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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말의 강제추방, 그 전후의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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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마님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댓글 조회6,882회 작성일2004-04-07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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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28일부평역집회_투쟁사.jpg

싱그러운 봄, 동백이 가득한 남도에 간다는 사실만으로 가슴이 설레었다. 게다가 샤말 타파를 위한 후원주점에 가는 길인지라 더더욱 가슴이 설레었다. 이것저것 준비를 하기 위해 새벽 3시 반에 일어났다. 명동성당의 이주노동자 농성단 일행들이 아침 6시에 출발한다기에 신새벽부터 일어나 머리를 감고 샤말에게 가져갈 것들을 출력하고 든든히 밥을 먹고 집을 나섰다.

지난 토요일, 샤말에게 전화가 왔다. 그는 면회 때 단 한 번 보았던 서울의 낯선 동지에게 연대를 고마워하며 꼭꼭 안부를 전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보호소로의 연행에 항의하고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합법화를 주장하며 31일간의 단식을 했던 샤말은 단식 후반기에 목소리가 힘들어보여 걱정이 되곤 했다. "샤말 몸은 샤말 게 아니에요. 샤말 몸은 우리 모두의 것이니까 아프면 아프다고 꼭 이야기해야 해요." 이런 부탁어린 말에도 불구하고 샤말은 괜찮다는 말만 연발하며 명동성당의 투쟁을 묻는 사람이었다. 단식을 푼 후 목소리는 많이 좋아져서 잠깐 동안의 통화였지만 안심이 되었다.

명동성당 농성단의 비제 동지는 이렇게 말했다. "샤말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지역에 조직화를 하러 가면 안 좋은 소리를 많이 들어요. 너희는 돈 벌러 이 먼 나라까지 와서 왜 쓸데없는 짓을 하냐는 둥. 그런 말 들으면 정말 화가 났어요. 근데 샤말은 화를 낼 줄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들 이야기도 계속 들어보고 설득하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그런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힘이 솟는 일일 것이다. 여수로 향하는 농성단 일행들은 샤말을 만날 수 없지만 나는 샤말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은 불법 체류자이고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므로. 나보다 그들이 더 샤말을 보고싶을 텐데, 그게 조금 미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농성단의 마임팀 전태일 사람들과 농성단 대표 직무대행 아누와르 동지, 그리고 나를 포함해 세 명의 한국 동지들이 함께 차를 타고 여수로 출발했다. 차가 출발하면서 나는 마임팀의 소하나와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었다. 유독 샤말과 친했던 소하나는 샤말의 연행 후 많이 힘들어했다. 이번 주 토요일에 있을 이주노동자 문화제에서 소하나는 연행된 동지들에게 편지를 써서 낭독하기로 했는데, 무슨 내용을 써야할지 모르겠다며 공책을 폈다.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다가 최근에 농성장에서 기뻤던 일을 쓰면 어떻겠냐 말했더니 소하나는 시무룩하게 말을 꺼냈다. "사람들이 연행된 후에 아무것도 기쁘지 않았어요." 공책의 다른 란을 펴니 번호가 매겨진 리스트가 나왔다. 샤말과 전화통화를 한 목록이 눈에 들어왔다. 1번부터 38번까지, 언제 몇 시에 몇 분 동안 통화를 했는지, 발신지 번호가 몇 번으로 찍혔는지를 소하나는 모두 적어놓고 있었다. 그렇게 소하나는 샤말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며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차가 출발한 지 1시간쯤 될 무렵이었다. 한국인 동지가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목소리가 심각해 보였다. 샤말의 전화인 듯했다. 여수요? 인천 출입국요? 샤말... 샤말. 그런 말들이 오갔다. 전화를 끊고 그 동지는 바로 말했다. "차 좀 세워주세요." 망향 휴게소에 차를 세웠다. 샤말이 오늘 새벽 2시에 여수에서 인천으로 출발을 했고, 현재 인천 출입국사무소이며, 9시 비행기로 네팔로 돌아갈 것 같다는 소식이었다. 만우절날 맞이한, 정말 거짓말같은 소식이었다. 샤말을 보러 가는 설레임은 순간 다 사그러들었다. 우리는 여수로 가던 차를 돌려 서울로 향했다. 차 안에서는 계속 이곳저곳으로 전화를 걸었다. 항상 자신을 샤말의 누나라 말씀하셨던 이주여성인권연대의 이금연 대표님은 안양에서 바로 인천으로 택시를 타고 가시겠다 했다. 명동에 있던 한국 동지들도 인천으로 향했다. 내가 함께하고 있는 이주노동자 합법화를 위한 모임 사람들에게도 간단히 전화로 상황을 알렸다. 여수에서 자타칭 샤말의 비서라고 지칭되었던 캐쉬 동지는 주점이 열리는 날 아침에 접한 소식에 망연자실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샤말이 이 땅을 떠날 비행기를 타는 시간은 고작 1시간 반밖에 남지 않은 때였다.

서울로 가는 시간은 너무 길었다. 옆자리의 소하나는 창밖만 바라보며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샤말이 보호소에서 못 나오면 우린 이제 평생 못 볼 거에요." 그녀가 나에게 종종 했던 그 말을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샤말은 국가인권위에 강제연행과 보호소 인권침해에 관해 제소를 해놓은 상태였다. 이번 주에는 네팔의 내전 상황과 관련한 서류들을 국가인권위에 제출할 예정이었다. 조사가 진행중이었고, 국가인권위는 조사중의 강제출국은 없을 거라 말했다. 노동부에는 체불임금과 미지급 임금에 관한 진정을 넣을 예정이었다. 국무총리와 법무부, 노동부가 함께한 면담 자리에서 샤말을 비롯한 연행동지들에 대한 일시보호해제를 강력하게 요구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 땅에서 자행된 일들에 대해 조사조차 제대로 이루어지기도 전에, 샤말은 결국 네팔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출국을 위한 기본 서류인 여행증이나 여권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러한 것들이 없이는 그 누구도 대한민국을 떠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법무부는 샤말을 네팔로 보냈다. 샤말이 탔을 비행기가 하늘로 날아올랐을 무렵, 나는 출근 시간인지라 꽉 막혀 있는 남산터널에 갖혀 시계만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명동에 도착했다. 농성장 사람들은 어수선하게 모여 따뜻한 우유 한 잔과 빵 몇 조각으로 허기를 달래고 있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자리를 빠져나왔다. 상황 전달을 위해 이주노동자 합법화를 위한 모임 사람들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많은 이들이 경악하고 눈물을 흘렸다. 농성장에 와서 절대로 울지 말라 이야기를 했다. 현재 정부의 태도로 보건대 강제출국은 반복될 것이니, 어떻게 이 상황을 알려내고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강제출국을 막아낼지 고민해야 한다 말했다.

연대단위 사람들이 하나 둘 소식을 듣고 농성장을 찾아왔다. 점심을 먹고 조금 쉬었다가 집회가 시작되었다. 상황보고를 듣고 연대단위들의 발언을 듣고 노래공장과 연영석 동지의 노래도 들었지만 마음이 무거워 어깨를 펼 수가 없었다. 농성단 대표 직무대행인 아누와르 동지가 발언을 시작했다. "지난 2년 동안 함께 활동했던 샤말 동지를..." 그러다가 아누와르 동지는 잠깐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내 옆에 앉은 목사님(네팔 이주노동자인데 기독교 신자신지라 우리 사이에선 '목사님'으로 통한다.)이 캡이 달린 모자를 푹 눌러쓰고 뚝뚝 눈물을 흘리셨다. 이제까지 참았던 눈물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듯했다. 아누와르 동지의 발언을 들으며 나도 결국은 참았던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언듯 옆을 보니 옆에 앉은 친구도 울고 있었다.

그렇게 집회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화성보호소의 깨비와 굽타 역시 강제출국을 시키겠다며 짐을 싸라는 통보를 받았다는 연락이 왔다. 깨비와 굽타 역시 샤말과 마찬가지로 국가인권위에 진정을 한 상태이고 조사가 진행중이지만, 법무부는 샤말의 케이스와 마찬가지로 강제출국을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한국 정부는 열악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권리를 위해 투쟁해온 동지들을 '국제 테러리스트'로 낙인찍어 자국으로 내보내고 있다.

나는 이러한 정부의 화살이 단지 이주노동자를 향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화살은 더 약한, 더 열악한, 더 미약한 자들을 향한 것이지 이주노동자만을 향한 것이 아니다. 어느 순간 그 화살은 방향을 틀어 나를 향할 수 있기에, 나는 샤말이며 나는 깨비이며 나는 굽타이다. 더이상의 샤말을 만들지 않기 위해 연대가 필요하다. 더이상의 샤말이 없는 나라에 살기 위해 우리의 싸움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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