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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불법체류자가 된 버마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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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매닉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댓글 조회8,267회 작성일2005-10-11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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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불법체류자가 된 버마난민
‘버마행동’ 대표 뚜라와의 만남

  부깽 기자
 2005-08-29 22:51:47 
<필자 부깽님은 ‘작은대안무역’(이주노동자합법화를 위한 모임. www.stopcrackdown.net )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한국의 한 세기와 퍽 닮은 역사를 가진 나라가 있다. 독립운동과 군부독재, 그리고 민주화 운동. 다른 점이 있다면 버마는 세기를 넘긴 후에도 군부독재 하에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있다는 것이다.


‘버마행동’(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살며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이 만든 단체) 대표 뚜라씨는 한국에 대해 “누구보다 우리의 역사와 닮아서 누구보다 우리를 이해해 줄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하지만, 이들은 한국 사회에선 단지 ‘불법체류자’일 뿐이다. 버마이주(노동)자들은 버마뿐 아니라 한국정부와도 싸우고 있다.


군부에 의해 체계적으로 자행된 ‘강간’


1948년 영국에서 독립한 버마는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중 하나였지만, 1962년 네윈(Nay Win)이 이끄는 군사쿠데타로 인해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그 후 지금까지 계속되는 군사독재로 인해 버마는 피폐해졌고, 현재 아시아 최빈민국의 하나로 전락했다.


“그간에 일어난 군부의 만행은 이루 말할 수 없다. 1988년 8월 8일 군부독재에 대항한 전 국민적 항쟁이 있었는데 약 3만 명 정도가 희생당했다. 몇 년 전에 있었던 디페인(Depayin) 대학살과 군대에 의한 집단적인 샨(Shan)주 여성강간은 그 지역에 그치는 일이 아니었다. 단지 그 곳이 조사됐을 뿐이다.” (뚜라/버마행동 대표. 이하 인터뷰.)


‘샨 여성실천 네트워크’ SWAN(The Shan Women's Action Network)은 버마군부에 의해 체계적으로 자행된 강간 사례들을 기술한 <강간 허가증>(License to Rape)이란 제목의 보고서(www.shanwomen.org)를 출판한 바 있다. 2002년 발간 된 보고서(1996년부터 2001년까지 조사)는 샨주의 625명(이후 2004년까지 조사에서 188명의 사건이 추가)의 여성들에게 자행된 173건의 강간과 다른 형태의 성범죄를 다루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강간범죄의 83%는 군 사무관들의 의해 부대 앞에서 공개적으로 이루어졌고, 65%는 집단강간이었다. 강간당한 여성의 25%가 죽었으며, 시신이 지역공동체에 상세히 공개되기도 했다. 이들 강간피해 여성 중 30%는 18세 이하였고, 가장 나이 어린 소녀는 8살이었다. ‘문서로 기록된’ 사건 중 단 한 건 만이 상급 지휘관에 의해 처벌 받았고, 오히려 제보자들이 버마 군에 의해 감금과 고문, 심지어 죽임을 당했다.


버마정부의 인권유린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어느 마을은 마을 사람보다 군인들이 더 많다. 마을에 군대가 들어오면, 막사 짓는 것부터 그들이 먹고 살 모든 것을 마을 사람들이 책임져야 한다. 군대가 떠날 때 마을 남자들은 그들의 짐꾼으로 이용된다. 군대가 가지고 이동하는 짐 중 상당수는 약탈한 물건들이고, 짐꾼으로 끌려간 대다수 남자들이 전염병이나 노역에 시달려 죽게 된다. 살아서 돌아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마을에 들어오자마자 처음부터 남자들을 불러내 반정부군이 아닌지 몰아붙이고 그 자리에서 죽이기도 한다.”


밝혀지지 않은 ‘디페인 학살’


버마군사정부는 외부위협이 가해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군대를 증강시키고 있다. 국민들의 보건과 교육엔 국내총생산(GDP)의 1%도 안 되는 비용을 들이는 반면 국방비로 40% 이상 지출하고 있다. 10년 동안 버마정부군 수는 강제징집을 통해 두 배로 늘어 40만을 훌쩍 넘어서 세계 15위 규모다.


“디페인(Depayin) 학살에 대해선 아직까지 제대로 된 조사가 없었다. 학살당한 후 냇가에 죽은 척했던 몇 명만 살아서 증언했을 뿐이다. 당시 군대에 의해 죽은 사람들은 800명 정도로 추산된다. 군대는 승려와 마을사람인척 위장해서 학살을 벌였다. 그들이 그렇게 위장한 것은 아웅산 수지 여사와 NLD(버마민주민족연맹)를 흡사 승려와 국민들이 반대해서 죽이려 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였다.”


2002년 5월 6일 가택연금에서 풀려난 아웅산 수지는 전국을 돌며 NLD에 대한 지지와 버마군사독재에 항거할 것을 호소했다. 아웅산 수지에 대한 버마국민들의 지지가 점차 확대되어 갈 때, 2003년 5월 30일 디페인에서 아웅산 수지와 NLD의 부의장인 우틴우(U Tin Oo)를 비롯, NLD의 지도부에 대한 암살시도가 있었다.


버마정부는 약 1천명의 아웅산 수지 지지자들과 5천명의 반대세력 간 충돌이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마을인구는 5백 명 안팎이었고, 마을사람들과 아웅산 수지 지지자들은 합쳐야 1천명 미만이었다. 5천명의 폭도들은 군부와 그들에 의해서 조직된 사람들이었고 비무장이었던 아웅산 수지와 그 지지자들을 향해 쇠봉과 쇠못, 죽봉 등을 이용해서 공격했다. 버마군사정부와 국제사회는 디페인 학살에 대해 어떤 조사도 하지 않았고, 단지 NLD와 버마의 몇몇 단체들만이 조사보고에 착수했을 뿐이다.


불법체류자인가 ‘난민’인가


“작년 5월 난민신청을 냈다. 일주일 후 한 차례 조사가 있었지만 이후엔 묵묵부답이다. 1년이 넘는 동안 몇 차례 출입국에 연락해 봤지만,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젠 연락도 잘 안 된다. 또, 실태조사를 하면서 통역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이것이 문제가 돼서 직접 통역을 하겠다고 나서봤지만 출입국에서 거부했다.”


한국정부는 1992년 난민협약에 가입한 이후 2000년까지 단 한 명의 난민도 허용하지 않다가 2001년에 들어서 1명을 인정하고, 2005년 7월 현재 총 39명을 인정한 상태다. 301명의 난민 신청자가 있지만 인력부족을 핑계로 제대로 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력부족”은 지난 16일 출입국에서 한 얘기고, 한 신문이 이를 보도하자 23일 보도해명자료를 통해 “난민심사 업무는 법무부 출국관리과에 2명 및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에 2명이 전담하고 있고, 기타 전국 출입국관리사무소에 41명의 겸임요원을 지정, 운영”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는 바꾸어 말해 불법체류자를 단속하는 사람과 난민신청을 담당하는 사람이 다르지 않다는 얘기다.


“버마행동에서 나를 비롯해 11명이 난민신청을 했지만 2명은 신청자체를 거부당했다. 이들에 대해 불법체류 벌금을 내야만 신청접수를 받겠다고 하는데, 법적으로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다. 출입국이 정말 몰라서 이러는 건지, 아니면 단속반 입장에서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난민신청을 하기 전에 이루 말할 수 없이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된다. 난민신청은 결코 한국에서 오래 머물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난민신청이 받아들여지면 우린 버마가 민주화되기 전엔 고국에 돌아갈 수 없게 된다. 우리가 이룬 것들, 가족들, 모두를 저버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반평생이 그곳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누가 좋아서 내 흔적들을 버리고 싶겠는가.”


이들 모두 한국정부가 가입한 '난민협정'에 합당한 요건을 갖추고 있지만 난민인정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뚜라씨와 버마 활동가들에게 있어서 난민신청이라는 것은 현재에서도 계속 과거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 것도 확실하지 않지만, 멀리 떨어진 한국에서 잃어버린 과거와 버마 민주화를 위해 계속 투쟁하겠다는 것이다. 실상 ‘난민’이란 것은 체류이상의 의미를 가져야 하지만, 한국사회에서는 난민 심의를 하는 동안엔 어떤 혜택도 받을 수 없다. 교육이나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없고, 직업을 구할 수도 없으며, 본인 명의의 통장 개설이나 휴대폰조차 허용되지 않고 있다.


“버마행동 활동가중 팀인(Tim Yin) 동지는 불법체류자로 청주보호소에 수감된 후에 난민신청이 접수됐다. 현재 120일 넘게 청주보호소에 수감 중인데, 난민 인정이 나기까지 통상 4~5년 걸리는 걸 감안한다면 얼마나 오래 보호소에 머물지 알 수 없다.”


지난 6월 ‘임을 위한 행진곡’이 버마어로 개안됐다. 에치흐니 공떼이카 엠미 빠무꾸에뚜(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우리가 가진 역사를 지금 살아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에게 ‘연대’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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