적으로 대공장 노동조합을 한 덩어리로 뭉뚱그려 버린다. 대공장 노동조합의 집행부와 대의원, 현장제조직 활동가들은 많은 경우 ‘노동귀족적’인 경향, 즉 기회주의적이고 출세주의적인 경향을 체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들의 ‘노동귀족적’인 경향은 경제적 소득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다. 체제 내에서 사회적 명망과 정치적 출세에 대한 전망과 가능성, 그리고 여기서 비롯하는 자본가체제의 지배적인 여론과 이데올로기에 민감한 속성 등이 그 원천이다. 대공장에서는 이들이 관료적인 노조운동을 안정적으로 할 수 있게 해주는 물질적․대중적 토대가 존재한다. 수천, 수만 명을 조합원으로 하고 있는 노동조합 자체가 그러한 토대이다. 이러한 ‘노동귀족적’인 개량주의와 조합원 대중의 ‘개량주의’는 구별되어야 한다. 단순히 자신의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임금인상을 최대한 쟁취하고 고용안정을 보장받으려는 조합원 대중의 생존권적 개량 추구를 가지고서 ‘대공장 노동자들은 맛이 갔다’고 해서는 안 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생존권적 개량 추구를 실리주의와 타협주의로 몰아가는 의식적인 개량주의․기회주의 인자들이다. 이러한 대공장 노조관료 ․ 기회주의 운동세력들과 조합원 대중을 구별하지 않고 싸잡아서 정규직 대공장 노동자를 ‘노동귀족’으로 규정하는 것은 노조관료 ․ 기회주의 운동세력들 아래 대중을 더욱더 붙들어 매어놓은 꼴이 될 뿐이다.   
결국 이러한 형태의 노동귀족론을 주창하는 좌파들은 기존 노조에 대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분석 없이 관념적으로 이상적인 노조를 상정하여 ‘계급투쟁적 노동조합’을 외치다가 결국은 기존 노조운동에 실망하여 그 속에서의 활동을 포기하고 새로운 분리된 비정규직 운동에서 그러한 ‘계급투쟁적 노동조합’의 가능성을 찾고 있다. 이것은 실천적으로 초좌익적인 적색노조론의 재판일 뿐이다.
비정규직 운동이 기존 노조운동과 분리된 별개의 공간에서 발전하여 밖으로부터 기존 노조운동을 혁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최근 계급투쟁의 경험으로부터 보더라도 맞지 않다. 남한에서 비정규직 운동 또한 점점 더 대사업장 비정규직 투쟁의 형태로, 특히 사내하청투쟁의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99년 한라중공업 사내하청투쟁 이래 캐리어와 기아광주 그리고 현재의 현자 아산사내하청, 현자 비투위․ 비정규직노조에 이르기까지 대공장 사내하청투쟁은 출발부터 정규직 노조와 어떤 형태로든 연관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정규직 노조로부터 일시적으로 지원과 협력을 얻는 경우가 있더라도 기본적인 양상은 악의적인 외면과 방치, 심지어는 통제와 탄압으로까지 나타나고 있다. 자본의 정규직․비정규직 분할지배가 깨지지 않고 오히려 강화되는 데에는 정규직 노조의 이러한 태도가 단단히 한 몫 하고 있다. 이는 대사업장 노조를 노조관료와 관료 지향적인 운동세력들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공장 노조관료와 비정규직 운동

따라서 대사업장 비정규직 운동은 출발부터 대공장 노조관료주의와 맞서며 이 관료주의를 타격, 무력화시키지 않고서는, 그리하여 정규직․비정규직 공동투쟁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돌파하지 못하고서는 전진할 수가 없다. 이것은 반드시 거창한 투쟁 목표가 아니더라도 비정규직 처우개선 같은 소박한 투쟁에서조차도 그러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투쟁조차도 비정규직의 투쟁은 정규직 노조의 관료적 운동질서와 충돌하기 마련이며, 따라서 정규직 노조관료들로서는 이러한 투쟁이 관료적 운동질서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데 이해관계를 가진다. 이런 점에서 비정규직 운동, 특히 대공장 사내하청투쟁은 원하청 자본과의 투쟁과 정규직 관료주의와의 투쟁을 통일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현재 현자 비정규직노조를 보더라도 현자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따로 노조를 만들어야 할 이유가 없다. 오직 이유가 있다면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을 조합원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현자노조가 비정규직 투쟁을 방치하고 있기 때문에 비정규직이 따로 노조 깃발을 들 수밖에 없었고, 이것은 사실상 정규직․비정규직 공동투쟁이 정규직 노조에 의해 일차 좌절된 것을 뜻한다. 현자 비정규직노조는 비록 노조 형식에서 정규직노조와 별개가 되어버렸지만, 자본의 분할지배를 깨는 데서 정규직의 전투적 현장활동가들 및 평조합원들과 함께 정규직․비정규직 공동투쟁을 이루어내는 데 사활을 걸어야 한다. 이 공동투쟁을 가로막는 정규직 노조관료와 관료적 운동세력을 타격, 무력화시키는 과제에 관한 한 정규직의 전투적 평조합원 운동과 별개의 분리된 운동일 수가 없다. 

‘좌익’ 소아병

기존 노조운동과 분리된 별개의 영역에서 운동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것은 사실상 노조관료와의 투쟁을 회피하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과거 서구 혁명운동 내에서 나타난 ‘좌익’ 소아병적 경향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전략․전술의 정수를 담고 있는 <<‘좌익’ 공산주의 - 하나의 소아병>>(1920년)이라는 소책자에서 레닌은, 기존 노조가 개량주의로 완전히 물들어 있어 노조에서 탈퇴하여 혁명주의자들 자신의 협소한 전투적․혁명적 단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들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에 대해 그는 “대중이 발견되는 곳은 어디서든 그것이 반동적인 노동조합이라도 그 안에서 작업해야 한다”고 논박했다. 그러나 그 소책자는 그것이 가진 전략전술상의 거대한 의의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혁명주의자들이 노조운동 속에서 부딪히고 있는 구체적인 딜레마와 난관에 대해서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 한 것으로 보인다. 노조 안에서 끈질기게 작업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주장을 빼고는 어떻게 활동할 것인지에 대해 아무런 지침이 없다는 것이다. 특히 노조관료주의 문제, 그것에 맞서 어떻게 대중의 자주적 운동을 강화시킬 것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노동조합을 전취하라!”?

당연히 서구의 혁명주의자들로부터, 노조관료가 지배하는 노동조합을 너무 간단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는 문제제기가 나왔다. 당시 코민테른 의장이었던 지노비에프의 주장은 서구 노조운동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당과 노동조합 간의 관계에 대한 이상적인 상을 제출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말하자면, ‘혁명정당의 지도 하에 임금제도 철폐와 사회주의의 승리를 위해 분투하는 투쟁기관이 노동조합이다’라는 식의 지노비에프의 규정은 사실상 주관적인 바람이지 실제 노동조합에 대한 평가가 아니다.(혁명주의자가 잡으면 노동조합도 혁명적으로 될 수 있다거나 아니면 노조관료를 혁명주의 쪽으로 견인하여 노조를 혁명적으로 바꿔낼 수 있다는 주관주의적 발상과 궤를 같이 한다). 이와 같이 노조를 이상적으로 설정해 버리면, 이런 ‘혁명적’ 노조와 실제 악명 높은 개량주의 노조관료들이 지배하는 작금의 노조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큰 간극이 생긴다. 결국 혁명주의자의 실천적 임무는 두 가지 중 하나로 귀결된다. 이 개량주의 노조관료들을 내몰고 혁명주의자들이 노조 집행부를 장악하여 이상적인 혁명적 노조로 바꿔내는 전술을 취하거나, 아니면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할 때 별개의 새로운 혁명적 노조를 건설하는 적색노조 전술(즉 노조를 혁명 진영과 개량주의 진영으로 쪼개는 전술)을 취하는 것, 이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처음에 노조 전취 방침(노조에 들어가서 조합원 대중을 전취하라!)은 ‘좌익’ 소아병을 치유하는 옳은 방침이었다. 그러나 이 방침은 실제 활동에서 곧 혁명주의자의 집행부 장악 전술 내지는 노조관료 견인 전술로 나타났고, 이것은 노조관료의 힘에 대한 과소평가로 인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곧 손쉽게 적색노조 전술로 선회하였다. 지노비에프의 노선은 노동자 정당이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으로 나뉘어 진 것처럼 노동조합도 개량주의 노조와 혁명주의 노조로 쪼개져야 한다는 주장으로서, 대중조직에 대한 종파주의적인 입장에 다름 아니다. 자본주의 지배 하에서는 노동자들의 의식이 불균등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정치노선에 따라 분열된다. 만약 개량주의나 혁명주의가 조직된 모습을 띨 때(즉 각각 정당으로 표현될 때) 자기가 소속된 당에 따라 노동자들이 분열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대중조직인 노조를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

 대안

기존 노조의 집행부를 장악하는 것( 및 노조관료 견인 전술) 아니면 새로운 별개의 적색노조를 건설하는 것, 이 양극단의 오류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었을까? 다른 대안이 있었다. 한편으로 집행부 장악에 주력하여 상층운동 중심으로 빠져 관료주의를 재생산하지 않으며, 다른 한편으로 기존 노조와는 별개의 적색노조를 건설하여 대중으로부터 고립을 자초하는 것도 피하는 제3의 방안이 현실적으로 존재했다. 그것은 공식 관료기구(노조 집행부)에 끊임없이 도전할 수 있는 현장중심의 평조합원 운동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 평조합원 운동은 노조 집행부 장악에 실천의 중심이 가 있는 운동도 아니고 그렇다고 새로운 별개의 공식 노동조합을 건설하는 운동도 아니다. 기존 노조운동 안에서 비전임 현장활동가들 및 조합원 대중이 노조관료에 의존하지 않고 자발적인 현장투쟁과 비공인 현장투쟁단위(현재 남한 운동에서 보면, 공장별 공투위, 부서․라인별 투쟁기구, 선봉대 등) 및 노동조합의 현장 골간조직(대소위원 조직, 부서․분과조직, 공공부분의 현장 지부 및 지회)을 통해 현장권력을 쟁취, 강화하는 것, 그리고 이러한 현장권력에 의해 관료의 배신을 뚫고 투쟁을 지속해 나가도록 한다는 것이다.
현단계 남한 운동에서 볼 때 ‘현장권력 쟁취!’ 슬로건은 웬만한 대공장 현장조직이라면 다 내걸고 있다. 실제로 현장권력을 쟁취하는 것과는 전혀 거리가 먼 실천을 보이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이는 ‘현장권력 쟁취!’가 아직 운동 속에서 전형을 창출하지 못하고 있고 그래서 비록 구체적으로 정확한 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으로 호소력을 가지며 막연하게나마 현장조합원 대중의 열망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누구도 ‘현장권력 쟁취!’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실제로 ‘현장권력 쟁취!’라는 것을 단순히 노동조합의 현장조직력 강화 정도의 과제로 몰아간다고 해서 그것을 가지고 뭐라고 할 일은 아니다. 그것도 나름대로 낮은 수준의 현장권력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소한 현장조직들이 ‘현장권력 쟁취!’를 자신의 기치에 새겨 넣었다면, 사측의 현장통제를 분쇄하고 현장노동자들이 현장의 통제권을 틀어쥘 수 있도록 투쟁해야 하며, 이와 함께 조합의 관료주의에 맞서 현장을 대변하는 실천을 일상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노동조합의 공식 기구(‘공조직’)와 별개로 현장조직이 있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단지 노조 집권을 목표로 하는 파벌이나 계파(‘사조직’)가 아니라면 말이다.

관료적 운동질서를 재생산하는 대공장 현장조직운동

그러나 지금 대공장 현장조직들의 경우 거의 대개가 ‘현장권력 쟁취!’를 사실상 노조 집권의 야심을 가리기 위한 공문구로 전락시키고 있는 반면, 일상의 실천은 ‘현장권력 쟁취!’와는 대립하는 관료적 운동질서를 재생산하고 있으며 그 질서의 한 축으로 기능하고 있다. 남한에서 최대의 조직력을 자랑하는 현대자동차의 현장제조직들을 보자. 10여개나 되는 현장조직 가운데 ‘현장권력 쟁취!’를 내걸지 않은, 적어도 그것을 부정하는 조직은 없다. 그러나 과연 이 조직들이 지금 노조 집권을 놓고 경합하는 상층운동 중심의 계파가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조직이 있는가? 현장 중심성을 담보하고 상층 관료주의에 맞서 현장을 대변하며 현장투쟁을 자기 본령으로 하는, 그 말 그대로의 ‘현장조직’과는 모두 거리가 멀다는 점을 부인할 수 있겠는가?
대공장 현장조직운동은 현장투쟁 중심으로 재편되어야 한다. 현장조합원 대중의 생존권적 요구와 현장의 현안을 중심으로 한 일상적인 공동투쟁을 강화하여 계파 상층부들로부터 기층 활동가들을 떼어내 공동투쟁단위로 재조직해야 한다. 공동으로 함께 투쟁해야 할 현안과 요구는 일상적으로 현장에 널려 있다. 끊임없이 공동의 실천투쟁을 조직하고 강제하여 조합원 대중과 기층 활동가들의 눈앞에서 누가 관료적으로 투쟁을 회피하는 세력인지, 누가 진실로 현장을 대변하여 투쟁하고자 하는 세력인지 가려지도록 해야 한다. 국민파니 중앙파니 좌파니 하는 기만적인 상층 운동 구도를 깨고 ‘관료 대 현장’의 대립구도를 선명하게 드러나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대공장 현장조직운동은 관료적 운동세력 대 현장중심 평조합원운동으로 재편되어야 한다. 노선과 정책에 따른 분화, 정치적 분화는 이러한 재편을 토대로 할 때만이 상층 중심의 허구적 기만적 분화를 피하고 기회주의 운동세력 대 전투적․계급적 운동세력으로 제 자리를 찾을 것이다.

 공동투쟁을 통한 현장조직운동의 재편

따라서 이러한 공동의 실천투쟁을 통한 재편 과정 자체는 현장권력 쟁취 투쟁 이외의 다른 것일 수가 없다. 현장의 현안을 중심으로 한 공장별 공투위, 부서․라인별 투쟁단위들을 활성화시킴으로써 현장조직 기층 활동가들의 횡적 연대를 구축, 강화해야 한다. 현장조직들의 선명성 경쟁이나 보여주기식 투쟁이 아니라 현장의 요구를 직접 받아 안는 이러한 투쟁을 통해서 현장권력 쟁취 투쟁은 제 모습을 취할 수 있다.
이러한 상시적 현장권력 투쟁이 없이는 파업 철회, 직권조인 같은 결정적인 시점에 노조관료의 배신을 뚫고 투쟁을 이어갈 수 없다. 전면 총파업 같은 전공장 투쟁시에 현장권력 투쟁단위들은 배신한 노조관료를 젖히고 파업 지도부로 나설 수 있고, 또 나서야 한다. 비대위든 파업투쟁위원회든 그 형식은 무엇이든 상관없다. 노동조합이 계급적 성격을 유지하도록 하고 계급투쟁적으로 되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상시적 현장권력 투쟁에 달려 있다.
국제노동운동의 역사를 보면, 현장권력 투쟁을 주도했던 현장활동가들이 노동조합에 대한 현장권력 투쟁단위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고전적으로 표현한 바 있다. “우리는 노조관료들이 현장노동자들을 올바로 대표하는 한 그들을 지지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현장노동자들을 올바로 대표하지 않는 즉시 독립적으로 행동할 것이다.” 우리나라 노동운동에서도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현장노동자들을 올바로 대표하지 않는 즉시 독립적으로 행동할 것”이라는 정신과 실천은 투쟁하는 현장활동가들의 전통으로 자리매김 되어 왔다. 예컨대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128일 투쟁과 90년 골리앗투쟁, 이상범 집행부를 젖히고 골리앗 연대투쟁에 합류한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 93년 현총련 의장 김동섭 직권조인에 반대하여 떨쳐 일어선 투쟁, 95년 현대자동차 양봉수 열사 분신과 투쟁 등등이 그렇다.

현장권력 쟁취! 현장중심 평조합원 운동의 강화!

그러나 90년대 중반 이후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확대와 함께 노동조합이 완전히 합법적인 지위를 얻고 안정적 발전의 길을 걸으면서 제도권화하고 교섭기구로서의 성격을 굳혀 갔다. 이에 따라 노조 집행부들이 아래로부터의 요구와 움직임들을 차단하고 억누르는 관료적 파업전술과 기만적인 총회․잠정합의 전술들, 조직보존주의 논리들을 고안, 발전시켜 나갔다. 노동조합 관료화가 진척되는 것에 비례하여 현장권력은 파괴되어 나갔다. 이후 금속 대공장을 중심으로 새롭게 현장조직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지만, 현장권력 쟁취투쟁의 전통을 복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노동조합을 혁신한다는 미명 아래 집행부 장악, 좌파관료 지향 운동으로 빠져들면서 오늘날 대공장의 관료적 운동질서를 재생산하는 한 축으로 자리 잡기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과정이 현재의 파업유보, 파업철회, 직권조인 등 관료의 배신을 막지 못하고 오히려 일상사가 되게 만든 배경이다.
오늘날 서구는 물론이고 남한이나 브라질, 남아공 같은 대중적인 합법 노조운동이 이제 안착해 있는 나라들에서는 어디서나 노동조합 공식 기구와 평조합원 현장활동가들 간에 대립․ 투쟁이 일어나고 있다. 노동조합이 체제 내에 정착하면서 관료화되어 현장과 괴리된 교섭기구로서의 성격을 강화해 나가고 있고, 그에 따라 노조 지도부의 배신이 일상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을 배신 안 하는 지도부로, 전투적 노조로, 계급투쟁적인 노조로 바로 세워내고자 하는 열망과 문제의식이 일고 있는 것도 이런 상황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러나 관료화는 인적, 노선적 문제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구조적인 문제이다. 노조 지도부를 기회주의적 ․ 개량주의적 인자들 대신 전투적 ․ 혁명적 인자들로 물갈이 시키면 된다는 식의 상층 중심의 형식적이고 피상적인 접근방식으로는 관료주의에 대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관료적 노동운동을 재생산하는 데 기여한다. 관료주의를 분쇄하는 것은 상층부의 교체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문제를 집행기구 중심이 아니라 현장 중심으로 접근해야 한다. 노동조합을 혁명적으로, 계급투쟁적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입으로 표방하는 정책과 노선에 의해서이기 이전에 현장권력에 의해서이다. 아무리 계급적으로 올바른 정책과 노선을 표방한다고 해도 현장권력으로 뒷받침 받지 못한다면 관료적 구조를 뚫고서 그것을 실현하기가 어렵다. 현장권력을 쟁취하고 강화하는 현장중심 평조합원 운동을 발전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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