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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 명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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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쇼르쑈띠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댓글 조회4,979회 작성일2004-04-07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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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벌이에 양심과 영혼을 팔아넘기고 조금 우울해져서, 낮에 잠깐 농뗑이를 쳤더랬습니다.
양심과 영혼을 팔아넘긴 결정적 장소가 장충동이라, 거기서 그닥 멀지 않는 명동성당에
들른 것이죠. 문화제 때 공연할 노래와 춤을 연습하고 있는 우리 동지들... 한테 인사도
하기 전에 주방장 꼬빌 씨한테 팔이 낚아채여 은행에 함께 갔다가, 철물점에 함께 갔다
왔습니다. 꼬빌 씨가 철물점 아줌마이자 치킨집 아줌마한테 내가 자기 애인이라고
사기를 치길래 하-하-하- 웃는데 아줌마가 정말이냐고 자꾸 물어보길래, 사기 공범이 될까,
이실직고할까, 잠깐 고민하다가 "거짓말이에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순간 꼬빌의 그
실망한 표정. 흘흘...

잠깐 다녀온 사이에 단체로 연습하던 사람들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해미니 동지를
비롯한 몇 명은 여전히 노래 연습을 하고 있고, 천막엔 또 몇몇 동지들이 쉬고 있고,
몇몇은 오후의 따스한 봄햇살 아래에서 광합성을 하고 있고... 저도 그냥, 들머리
계단에 앉아서 광합성을 했습니다. 담배도 한 대 피우고요. 제 표정이 자못 심각해
보였는지 민수동지가 와서 '안어울린다 후까시잡지 마라'고 일침을 놓았습니다.
 
봄,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그렇게 잠깐, 숨고르기를 해본 게 얼마만인지... 일터나
투쟁의 장소나, 제 주변엔 어디고 전쟁터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제 방은,
요즘은 그저 하숙방밖에 되질 않구요. 피곤한 몸으로 혹은 술에 취한 몸으로 들어가
겨우 몸을 뉘였다가 나오는 곳. 그래도 그런 곳이 있다는 게 어디인지.

문득 모든 걸 다 때려치고 잠깐 혼자 여행을 다녀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노무 역마살, 또다시 도지나 봅니다. 이 회사에서, 수습월급 말고 정식월급을 기어코
받아야 하는데... 그것도 아주 오래...

3년 전에 영화사를 떠날 땐 다시는 이노무 영화판 안 돌아온다, 아니 돌아오더라도
이런 고생판으론 안 돌아온다, 그랬었는데, 어느새 다시 기어들어온 영화판,
그 중에서도 나를 받아준 회사는 이전 회사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일은 많고 힘들고,
회사 사정은 지지부진합니다. 언제나 해왔듯 적당히 방관자적 태도로 유유자적하고
해야 할 일만 하며 큰 일들을 사장한테 미룰 것인가, 아니면 힘을 좀 내서 오히려
이 회사의 사정이 내게 줄 수 있는 각종 유리한 점(조금만 적극적으로 달겨들면 제 의지와
취향 혹은 희망사항들을 관철시킬 수 있을 것 같음, 내 위엔 사장밖에 없으므로...)을 취해
열심히 일벌레가 되고 성취감을 목표로 할 것인가... 조금 고민이 되네요. 후자라면
이제껏 제가 해보지 못했던 많은 자질들을 아주 편한 환경에서 스스로 익힐 수 있을 것이고,
앞으로 어떤 형태의 조직에서건 '활동'을 하는 데에 있어 큰 자산이 될 터이지만...

웬지 딱히 내키지가 않습니다. 그것이, 노동자가 언제나 착취당하기 딱 좋은 미끼라는 걸
모를 나이도 아니고... 이곳은 실전필드이지 동지애적 관용으로 실수가 용납되거나
할 수 있는 곳이 아니기도 하니까요.
 
출퇴근 하며 월급받는 회사가 아니라면, 노동능력이 영 없는 인간이기에 회사를
그만둘까 하는 생각은 사실 괜히 해보는 소리들에 불과한 거고, 스스로의 게으름을
너무나 잘 아는 이상 비정규직, 혹은 소위 프리랜서로 뛰는 길은 무섭기만 합니다.
자기관리에 능한 사람도 아니고. 그런데 자꾸, 마음은 달뜨기만 하네요.
 
이거 아무래도... 봄타는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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