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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님] 잘 뛰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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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마님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댓글 조회6,523회 작성일2004-04-07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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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성장에 와서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집회에 가면서 느꼈던,
그래서 몇몇 이들에게는 이야기를 했던 생각 하나.

대학 새내기 시절, 집회를 가면 항상 선배들이 미리 '교육'을 시켰다. 여자는 꼭 남자랑 한 조로 짝이 되어야 했고, 집회장 근방에서 누군가에게 잡히면 서로가 연인인 척할 것을 지시받았다. 선배들은 여자들에게 아주 자연스럽게 "잘 뛸 수 있냐?"고 물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힐을 신고도 너무나 잘 뛰어다니는 '강자적 체질'을 타고났다. (물론 지금은 노쇠해서 절대 그리는 안 될 것이다. -_-) 체력이 약해서 헉헉대던 내 여자 친구들은, 항상 짝이 되는 남자들에게 조금씩 미안해했다. 파이를 들고 사수대로 차출되는 남자들에게 우리는 항상 조금씩 미안해했다. 그땐 그게 당연했고, 아주 조금 이상하면서도 별 문제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땐 어쩔 도리가 없지 않았는가,라고 묻는다면, 나도 특별한 대안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냥 그땐 그랬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농성장에 자주 오기 시작하던, 2월 16일의 일이었다. 그 전날 샤말이 잡혀갔고, 농성장 사람들은 목동 출입국사무소에서 긴급 집회를 열었다. 나는 갑자기 연락을 받아 사람들에게 연락을 돌리고 명동으로 달음질쳐갔다. 농성장 사람들은 각각 2대의 버스에 나눠탄 채 목동으로 향했다.

그때 버스에서 자히드씨가 나와 말을 시작했다. 붙잡히면 보호소에 갖혔다가 잘못하면 강제출국을 당할 이 약자들은 자신의 몸을 내걸고 집회에 가고 있었다. 버스 안은 긴장의 분위기가 가득했다. 어찌보면 건장한 남자들이 가득한 그 버스 안에서 자히드는 각자를 보호하는 방법들을 소개했다. 조끼 지퍼는 잠그지 마라, 혁대는 풀러라, 머리끈은 언제든 풀어질 수 있게 동여매라... 출입국사무소 직원들에게 줄 수 있는 빌미를 주지 않는 방법을 하나씩 소개했고, 사람들은 하나하나 그것을 확인했다.

그것을 들으며, 왜 과거의 나는 항상 집회에서는 잘 뛰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졌을까, 왜 잘 못 뛰는 여자친구들을 조금은 대책없다 여겼을까, 계속 생각해보았다. '집회에서는 잘 뛰어야 한다'는 문장 안에는 어쩌면 '잘 뛰는 사람들처럼'이라는 문구가 괄호쳐져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다.

그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농성장에 오길 정말 잘했다 생각했다.


* S.C.D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4-04-08 11:33)
* S.C.D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4-04-09 0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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