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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비대위 활동 - 현재의 상황, 그리고 앞으로의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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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마님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댓글 조회5,380회 작성일2004-04-21 0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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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관악여모에서 만든, 성폭력 비대위 활동을 정리한 글입니다. 성폭력 비대위는 대학 내의 페미니스트들이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모색된 위원회입니다. 물론 요즘은 대학 외의 단체들에서도 사건이 발생했을 때 비대위를 구성하는 경우가 많지요.

어떠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일 겁니다. 사적 복수도 있을 것이고, 피해자의 침묵으로 끝날 수도 있겠죠. 비대위를 구성하는 방식도 있을 수 있구요. 물론 이러한 선택은 상당 부분 피해자의 결정에 따라야 하겠지요. 저는 제 주변에서 이러한 문제가 생겼을 때 부랴부랴 사후약방문식으로 비대위를 공부할 수밖에 없었어요. 어찌 보면 '이주노동자 합법화를 위한 모임'이라는 모임의 목적과는 다소 상이한 자료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우리 모임을 비롯하여, 이 세상 모든 곳에서 남녀를 불문하고 이러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만큼 비대위에 대해서도 모임에서 서로 공부하고 고민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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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대위 활동 - 현재의 상황, 그리고 앞으로의 방향


1. 비대위 활동 내용


사건접수


피해자 혹은 피해자 대리인으로부터 사건을 신고 받게 된다.

사건을 접수 받을 시는 접수받는 시각 및 신고자의 인적사항 그리고 개괄적인 사건내용 등을 메모해 두는 것이 좋다. 그러나, 가능한한 전화보다는 직접 만나는 것이 좋으며, 사건의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피해자의 상황을 먼저 고려하고 피해자에게 즉각적으로 필요한 도움들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 지원하여야 한다.


피해자 만나기

사건이 신고되면 피해자/피해자대리인 등을 만나 사건의 내용에 대해 전해 듣고, 피해자의 상황 및 가해자의 태도, 그리고 피해자에게 필요한 지원책 등을 논의한다.

피해자가 불쾌해 하지 않는다면 대화내용을 녹취하여도 괜찮지만, 피해자가 불안해 한다면 가벼운 메모 정도로 하고 피해자에게 힘을 주는 것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사건당시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이나 목격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의 인적사항 및 연락처를 확보해 둔다. 비대위 활동이 시작되기 전이나 시작 직후, 이들을 먼저 만나 2차 가해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한편, 정황증거가 될 수 있는 진술서를 받아두는 것이 좋다. 진술서에는 작성일시 및 작성자의 명의 그리고 사인이나 도장이 명시되는 것이 안전하다.


비대위구성

사건의 성격이 파악되고, 피해자의 요구사항이 정리되면 비대위를 구성한다. 비대위는 일반적으로 가해자소속단위1인, 피해자소속단위1인, 관악여모1인, 피해자대리인 등으로 구성되며, 상황에 따라 가해자 대리인을 둘 수도 있다.


진술서 작성하기

진술서는 가능한 문서로 작성하여야 하며, 피해자 혼자서 작성하는 것보다는 대리인이나 여모1인 등이 함께 하는 것이 피해자에게 힘이 된다.

진술서는 구체적인 사건정황과 더불어 피해자의 의견/감정 등이 드러나도 무관하며, 피해자의 요구사항까지 포함되어도 괜찮다. 만약, 피해자가 진술서를 쓸 수 없는 상황이라면 대리인 및 여모1인이 함께 대화를 하고 그 내용을 녹취하여 문서로 작성한 후 피해자의 확인절차를 거치는 방법도 있다.


가해자 접촉

피해자의 진술서 및 요구사항이 확정되면 비대위와 가해자의 면담 자리를 만든다. 가해자에게는 면담 전날 정도에 전화를 하여 사건이 접수되었다는 것과 본인이 가해자로 신고되었다는 것 정도만 간략하게 설명하고 면담 시간과 장소를 통보한다. 그리고 가해자에게 통보를 받은 그 시각부터 절대로 피해자에게 연락하거나 만나려는 시도를 하지 말 것과 아울러 사건에 대해 말하고 다니지 않을 것 등을 철저하게 주지시켜야 한다. 덧붙여 그같은 행동이 2차 가해로 규정될 수 있음을 말해두는 것이 좋다.


가해자 면담 및 사건 구성

피해자의 진술서를 기준으로 가해자에게 사건인정을 받아낸다. 이 때 가해자는 순순히 인정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실을 부정하거나 혹은 사실 자체는 인정하여도 그것은 ‘성폭력’이라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가해자가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을 때를 대비하여, 사건의 목격자나 그 상황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의 진술서를 미리 확보해 두는 것이 안전하지만, 만약 목격자나 관련된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피해자의 진술서에 기초해서 가해자를 설득해야 한다.

만약 가해자가 끝까지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피해자의 의사를 타진한 후 ‘폭로’의 전략을 취할 수 있다. 그리고 가해자의 이후 행보와 무관하게, 피해자에게 필요한 지원조처들을 적극적으로 행하여야 한다.

두 번째 만약 가해자가 구체적인 행동들은 인정하나 그것이 성폭력임을 인정하지 않으려 할 때, 일정 정도 설득의 필요성은 있다. 그러나 가해자의 그같은 남성중심성은 어디까지나 전략적으로 깨어야 하는 것일 뿐, 일정한 노력과 설득작업 이후에도 가해자의 태도가 변하지 않는다면 굳이 가해자의 인정을 받을 필요는 없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가해자 상담을 비대위 활동과 동시에 시작하여 가해자의 변화를 유도하는 방법을 쓸 수도 있다. 물론 가해자 상담은 비대위 인자의 역할이 아니며(가능한 가해자와 비대위 인자가 사적으로 연락하거나 만나는 것은 차단하는 것이 좋다) 가능한 외부단체에 의뢰하는 것이 좋다.


피해자 요구사항 전달 및 이행하기

사건구성이 성립된 후 혹은 성립여부와 무관하게 피해자의 요구사항을 가해자에게 전달하고 이행을 요구해야 한다. 피해자들의 요구사항은 주로 1. 공간분리 2. 사건공개 3. 재교육 이수 4. 휴학 등이 있는데 피해자의 상황에 따라 다양해 질 수 있다.

첫 번째, 공간분리의 경우 피해자의 요구라기보다 기본적으로 필요한 피해자 보호조처이며 결코 양보될 수 없는 부분이다. 공간분리를 위해서는 가급적 가해자에게 휴학을 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이는 성실한 재교육 과정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설사 소속 단과대가 다르다 하더라도 같은 학교에서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하며 피해자에게 있어 가해자는 멀리서 보이기만 해도 기분나쁘고 두려운 존재임을 생각할 때 어중간한 공간분리는 오히려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두 번째, 사건공개의 경우 피해자의 의지 및 피해자를 보호하고 지지할 수 있는 지원그룹이 필수적이다. 피해자의 신변이 과도하게 노출된다거나 혹은 피해자가 고립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우선 피해자의 보호와 지지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여건들을 조성해야 한다. 피해자 주변의 사람들을 조직화하는 것, 피해자에게 필요한 심리적/의료적 지원체계를 제공하는 것, 피해자가 노출될 만한 공간에 사전작업 및 모니터링을 철저하게 하는 것 등이 그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비대위의 역량만으로 한계가 있다면 피해자에게 솔직하게 상황을 전달하고 의사를 타진하는 것이 올바르며 과도하게 원칙주의를 내세워서는 안 된다.

덧붙여 가해자의 동의여부와 무관하게 사건공개는 성립 가능하며, 사건공개 방식에서 가해자의 사과문을 받는 것은 선택지일 뿐 가해자의 합의나 가해자의 사과문이 사건공개 여부를 성립시키는 요소는 아니다.

세 번째, 가해자의 재교육이수는 시작은 어렵지 않지만 중간과정의 모니터링과 마무리 작업에 많은 힘이 든다. 대부분의 가해자들이 비대위 당시에는 쉽게 재교육이수를 합의하지만, 막상 비대위가 해체되고 자신을 모니터링 하는 사람이 없음이 인지될 때 합의내용을 전혀 이수하지 않는 행동들을 보인 것이 지금까지의 경험이다. 따라서 가해자 재교육 기간 중 가해자의 행동을 모니터링하고 가해자의 재교육 이수 상황을 체크할 수 있는 단위가 필요하며, 이는 가급적 비대위 보다는 가해자 소속 단위 인자들 혹은 가해자소속 단위의 여성모임 등이 맡는 것이 바람직하고 현실적이다.

그리고 가해자 재교육은 주로 민우회 가족과 성 상담소나 한국성폭력상담소 혹은 여성의 전화 등에 의뢰하며 학내상담소에서도 가능하다. 그러나 피해자와의 공간분리가 필요하다면 외부로 의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외에도 피해자가 사건으로 인해 의료적/심리적 지원을 필요로 하게 될 때 그에 소요되는 비용은 가해자가 부담하도록 해야 한다. 즉 피해자의 병원비나 상담비 및 교통비 등은 기본적으로 가해자가 부담해야 하는 것이며, 그 외에도 피해자의 지원을 위해 필요한 비용은 배상 받아야 한다. 이것은 결코 타협이나 보상이 아니다. 정당하고 기초적인 배상과정일 뿐이며 그것이 다른 요구사항들을 경감시키거나 피해자의 상태가 더 좋아짐을 보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건재구성 요령

피해자 진술서를 기초로 하여 사건정황을 재구성하여 자보문안을 작성하여야 하며 이 때 피해자가 유추될 수 있는 구체적인 사건일시 및 정황 등은 삭제하거나 변형하여야 한다. (실수하기 쉬운 부분이니,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여러번 재검토하여 이것이 대중적으로 공개되었을 때 왜곡의 여지가 없는지, 피해자가 노출될 우려가 없는지, 피해자에게 2차가해가 가해질 우려가 없는지 등을 고민하고 수정해야 한다.

덧붙여 사건재구성은 객관적/중립적 입장이 아닌, 피해자의 관점에서 구성되어야 하며, 재구성된 정황은 필히 피해자의 검토를 받은 후 공개되어야 한다.


가해자사과문 검토

그리고 가해자의 사과문을 검토하는 작업을 시작한다. 가해자 (공개)사과문은 피해자의 요구가 있을 시 받으며, 만약 피해자가 개인사과문을 받을 의사가 있다면 공개사과문과 개인사과문을 동시에 작성하게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개인사과문을 원하지 않는다.) 가해자사과문은 가급적 혼자 작성하게 하고 비대위의 검토를 통해 수정을 거친 후 어느 정도의 수준이 되면 피해자에게 보여주는 것이 좋다.

가해자 사과문에는 사건정황이 포함될 수도 있지만, 포함되지 않는 것이 좋다. 가해자가 사실은 인정하는 내용이 들어가야 되지만, 그것이 굳이 구체적인 정황들을 언급하는 방식으로 될 필요는 없으며, 사건정황은 비대위에 의해 재구성되기 때문에, 단지 그 ‘공개된 사건내용을 인정한다’는 문구만 들어가도 된다. 왜냐하면 가해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재구성하면서 나타나는 가해자중심성이 항상 반복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을 수정하는 과정에서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더 구체적으로 알아갈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비대위의 힘을 소진하고 가해자의 피해의식을 강화할 뿐 사건해결과정이나 피해자 치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가해자는 사건정황을 인정한다는 진술과 그에 대한 자신의 반성과 더불어 비대위과정을 통해 합의된 이수사항 (공간분리, 재교육이수 등)을 성실하게 이행할 것과 앞으로 성폭력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약속 등을 공개사과문에 담아야 한다.
덧붙여 공개사과문에 자신의 성장과정이나 집안환경 등에 대한 구구절절한 사연 따위는 없는 것이 낫다. 그것이 가해자의 입장에서 진정한 반성과 성찰이라 할지라도 읽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주체의 책임을 구조의 문제로 환원하는 방식으로 해석되게 마련이며, 나아가 가해자 역시 책임 회피의 의도에서 그같은 글을 쓸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굳이 가해자의 평소의 성관념 등에 대한 내용이 필요하다면 가부장적인 집안환경, 남고출신, 포르노를 통한 성경험 체득 등과 같은 두루뭉실한 게 아니라 차라리 사건당시에 그리고 사건 직후에 그리고 사건처리 과정 등에서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느낀 것들을 밝히는 것이 오히려 정확한 내용이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가해자의 사과문은 비단 해당 사건에 대한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신고된 사건 외에도 가해자가 일상적으로 행한 성폭력적 언행들이 있는지를 살펴야 하며 그같은 내용들이 접수된다면 그 행위 역시 성폭력사건의 내용으로 포함되어 공개되어야 하며 가해자는 그 행동과 그로 인한 피해자들의 불쾌감에 대해서도 사과하여야 한다.

그리고, 가해자의 공개사과문은 중립적인 공동체에 누를 끼쳐 고개 숙여 사죄하는 식의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피해자인 여성들에게 사과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사건공개

사건공개는 주로 <사건개요 + 가해자사과문 + 비대위입장자보 >로 구성된다. 사건개요는 앞서 말했듯 피해자의 입장에서, 그러나 왜곡이나 공격의 소지를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쓰여져야 하며 가해자사과문은 필요에 따라 작성하도록 한다. 그리고 비대위입장자보는 사건의 성격 및 가해자/피해자의 소속단위의 성격 등에 맞추어 간략하게 그러나 핵심적인 주장이 드러나게 써야 한다. 입장자보가 너무 일반적인 내용만 담긴 것이 되지 않도록 유념하자.


사건공개 이후

사건공개는 성폭력사건의 종결이 아니라 그 해결의 시작일 뿐이다. 사건과 가해자가 공개되면 그에 대한 말들이 나오게 마련이며 그에 대한 적절한 개입과 싸움이 필요함은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공개적인 토론회나 교양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며, 리플렛을 돌리거나 설문조사 등을 통해 해당 단위의 반응과 상황을 살필 필요가 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전략들을 취할 수 있지만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기에 일단 생략.



2. 현재의 비대위 위상에 대한 평가 및 문제제기

① 비대위는 어떤 ‘입장’을 갖는가?

이것은 비대위의 포지션에 대한 질문이다. 흔히들 오해하듯, 비대위는 피해자와 가해자를 중재하고 사건을 ‘해결’하는 주체로 활동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100% 피해자의 입장에 서서 피해자의 진술만으로도 사건을 성립시키고 가해자의 인정여부에 무관하게 사건공개와 피해자보호조처들을 할 수 있는가?

이것은 얼핏 보면, ‘정당성’의 문제로 읽혀질 수 있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결국 ‘입장’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정당성’이란 단어는 결코 고정되지 않은, 고정되어서는 안 되는 개념이며 기존의 남성중심적인 정당성 개념을 여성의 경험과 언어를 반영하는 것으로 바꾸어나가는 싸움이 반성폭력 운동의 현실적 과제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즉, 정당하냐 아니냐의 질문이 아니라 무엇이 정당한 것이며 무엇이 정당하지 않은 것인가, 라는 질문이 먼저 제기되어야 하는 것이다.

‘애초부터 존재하는 객관성’이라는 신화가 여성들의 현실에 얼마나 해를 끼치는 것인지, 특히나 성폭력사건에 있어서 ‘객관성과 중립성’이란 단어가 어떤 식의 폭력으로 작동하는지는 경험으로 충분히 알아 온 것이다. 그렇기에, 비대위의 정당성에 대한 질문은 비대위의 포지션에 대한 질문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② 비대위는 실제로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첫 번째 질문과 두 번째 질문은 연결되어 있다. 비대위가 어떤 입장을 취하는가의 문제가 결국 비대위의 실질적인 활동을 결정하게 된다.

물론, 비대위가 모든 일 -사건접수, 사건해결, 피해자상담, 가해자재교육, 소속단위에서의 대중적 활동-을 감당할 수 있다면 이런 질문은 제기될 필요가 없겠지만, 현실적으로 비대위의 역량은 한계가 있으며 그렇기에 무엇이 우선이고 무엇이 목표인지가 얘기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비대위가 피해자 지원체계로서의 성격을 명확히 한다면 여러 가지 관련활동 중 가장 우선이 되는 것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재구성하고 그에 따른 피해자 지원책들을 마련하는 것이 된다. 실제로 학내 비대위 단계에서 피해자에게 지원해 줄 수 있는 꺼리들은 그다지 풍부하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단적으로 전문화된 피해자 상담을 맡을 수도 없으며, 피해자가 필요로 하는 의료적/법적 지원체계 역시 직접적으로 제공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단편적인 정보들을 제공할 수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러나, 학내 단위이기에 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기도 한데 예를 들면 피해자 주변의 인자들을 조직화하여 피해자 지원 네트워크를 구성한다든지 피해자나 사건에 대한 구설수들이 떠도는 공간들을 직접 모니터링하고 변화시켜 나가는 것들, 그리고 가해자가 공간분리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는지 등을 실제로 감시하고 제재할 수 있는 것이 학내 단위의 강점이 될 수 있다.

기간의 비대위 활동에서 이같은 활동들이 너무도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오히려 피해자지원체계로서의 기능보다는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 자체에 너무도 많은 힘을 소진하여 결과적으로 '사건해결주체'라는 제3자적 포지션으로 분리되기 십상이었다.

하나의 사건을 공개하기까지 가해자를 설득하는 작업과 가해자의 제대로 된 사과문을 받아내는 작업들은 너무도 많은 논쟁과 싸움을 요구하게 마련이기 때문에 비대위 인자들로서는 ‘합의 하에 사건이 공개되고, 가해자가 사과문을 썼다’라는 것만으로도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건공개와 더불어 그리고 사건공개 이후에 지속적으로 병행되어야 하는 피해자 지원체계 마련과 공동체 문화 변화시키기 과제에는 상대적으로 약화된 활동력을 보이게 마련이었다.

그렇다면, 비대위가 쓸데없는 일에 힘을 빼지 않고, 정말 필요한 일만 해 나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③ 비대위는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

비대위가 피해자지원체계의 성격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현재 많은 역량을 투여하고 있는 부분, 즉 가해자의 합의 얻어내기나 가해자의 사과문 받아내기 등의 작업에 지나치게 무게를 싣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가해자의 인정이나 합의 없이도 사건구성과 공개는 가능하며, 중요한 것은 가해자의 합의가 아니라 가해자의 ‘가해 부정’을 공격할 수 있는 힘과 전략을 갖추는 것이다.

물론 가해자 합의없는 공개가 가져올 수 있는 치명적인 공격들은 불을 보듯 뻔하다. 가해자 인권침해라는 공격에서부터, 피해자 음해론, 비대위 자격검증 요구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지금까지 학내 비대위 단위가 쌓아온 소위 ‘공신력’의 권위들을 한꺼번에 무너뜨려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는 그러한 상상들에 너무 위축되어 오지 않았는가? 앞의 말과 같은 그들의 속삭임 혹은 그들의 낮은 협박들에 스스로 움츠러든 것이 아닌가?

과연 그들이 요구하는 ‘공신력’을 우리가 지켜야 할 의리나 애정이란 것이 존재하는가?

중요한 것은 그들과의 약속이나 타협이 아니라,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한 힘을 갖추는 것이다. 사건공개나 폭로가 문제가 되는 유일한 지점은, 바로 ‘피해자보호’의 문제다.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는 실질적인 역량이나 상황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에서의 성급한 폭로는 결과적으로 피해자에게 모든 공격이 되돌려지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가해자를 폭로하더라도, 그 ‘폭로’로 인해 그들이 함부로 우리와 피해자를 공격하지 못하게 하는 것, 오히려 그들이 자신의 ‘가해행위’가 선명하게 드러남으로 인해 위축될 수 있도록 하는 힘과 무기가 된다.

그것은 우리가 속한 공간들을 여성주의적으로 바꾸어나가는 것이 될 수도 있고 (가해자가 함부로 자신을 방어하고 나오지 못하도록) 혹은 공격에 방어할 수 있는 힘(피해자와 비대위 그리고 여성주의자들 모두)을 키울 수 있는 여성공간을 만드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가 그것들을 시작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다음부터, 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3. 가해자는 어떤 위치로 이해되어야 하는가?


① 가해자는 매장되어서는 안 된다?

가해자 역시 변화가능한 존재이며, 변화해야 하는 존재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언설이 갖는 힘이다. 가해자의 변화가능성을 너무도 쉽게 신뢰해 버리는 그 막연한 기대감과 공동체주의가 결국 2차,3차의 가해들을 낳게 된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가해자는 변화가능한 존재이지만 결코 쉽게 변하는 존재는 아니다. 가해자의 변화여부는 충분한 기간의 재교육이 끝난 이후에야 논의될 것이지, 비대위활동이 마무리되는 시점 즉 사건이 공개되고 가해자의 사과문이 공개되는 시점에서는 결코 논의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피해자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있는 상태에서, 가해자에 대한 조처사항들이 너무 가혹하다든지 가해자는 공개사과문까지 썼으니 충분히 반성한 것이 아닌가, 라는 식의 이야기들을 끄집어내는 것은 ‘가해자에 대한 지나치 관대함’을 보여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가해자를 지나치게 긍정적인/적극적인 존재로 의미화하는 것이 지금의 가해자에 대한 온정주의적 시각을 가져왔으며 나아가 가해자도 ‘사회구조의 피해자’라는 식의 황당한 결론마저 도출하게 된 것이다. 또한 가해자를 지나치게 신뢰하는 그 시각은, 결국 가해자를 활동공간에서 제대로 분리해내는 것을 막게 됨으로써 결과적으로 피해자의 정당하고도 기본적인 권리인 ‘가해자를 보지 않을 권리’를 침해하고 피해자의 생활권과 교육권을 침해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따라서 가해자는 변화 가능한 존재이지만, 변화가 확인되는 그 시점까지는 결코 쉽게 용서되어서도 인정되어서도 안 되는 존재임을 확실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덧붙여 가해자의 휴학이나 재교육, 공간분리 등은 가해자에 대한 어떠한 처벌이나 징계도 아니며 피해자의 입장에서도 그것이 여하한 적극적인 보상조처들로 해석될 수 없다. 그것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요구되는 가장 기초적인 요건들일 뿐이며, 따라서 피해자들의 이러한 요구들은 결코 위축되어서도 안 되며 그같은 요구들을 가해자가 받아들였다고 해서 하등 고마워하거나 가해자의 변화/용기 등을 인정하는 것으로 될 필요도 없다. 오히려 반대로 그같은 피해자의 권리들을 존중하지 않고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행동과 주장들을 내세우는 가해자를 적극적으로 공격해야 하는 것이다.


② 가해자는 ‘징계’ 받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이 가해자가 휴학을 한다거나, 재교육과정을 이수한다는 것, 공간분리나 활동제약을 받는다는 것은 결코 ‘징계’가 될 수 없다. ‘사건공개’가 징계나 처벌이 아님은 물론이다.

이 모든 것들은 생존자들의 당연한 권리로 이해되어야 한다.

현실적으로 자치규약에서 가해자에게 근신, 정학, 제적 등의 징계를 부여할 수 있는 권한이 없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문제는 그같은 강제력이나 처벌수단이 없기에 오히려 지금의 사건처리 방식이 마치 ‘대단한 징계’나 되는 것처럼 읽혀지게 되는 현상이다.

사건공개나 사과문 공개가 마치 대단한 처벌이나 되는 듯이 읽혀지면서 가해자의 인권을 옹호하는 목소리들이 ‘소수자 인권’의 목소리로 의미지워진 것이다.


③ 가해자 모니터링의 책임은 가해자단위 모두에게 있다.


비대위 공식활동이 종료되고 가해자재교육이 시작되면 실제로 가해자의 행동과 재교육 과정을 모니터링 할 수 있는 인자들이 필요하다. 이는 현실적으로 비대위가 모두 감당할 수 없는 부분이며, 한편으로는 비대위의 책임소재에서 벗어나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비대위는 피해자지원체계로서의 포지션을 취하고 있으며 가해자의 행위에 대한 교육이나 변화의 책임은 가해자 자신과 가해자의 소속단위에 있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가해자 재교육을 감당할 수 있는 단위가 학내에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재교육 자체는 외부단체를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학내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최소한의 모니터링 작업인 ‘가해자 공간분리 이행’에 대한 것과 단위 내에서의 2차 가해적 성격의 소문들을 공론화하고 변화시키는 싸움들조차 가해자단위에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따라서 과/반 단위 학생회에서는 추상적인 수준에서의 반성폭력운동, 피해자 중심주의가 아니라 실제적인 활동들을 담보하는 형태의 운동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같은 활동들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 내부적인 역량들을 쌓아나가는 것이 필수적이다. 축적된 관점과 자원 없이 당위성만으로 결코 활동력을 담보할 수 없다는 것은 숱한 경험을 통해 모두가 알게 된 부분이라 생각되기에 길게 언급하지 않는다.



4. 나아가며

글을 마무리하면서 놓친 부분들이 너무도 많고, 아직도 하고 싶은 말들이 너무 많음을 생각한다. (그러나, 글마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ㅠ.ㅠ)

덧붙여 글이 전혀 세련되거나 고상하지 않고, 상당히 공격적이고 노골적인 언어들로 쓰여졌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며 이같은 ‘포장지 없음’이 여성주의자들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애정에서 비롯될 수 있었던 것임을 다시 한번 얘기하고자 한다.
거칠고 조악한 글이, 많은 논쟁과 소통을 통해 좀 더 풍성한 글로 재구성되기를 기대하면서 이만 글을 맺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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