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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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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마님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댓글 조회7,680회 작성일2004-09-24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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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게시판에 들르는데, 물만 먹고, 아니 사이트 화면만 보고 갑니다. 그러다가 오늘은 큰 맘 먹고 글을 하나 퍼왔어요. 글 잘 읽으시고, 다들 해피 추석되시라.



Violy


by Jollary


뉴저지에 아르바이트를 가게 되면 항상 시간을 조심해야 한다. 혹여 조금이라도 더 가르치는 애들 신경써주느라 몇 초라도 늦게 버스 정류장에 나가면 영락없이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버스 정류장이라고 주변에 가게라도 있고 사람들 오가는 걸 상상하면 큰코 다친다. 뉴저지의 버스 정류장은 주변에 걸어다니는 사람 하나 없는 적막한 숲속 도로에 그냥 덩그라니 놓여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이런 일 잘 막아왔는데, 오랜만에 결국 또 그런 일이 발생하고야 말았다. 딴에는 머리를 굴려 내가 버스 타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읍내로 가 다른 버스를 타야지 맘 먹고 30분도 더 걸어갔다. 근데 결국은 한 시간만 기다리면 갈 수 있는 걸 읍내서 또 버스를 놓쳐 두 시간이나 늦게 집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래도 읍내로 가니 버스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이 나 말고 또 한 명이 있었고 그녀와 한시간 가까이 버스를 기다리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알게 되었지만, 나이 60이 다된 Violy는 필리핀에서 여행자 비자로 미국으로 건너와 현재 불법으로 일을 하고 있는 여인이었다.


Violy는 일주일에 6일은 뉴저지에 있는 어느 집에서 베이비시터 겸 가정부로 일을 하고 하루는 뉴욕에 있는 친척네 집에 가서 지낸다. 미국으로 건너온 지는 6개월이 다되어 비자는 만료가 되었는데 2년 정도는 더 일해 돈을 벌려고 한다. 남편은 없고 나이 삼십이 넘은 세 명의 자식들이 있고 이들 다 일을 하고는 있지만, 그녀가 이곳에서 일을 하는 이유는 자식들에게 돈을 부쳐주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한달 월급1300불을 받으면 1000불씩을 필리핀으로 보낸다. (참고로 월1300불이면 미국선 제도상으로 지정된 최저임금 정도에 해당하는 임금이다)


자식들이 더 성장해 일도 하는데 왜 자식들한테 돈을 보내냐고, 차라리 여기서 좀 즐기라 했더니 아들이 사업을 하는데 잘 안되고 큰 딸이 또 임신을 했는데 남편이 버는 돈으로는 살아가기 힘들고 막내딸도 임신을 해 도와줘야 한다고 한다. 아무리 크고 어른이 되어도 자식을 바라보는 에미의 마음은 삼십년 전이나 똑같다. 큰딸이랑 같이 살았었는데 요즘도 가끔 전화를 하면 딸이 엉엉 울면서 필리핀으로 돌아오라고 한단다. 그래도 Violy는 어느 정도 자식들이 먹고살 돈을 마련하기 전에는 돌아갈 생각이 없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필리핀에서 자기가 받던 임금이 7000페소 정도 되었는데 이곳에서 받는 돈은 필리핀 돈으로 하면 5만페소라고 한다. 그걸 알면서 어찌 돌아가겠냐고 하는 그녀의 눈은 미래를 꿈꾸는 기쁨과 현실의 힘겨움이 묘하게 섞여 있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서울의 동대문 시장에 가서 옷을 사와 미국에서 팔면 큰 이윤을 얻을 수 있다고, 나보고 얼마나 한국에 자주 가냐고 묻는다. 내가 나는 사업에는 소질이 없다고 했더니 자기 아는 사람들 많다면서 은근히 바람을 불어넣기도 한다.


미국에는 이처럼 가난한 나라들에서 건너와 일을 하고 일한 돈을 고국으로 보내는 remittance(한글로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모름)가 나름대로 큰 사회학적 연구대상이기도 하다. 몇몇 중남미 나라들은 전체 경제규모에서 이런 remittance가 차지하는 비율이 국내 산업생산보다 많은 경우도 있다. 꽤나 경제규모가 큰 멕시코도 remittance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 NAFTA에 참여할 때 이에 대한 안전판을 보장받기도 했다.


재밌는 것은 이러한 remittance가 궁극적으로는 노동력 수출의 형식을 띈다는 것이다. 저발전된 국가(mother country)들은 자국의 노동력을 발전국가로 수출해 그들이 고국으로 보내오는 노동의 과실에 의존한다. 물론, 노동력의 수입국가(hosting country)들은 remittance의 제도화를 통해 값싼 노동력을 공급받아 생산비용을 절감시키는 경제효과를 얻기도 한다. 하지만 remittance는 여전히 합법적이지도 않고 이주노동자들의 권리는 보호받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mother country나 hosting country들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경제적 제도의 한축을 이루고 있고 절묘하게 비합법 이주노동자들의 유입/유출이 -특히 hosting country의 경제적 이해에 따라- 통제되고 있다 .


시장 옹호론자들의 눈에 이러한 현상은 당연한 것일 뿐만 아니라 권장되어야 할 일이다. 각국의 경제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뿐만 아니라 개인들에게도 더 큰 기회를 제공해준다는 논리다. 하지만 remittance가 긍정적인 것이라면 합법화되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여전히 이주노동을 불법으로 취급하면서 그 긍정적 효과를 찬양한다는 것은 결국 이주노동자들이 당할 수 있는 (그리고 많은 경우 당하고 있는) 착취와 인권침해에는 눈 감고 그것이 가지는 거시경제적 효과에만 주목하는 가증스런 입장일 뿐이다.


자식들에게 보내는 돈 좀 줄이고 니가 좀 재밌게 살아라라는 말에 혼자서 재밌게 살면 얼마나 재밌게 사냐고 말을 받는 Violy. 혹시라도 아프게 되면 어떡하냐고, 보험도 없는데 병원비는 어떡할거냐는 물음에 자기가 일해주는 사람들이 도와주거나, 혹시라도 그게 안되면 그때가 필리핀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아니겠냐고 되묻는 한 어머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비합법 이주노동은 이런 식으로 계속되고 있다.


뉴욕에 도착해 지하철로 갈아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평등"이라는 단어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야만 했다. 근대화가, 민주주의가, 평등이 귀속된 지위/계급의 사회에서 성취된 지위/계급의 사회로의 변동이라고 믿는 작자들은 얼마나 기만적인가? 갑부의 자식으로 태어나느냐 일용노동자의 자식으로 태어나느냐; 혹은 미국에서 태어나느냐 필리핀에서 태어나느냐와 같은 참으로 우연적인 사건이 결국은 한 개인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점에서는 혁명 이전의 프랑스나 오늘날의 민주국가들이 다를 바가 없는데... 진정한 평등을 위한 투쟁은 결국 귀속적 속성이 가지는 개인들에 대한 그리고 집단들에 대한 결정성을 무너뜨리는 것에 그 지향이 놓여져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인종이나 국경이니 민족이니 하는 따위가 개입할 여지는 없어야 할 것이다.


평소보다 한참이나 늦게 집에 돌아오긴 했지만, 오늘 버스를 놓친 것이 어쩌면 참 좋은 성찰의 기회를 준 것 같아 내심 기뻤다. 그러고 보니 며칠 후면 노동절이다. 머리띠 질끈 묶은 멋지고 힘있는 노동자들의 노동절이 아닌, 노동을 하는 모든 힘없는 노동자들이 함께 참여하고 기뻐하고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노동절... 이런 노동절을 언제 보게 될 수 있을까? 일주일의 고된 노동을 마치고 손에는 작은 던킨도너츠 박스를 들고 친척의 집으로 향하던 Violy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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